우정의 기간을 따져보자면 10년에서 약간이 모자란 독일 친구가 하나 있다. 그의 소박한 패션 감각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데,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옷 그대로를 지금도 단정하게 입고 다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거기가 밀라노라면 더욱 그렇다.
밀라노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 난다. 9월인가 쯤의 초가을이었다. 독일에서 저가항공을 타고 밀라노의 외곽 공항인 베르가모(Bergamo)에 내렸다. 지금은 베르가모에 대한 인상이 크게 바뀌었다.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고향이자, 교외 브루사포르토 지역에는 배우 송중기씨의 중년 버전쯤으로 생긴 그윽한 미남 셰프가 버티고 있는 이탈리아 최고의 레스토랑도 하나 있다. 도시 자체도 쾌적하고 아늑해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멋진 곳이다. 그러나 그때는 어디 시골 구석에 들어박힌 공항도시로만, 돈이 없어 리나테나 말펜사 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귀찮은 통과의례의 장소로만 여겼다.
버스를 타고 순환도로를 구불거리며 돌아 간신히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했다. 숙소도 바로 그 옆에 있었다. 역 주변 호텔들이 그리 좋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별이 네 개도 있고 세 개도 있고 나름 자기들끼리 등급이 있다. 돈이 없었던 나는 무조건 싼 곳을 택했다.
도착해보니 정말 가관이다. 기다랗고 흉물스레 지어올린 고층 건물의 허리를 잘라내 중간층을 호텔이랍시고 쓰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려 올라가니 데스크에 앉아 계신 영감님은 스포츠신문(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 코를 박고는 전날 축구경기 리뷰에만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래도 키는 줘야 체크인을 할 게 아닌가?
간신히 통사정 끝에 열쇠를 받아들고는 방이랍시고 표시된 곳에 올라갔다. 분명히 체크인 시간인데 복도에선 서 너명의 남자들이 주르륵 늘어서서 벽 위에 진한 니스칠을 하고 있었다.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무슨 화생방 훈련 수준이다. 허망하게 쳐다보는 나를 보고 한 명이 싱긋 웃더니 자기는 이집트에서 왔단다. 즐거운 밀라노 여행이 되라나 뭐라나. 너무나 ‘평화로운’ 그의 표정에 왠지 힘이 빠져 화도 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호텔(?)을 나설 준비를 했다. 모든 가용 예산의 전부를 오페라 티켓에 쏟아 붓지 않았던가. 오늘 저녁 라 스칼라에서 열리는 공연을 위해 항공과 숙박료를 바득바득 아껴가며 이곳까지 왔다. 비장한 심정으로 수트로 갈아입고는 열쇠를 맡기러 프런트에 다시 내려가니, 영감님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응? 내 착각인가. 아니, 동그래진 눈으로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본다. 아마 이 호텔에 양복을 입는 사람은 아무도 오질 않는 모양이지. 심드렁한 영감님이 웬일로 경어까지 써가며 인사를 건네 주시더라니까. “부오나 세라, 씬뇨레” (좋은 저녁 되세요!). 아, 역시 밀라노에선 옷이 날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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