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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도(4주간 금요일)
제2독서
4세기 어느 교부의 강론에서
(Hom. 18. 7-11: PG 34,639-642)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온갖 충만함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며 그들을 비추어 주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시게 된 사람들은 여러 모양으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눈에 안 보이게 그들 마음속에 영적 평온을 누리며, 은총으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어떤 때 인류를 생각해서 슬픔과 탄식에 빠져 모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드리고 인간에 대한 영적 사랑으로 불타 올라 애통하는 가운데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다른 때에는 성령으로 인해 크나큰 기쁨과 사랑으로 불타 올라, 할 수만 있다면 선한 사람들이건 악한 사람들이건 차별 없이 포옹하고 싶어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마음의 겸손으로 자신을 다른 이들의 아래에다 두고 자신을 모든 이들 중에 가장 천하고 낮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때에는 성령께서 그들을 표현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 존속시키십니다. 어떤 때에는 왕의 갑옷을 두르고 싸움터에 내려가 원수들을 대항하여 용감히 싸워 이기는 강력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실 영적인 사람은 영의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내려가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워 그들을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킵니다.
또 어떤 때에는 그들의 영혼은 깊은 침묵과 평온과 평화 속에 편히 쉬고 온갖 영적 기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온과 참된 행복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성령께로부터 이해력과 표현할 수 없는 지혜와 파악할 수 없는 영의 지식을 얻어, 입으로도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은총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다른 때에 그들은 보통 인간처럼 처신합니다. 이렇게 은총은 그들 안에 여러 모양으로 부어져 여러 방법으로 그들의 영혼을 인도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롭게 하며, 그들이 하늘의 아버지 앞에 흠 없고 깨끗하며 완전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단련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천상 은총의 선물을 주시고 우리가 성령의 인도 아래 하느님의 뜻을 채우며 여러 방법으로 평온을 얻도록 하느님께 크나큰 사랑과 희망으로 기도합시다. 은총이 우리 안에 역사함으로 우리가 영적 완성에로 진보를 이룰 때, 우리는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충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온갖 충만함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Nn. 35-36)
인간 활동의 규범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이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척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정의와 더욱 넓은 형제애와 더욱 인간다운 사회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 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를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하다.
만일 지상 사물들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과 인간 사회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인간이 그것을 점차로 알아내고 이용하며 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런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 자체로써 고유의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각 학문과 기술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 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하게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해도,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대립과 논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은 정신 태도는 간혹 신자들 가운데에도 없지 않았지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이 피조물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치고 이런 견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종교이건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피조물들의 말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말소리를 언제나 들어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
연중 제5주일
독서기도
제2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갈라디아서 주해’에서(Praefatio: PL 35,2105-2107)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읍시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그들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을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은총이 그들에게 전파될 때 할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은총의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있기를 원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의를 섬기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죄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부과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로운 법을 주심으로 해서 그 율법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 주기만 하고 없애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활동하는 신앙의 은총만이 우리 죄를 없애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은총 지위에 세워져 있던 갈라디아인들을 율법의 지배 아래 두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유다교 예배의 외적 예식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이 개종할 때 그들에게 유다의 관습을 따르라고 권한 다른 사도들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그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복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말해 주고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더러 이중적인 행동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오로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해 주고 있지만 갈라디아서와는 한 가지 차이점을 지닙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문제에 있어 뚜렷한 결정을 내리면서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이방 출신의 신자들 간에 발생한 이 논쟁을 해결해 줍니다.
한편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로부터 율법 준수를 강요받아 그들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던 이들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사도 바오로가 자기들을 보고 할례를 받지 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참된 교리가 아니라고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서두의 말씀은 이 문제점을 간단한 말로 넌지시 비쳐줍니다. 앞에 나오는 인사의 말씀에도 자기가 사도라고 말할 때 “그 사도직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바오로의 다른 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으로써 갈라디아인들 보고 유다 율법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시키려 하는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이들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고, 복음적 증거의 권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낮은 사도로 여김받을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담화에서(Prologus: Opera omnia 5,201-202)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성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성서의 기원은 인간의 탐구에 있지 않고 신적 계시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근원이신 빛의 아버지”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흘러내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각 개인에게 은혜를 분배해 주시는 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을 얻으며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처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으로 부터 모든 성서에 담겨 있는 진리의 확실성과 이해가 샘물처럼 흘러 나옵니다. 모든 성서 말씀의 문이고 기초이며 등불인, 우리 마음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신앙을 먼저 가지지 않고서는 누구라 할지라도 성서의 말씀 안에 들어가 그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순례하는 동안 모든 초자연적인 조명의 굳건한 기초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해 주는 등불이며 하늘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당신의 지혜를 내려 주십니다.
성서의 목적과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의 충만을 얻는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그것을 믿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마련된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쓰여진 책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사랑하며 또 우리의 온갖 갈망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때에만 우리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도가 앞에서 우리에게 말해준 대로 성서는 우리를 이 충만함에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목적과 지향으로 성서를 연구하고 듣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올바른 길을 따라 진보함으로써 이 열매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시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단순한 신앙으로 빛의 아버지께 접근하여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 주시도록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분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즉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성서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성도들의 갈망이 향하고 온갖 진리와 선의 완성이신 지극히 복되신 삼위 일체께 대한 충만한 지식과 넘치는 사랑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오리게네스 사제의 창세기에 대한 강론에서(Hom. 8,6. 8. 9: PG 12,206-209)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손수 지고 가는 이사악은 당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가는 것은 사제가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물이시고 또 사제이십니다.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했다.”라는 앞의 인용도 이것을 뜻합니다. 제사를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불씨와 칼을 챙겨 들고 갈 때 이사악은 뒤에서 걷지 않고 아브라함과 나란히 걸었고, 이렇게 하여 자신도 아버지와 동등하게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사악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불렀습니다. 이와 같은 순간에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유혹의 목소리입니다. 번제물로 바쳐질 어린것의 소리를 들을 때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굳어져 있었다 해도,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그 목소리로 “얘야! 내가 듣고 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사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도 애정 어리고 조심스런 아브라함의 대답은 정말 감동적인 대답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라고 말할 때 현재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대해서 물어 보는 아들에게 미래에 대해 대답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어린 양을 마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주님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여기 이 말씀을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 대해서 하는 다음 말씀과 비교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죽음에 내어 주셨다.”라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겨루시는 그 인자가 얼마나 위대한 지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기로 되어 있었지만 죽지 않은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께서는 죽으실 수 없는 아드님을 온 인류를 위해 죽음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사악은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숫양 한 마리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봅니다. 죽임당하지 않은 이사악과 죽임당할 숫양이 둘 다 어떤 면으로 그리스도를 표상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말씀께서는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당하실 때 육신으로 당하시고 죽임 당하실 때 육신으로 당하셨습니다. 이 숫양은 그 육신 안에서의 수난과 죽음의 예표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대해 “보라,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영에 따라서 볼 때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악은 죽지 않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물이시고 또 영에 따라 볼 때 대사제이십니다. 육신을 따라 아버지께 제사를 바치시는 분은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스스로 바쳐지셨습니다.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편지에서(Ep. 35,4-6. 13: PL 16[ed. 1845], 1078-1079. 1081)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육신의 행위를 죽이는 사람은 살리라.” 하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가 살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즉, 종의 영이 아닌 하느님 자녀됨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줍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한 대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또 우리가 고난을 겪는 데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실상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새사람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마주보게 될 때 우리 안에 나타날 미래의 상급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나타날 영광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오로 사도는 계속하여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해방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아직 헛됨에 매여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기능에 필요한 은혜를 그리스도에게서 받기를 기대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패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에 참여케 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때 하나의 자유 곧 피조물과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하는 자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의 나타남이 아직 미루어져 있는 상태인 동안 모든 피조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됨과 우리 구속의 영광을 기다리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구원의 영을 낳는 진통으로 아파하면서 헛됨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을 고대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자명합니다.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 자신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선이신 하느님을 마주뵐 때 영육 모두가 구원될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지금 주님의 교회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뵐 모든 이들이 부패 없이 영광스럽게 또 영예롭게 부활할 때에만 완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 피조물이 완전히 구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랑으로 여기면서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말씀처럼, 믿음이 우리를 살리듯이 희망도 우리를 살립니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갈라디아서 주해’에서(Nn. 37. 38: PL 35,2131-2132)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기를 기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합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즉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기에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즉, 내가 유다인으로 태어났지만 영적 판단력을 얻어 온갖 육적인 생각들을 배격하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 말씀을 하고 나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반감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 대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잘못한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어서 바오로는 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러 그들이 바오로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로서 본받게 합니다. 또 계속하여 말합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바오로가 어머니이신 교회를 대신하여 이 말씀을 한 것입니다. 다른 데서 그는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은 은총의 자유로 부름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업적이 이룬 무가치한 공로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공로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 안에서, 그의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앙인을 당신의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즉 당신 자신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는 형성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결합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의 인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인간 존재들은 형성되기 위해서 어머니의 모태에서 잉태되고, 일단 형성되면 해산의 고통을 겪는 가운데 태어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은 바오로가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낳기 위해 겪은 고통과 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은 그들이 유혹이라는 위협으로 미혹될 위험이 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느끼고 있는 이 해산의 고통은 “그들이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고 말할 때 그는 그들의 신앙의 첫걸음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고린토 후서에서 약간 다른 말로 이 해산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Sermo in Nativitate Domini 7,2. 6: PL 54,217-218. 220-221)
당신 본성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참인간으로 탄생하실 때 당신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시고, 인간 모습을 취하여 강생하심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영적 출발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이 어디 있고, 이 은총을 표현할 수 있는 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악행은 결백으로 낡은 것은 새것으로 변모되고 소외된 이들은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며 유산 받을 권리가 없는 이들은 유산의 몫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여, 깨어나 당신 본성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조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모상은 아담 안에서 일그러졌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땅과 바다, 하늘과 공기, 샘과 강물들을 사용하듯이 다른 모든 보이는 피조물들도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대로 사용하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경이는 모두 다 창조주의 찬미와 영광으로 돌리십시오.
당신 육신의 눈으로 물체적 빛을 감촉하고 당신 영혼의 온갖 열망으로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는” 그 참 빛을 알아들으십시오. 이 빛에 대해 예언자는 말합니다. “우러러 주님을 보라. 기꺼우리라. 너희 얼굴 부끄럼이 있을 리 없으리라.”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또 하느님의 영이 참으로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면, 누구든 신자가 자기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업적들을 경멸하라고 암시하거나 또는 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한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선한 피조물들 안에서 여러분의 믿음과는 어긋나는 것이 있다고 느끼게끔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그 아름다움을 합당하고 균형 있게 사용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세에 태어나고 후세에로 새로 태어난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것에로 마음을 향한 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더 깊이 통찰하기 위해 신적 은총이 우리 인간 본성에 베풀어 준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들읍시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스텔라 수도원의 복자 이사악 아빠스의 강론에서(Sermo 31: PL 194,1292-1293)
사랑의 최고성
형제들이여, 왜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는 기회를 찾는 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또 왜 서로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도와주거나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져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까? 다음 말씀에서 바오로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서로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 에페소서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진정코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나의 형제가 몸의 병으로나 버릇으로나 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고칠 수 없는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왜 내가 그것을 참아 주지 못합니까?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염을 받으리라.”고 성서가 말하듯이 왜 내가 그를 너그러이 위로해 주지 못합니까? 아마도 내가 모든 것을 참고 너그러이 인내하며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당신이 짊어져 주신 이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해 주신 이들을 짊어져 주시면서, 당신의 수난에서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시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셨습니다.” 한편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를 공격하고 그의 약점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분명히 악마의 법에 복종하여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의 약점을 져주고 악행만을 공격하며 서로서로 동정하는 가운데 상호간에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위는 생활 규범이나 양식이 무엇이든 간에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또 변경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규준입니다. 사랑은 모든 행동을 인도하는 원리이고 그것을 행해야 하는 목적입니다. 사랑을 향하여 또 사랑의 빛을 받아 진실히 행하면 비난받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사랑 없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랑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분은 세세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