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그 특성
연구목적과 연구방법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서 론
가. 연구의 목적
우리는, 서양에서 중세 이후를 지칭하는 모던을 근대와 현대로 혼용하여 사용해왔다. 그런데 한국문학사에 근대/현대를 적용하면, 이 두 시간대는 단순한 계기적 관계로 정립되지 않는다. 도식적 위협을 무릅쓰고 단순화한다면, 우리에게 두 개의 <현대>가 있었으니, 좌파의 <현대>는 러시아 혁명(1917) 이후를, 우파의 <현대>는 자본주의의 수정 또는 변모가 가속화했던 대공항(1929)을 지칭했던 것이다. 두 개의 <현대>론에 입각하여 두 개의 <현대> 문학론이 구성되었으니, 좌파에게 <현대> 문학이 근대 부르조아 문학의 리얼리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뜻한다면, 우파에게 <현대>문학은 근대 부르조아 문학의 리얼리즘을 해체한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 주요한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시 혹은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조망해 볼 때, 대체로 두 가지 주된 줄기가 윤곽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모더니즘시’고, 다른 하나는 ‘리얼리즘시’다. 정지용이나 이상에 의해 틀이 잡힌 모더니즘시는 산업사회의 변모와 결부되어 현대성의 추구에 역점을 두면서 김수영을 거쳐 뻗어내리고 있으며, 임화와 이용악으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리얼리즘시는 사회의 진보와 관련하여 현실에 대한 빈핍한 탐구에 역점을 두면서 신경림이나 김지하 등의 시적 성취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사항은 이 두 가지 문학사적 조류가 서로 역동적인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흐름은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개별 시인의 시세계에서 얼마든지 합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현대문학사조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근대시 초기부터 리얼리즘은 계몽문학, 자연주의, 신경향파, 프롤레타리아문학 등과 같은 문학운동을 관류하며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결정하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못박는 마르크시스트 관점과는 달리 시의 리얼리즘은 계급적으로 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한국문학사에서의 근대성의 추구의 한 축선에 리얼리즘이 있었다는 것은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20세기의 한국 문학은 두 개의 현대론 등장 이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및 이 두 담론에 기원한 변형 담론들 사이의 단속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하여, 리얼리즘은 이제 문학적 토론의 한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말은 그 개념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리고 예술사적 발전 과정의 단계에 따라 복합적 어휘로 재생산되어 쓰이기도 한다. 리얼리즘이 범세계적 문학 논쟁의 중심적 위치에 놓이게 된 까닭 중의 하나는 이처럼 이 말의 개념이 정착되어 있지 못하고, 따라서 그 사용법이 극히 다양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근대문학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계몽문학, 자연주의, 신경향파, 프롤레타리아문학 등과 같은 문학운동을 관류하며 한국문학의 근대성 추구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대담한 일반화는 대략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근대문학의 상식이 되다시피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리얼리즘이 일정한 정체를 가지고 있는 고정된 물체가 아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사회적 입장과 문학적 관점이 다른 데에 따라 얼마간씩 다른 의미를 지니고 각각 다른 의도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즉 초기 리얼리즘이 한국에 상륙해 현대시와 접맥되는 과정에서 각가지 경험이 생겨나고, 뒤바뀌는 가운데 그 개념에 대한 기술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리얼리즘시에 관한 논의는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주로 비평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왔다. 당대의 민족현실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강조한 것이 19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론이라면 그러한 민족문학론이 미학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리얼리즘에 대해 검토하면서 시에 관한 리얼리즘 논의가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이다. 하지만 종래의 리얼리즘론이 주로 소설과 결부되었던만큼 시와 리얼리즘을 연계하는 데는 조심스러운 모색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리얼리즘시의 요건, “당대 현실의 사실적 묘사 그 자체보다도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정당한 실천적 관심이라는 애매한 기준”이 마련되었는데, 문제는 ‘실천적 관심과 결부된 정당한 현실인식’에 작용하는 시정신의 성격과 그러한 현실인식이 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모색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당한 현실인식이 시 장르의 속성에 호응하면서 과연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시에 나타나는 리얼리즘적 요소를 유형화해서 살펴봄으로써, 리얼리즘시의 특성과 그 양상을 보다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런 판단에는 리얼리즘이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인생과 사물을 표현하는 예술적 방법에서 여러 종류의 관념주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그 자신의 통일된 법칙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리얼리즘의 총체적 내포의 핵심인 리얼리티를 실현하는 문학적 장치를 방법적 원리와 기본적 요소 측면에서 크게 나누어 한국시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특성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나. 연구 방법과 대상
리얼리즘시 논의의 관건적인 문제의 하나는 시 장르의 특수성에 입각한 리얼리즘 미학의 보편성 추구에 있다. 종래의 리얼리즘시 논의가 어떤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골이 깊은 견해차를 노정하는 데 그친 것은 '시의 특수성'과 '리얼리즘 미학의 보편성‘ 자체에 대한 심한 견해차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시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기도 한데 그러한 탐색조차 시의 양식적 속성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좋은 내포를 지니고 있는 용어는 다양한 범주와 의미를 지닌다. <리얼리즘>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이 용어는 우리 시사와 문학사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그 개념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 용어들이 지칭하는 작품 경향에 따라 각기 다른 내포 범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먼저 리얼리즘의 개념과 내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리얼리즘은 작가가 현실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자, 창작방법이며, 더 넓게는 문예사조적인 개념을 포함하는 용어다. 우선 리얼리즘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 이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틀이 되는 사상이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리얼리즘은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창작 방법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 전형이나 현실 반영을 통하여 세계를 객관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방법적 모색이다. 그리고 이렇게 창작된 문학 작품의 일반적 경향인 문예사조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사실주의, 현실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문예상의 경향을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이 중 어느 한 개념 범주에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 다양한 범주와 내포들이 서로 교섭하는 가운데 규정되는 개념 범주가 같이 사용된다. 한 마디로 창작과 수용의 전과정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이나 작품을 보는 관점과, 각 단계나 과정에 작용하는 내포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시키는 장치를 유형화하고, 리얼리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고착된 리얼리즘의 정신을 현실 반영에 있다고 보고, 그 기본적 요소를 사분화해서 시에 접맥하고자 한다. 시는 하나의 장치만으로 리얼리즘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시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에는 여러 시적 요소나 작가의 정신이 같이 작용한다.
우리 문학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양상을 서양의 리얼리즘 사조의 도입으로 보는 것은 속좁은 단견일 것이다. 문학이 인생과 갖는 관계에 비추어 볼 때, 리얼리즘은 사회와 문화의 일정한 상태에 상응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도 어느 정도 현실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연암 소설에 이르면 리얼리즘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본격적인 리얼리즘은 1919년 이후 <창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생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려고 했다>는 말은 창조파 작가들이 이광수의 계몽문학을 거부하는 최초의 리얼리즘의 선언처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어느 정도 정확한 것과 미숙한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미숙한 경우는 리얼리즘을 자연주의와 구별하지 못하거나, 리얼리즘 및 자연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모든 시론이 그렇듯이 리얼리즘 시론 또한 시에 대한 곡진한 이해에 기여하는 한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시는 개별 작품마다 천차만별의 독자적 형상으로 창조되는 것이기에 어떤 일률적인 기준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리얼리즘시를 측정하는 편리하고도 특별한 ‘황금의 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성의 시론을 특정한 시작품에 시험해 볼 때라도 작품으로부터 오는 반작용에 민감해야 창의적인 시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얼리즘시를 쓴 시인으로는 임화를 비롯한 백철, 1930년대 후반의 이용악, 백석, 안용만, 50년대의 박봉우, 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 70년대의 김지하, 신경림 , 80년대의 고은. 박노해, 김남주, 이시영, 최두석, 90년대의 곽재구 등이 있다. 이들 중 리얼리즘시의 방법적 원리에 부합하는 시인의 시를 인용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들 시를 선정한 이유는 그들의 시가 사회 현실의 핍진한 형상화라는 면에서 돋보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