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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9편 16절-60편 1절.
59편 16절-17절: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60편.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
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59편.
16절: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절-15절 참고) 교회 안에서 육적 세상적 비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사악한 자들인데, 이 사악한 자들이 종교적인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타락한 세상과 합작을 하게 되어있다.
예수님 당시 때도 바리새 교파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의 정치세력과 합작을 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고,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을 죽일 때 꼭 이방세력을 등에 업고 그런 짓을 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죽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이방세상과 똑같은 정신이 들어있어서 선지자를 죽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기 속에 옛사람이 세력을 얻으면 새사람의 소망은 무시된다. 자기 속에 세상정신이 득세가 되면 이 사람은 아무리 영생의 말씀을 받아도 싫은 소리로 들린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정 반대다. 예수님께서 ‘내가 한 말은 영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니까 육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이치를 조금만 알면 이런 게 금방 드러난다. 그런데 육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이름을 붙여서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거니’ 라고 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말을 해 주면 되게 듣기 싫어한다.
미래의 영원한 축복은 현재에서 사람에게 되어지는 거다. 사람이 신적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성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이 사람에게서는 신적인 기능과 지능이 나오게 되어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에게 어떤 사건 환경이 부딪혀도 척 척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겁이 없다. ‘사망아, 오너라. 죽음아, 오너라. 네가 쏘는 게 뭐냐?’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자기에게 손해를 주겠느냐? 아무 것도 없다. 무섭지 않다 그 말이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신적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꾸 환경을 천국처럼 좋게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 주면 자기가 그곳에 가서 천국처럼 누리겠다는 거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느냐? 없다.
자기를 다스리는 자가 참 강한 거다. 자기를 단속하고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 군대들보다 낫다. 이건 굉장한 힘이다. 이 힘을 성경에서 길러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들고 ‘물질적 축복 축복’ 하고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불 보듯 빤한 거다. 사기꾼들의 등쌀에 다 빼앗기는 거다. 그런데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걸 전혀 모르고 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사악한 자들이 타락한 세상과 합작을 해서 자기 시대를 이루기 위해 밤새도록 부르짖고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있을 때 성도다윗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의 산성에 있었다. 세상소원 목적을 가진 자는 누구도 그 신앙의 위치, 그 높은 차원을 감히 침범할 수 없고 올라갈 수 없는 영역이 하나님의 산성이다. 산성은 세상이 올라올 수 없는 세계다.
세상은 모든 사고방식이 물질의 영역이고, 기독교 신앙의 세계는 영의 영역이다. 그러니 물질적인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영적인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느냐? 안 되는 거다. 아무리 학박사라도 못 올라온다. 못 들어온다. 세상의 학박사가 아무리 논리가 정연할지라도 이들의 지식의 출처는 물질세계요, 물질적 개념이요, 이성적 개발에서 나온 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신앙의 세계는 진리이치로서 나오는 사상이다. 진리이치를 먹고 나온 이성은 이 영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무슨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진리이치로 된 게 아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보거나 꿈을 꾸거나 하면 성령의 역사로 알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고방식부터가 바로 된다. 바로 안착이 된다.
일반적으로도 볼 때 어린아이들이 손에 맛있는 것을 들고 기뻐하는 기쁨의 감화성이 있고, 어른들이 술을 먹고 노는 기쁨의 감화성이 있는데, 이게 같으냐, 다르냐? 아이들은 차원이 낮아서 마귀가 하는 짓이고, 어른들이 술을 먹고 기뻐하는 기쁨의 감화성은 성령의 감화성이냐? 둘 다 똑같이 육신적 세상적 차원이다.
성도다윗이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은 고차원적인 신적 본질적 신앙의 거처지에서 살았다는 거다. 사악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분별하여 깨어있었다는 말이고, 그들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거짓된 목사들이 이걸 알까? 다윗의 이 차원 높은 신앙을 알까? 모르고 있다.
신앙의 성질은 비교가 될 게 있고, 비교를 할 수 없는 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 다른 세계가 있다. 그러면 기독교 안의 구복주의나, 신비주의나, 사회주의나, 구국주의나, 극기 극복 주의나, 초절주의나, 은둔주의 등등은 질이 같으냐, 질이 전혀 다르냐? 질이 같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전부 어디에 속하는 거냐? 세상에 속하는 거다. ‘무슨 주의, 무슨 주의’ 라고 하지만 이들의 소원 목적은 질적으로 전부가 세상에 속해 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각 주의마다 추구하는 방식만 다른 거다.
세상사람을 보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소원 목적을 다 가지고 있는데,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산삼을 캐러 다니고, 어떤 사람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전복을 딴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목적은 같은데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그런 것처럼 기독교 안에 이런 저런 주의가 있지만 전부는 세상을 목적한다는 것은 다 같고 추구하는 방법만 각기 다르다. 이들이 아무리 이런 저런 방편을 써서 부자가 되려고 할지라도 근원적으로는 똑같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들고 주장을 해도 이들의 신앙의 질은 천국은 아닌 세상에 속한 거다.
예수 믿으면서 각자가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며 나가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하는 주의로 나가는 것이 성령을 빨리 받는다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나가는 거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그런 주의들을 아무리 비교를 하고 판단을 해 봐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게 있느냐? 없다. 그러면 무슨 주의라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냐? 지식의 온전, 질적 온전이 되려면 무슨 주의로 나가야 하느냐?
세상에 속한 것은 아무리 꼭대기까지 높이 올라가도 질적으로 세상이지 천국은 아니다. 그리고 인격의 온전은 없다. 세상성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하나님의 성품에 비하면 이질이다. 이질에는 온전이 없는 거다. 세상의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을 다 합쳐놔도 하나님의 지식과 100% 같은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세상의 상징수인 666을 아무리 합쳐도 66666.....으로 나갈 뿐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숫자인 7로는 못 올라간다. 근원적으로 못 올라간다. 전혀 다른 세계다. 이걸 알아라. 지식적인 면에 666, 지혜적인 면에 666, 도덕성적인 면에 666을 다 갖다 붙여도 세상성으로는 7로는 못 올라간다. 하나님의 것은 오로지 7로만 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기독자들이 이걸 알고 있느냐? 모른다.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도 모른다. 그러니 안식이 안 된다. 마음에 평안이 안 된다. 평안이 안 되니 마음에 기쁨도 없다. 안식은 기쁨이다. 말씀에 의해 기쁨이 나오는 것이 참 만족이다. 이 궤도로 올라서야 진리 이치적으로 계속 뻗어나가면서 7로 충만해지는 거지 666으로는 이게 안 된다.
666인 세상성을 가지고 7로 못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성질을 가지고 신앙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을 목적하며 예수를 믿는 것은 질적인 면에서 신앙이 아니다. 또한 종교성으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없다. 아무리 종교적인 행사를 크게 많이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사람이 불어나고 돈이 많이 들어올지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참 본질의 신앙에 도달이 안 된다.
하나님의 질에 하나라도 도달이 되면 그만큼 하나님의 성품에 들어가지는 거다. 진리이치를 하나를 잡으면 하나가 생명으로 들어서고, 둘을 잡으면 둘이 들어서고, 이렇게 되면서 하나님의 차원으로 충만해지면서 올라가게 되는 거지 육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이렇게 되어지지를 않는다. 옳은 것을 받아도 우리 속에 세상성이 차 있는데 그나마 옳은 진리이치가 아닌 세상소원 목적을 먹고 있다면 이건 희망이 없는 거다.
교회가 종교적 외식으로 흐르면 이 교회는 반드시 세상과 합작이 되어있는 거고, 이런 교회는 사단 마귀와 악령과 귀신들의 서식처가 된 거다. 이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피하여 진리를 붙들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산성이다. 하나님의 산성은 세상 그 무엇도 침범을 못한다.
교회청년들이 중동으로 선교하러 갔다가 무장단체에게 잡혔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잡혀서도 복음을 전했느냐,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전 세계에 호소를 했느냐? 이런 일이 생기면 국가적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들을 살려내야 한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국가가 할 일이다. 그런데 영적인 신앙사상 면에서 보면 ‘그들의 신앙이 좋다. 나쁘다’ 이것보다 육신의 목숨에 위협이 오니까 세상보고 살려달라고 하는 그 사상이 진리신앙이냐, 아니냐? 아니다. 진리신앙은 애당초 그런 식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질을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것, 말씀의 봉우리,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는 것이 산성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모든 환난과 역경과 시험을 다 이기고 승리하여 주를 찬송할 수 있는 거다. 주를 찬송하는 이유는 모든 환난과 역경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이 주로 말미암아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서 주님께 찬송을 하는 거다.
17절: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만물을 다 만드셨고,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셔서 교회에도 계시고, 산에도 계시고, 땅속에도 계셔서 모든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절간에도 계시느냐? 계신다.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장소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만 계시고 다른 교회에는 안 계시느냐? 다른 교회에도 계신다. 하나님의 편만성을 볼 때 어디든 다 계신다. 그런데 ‘그곳에는 안 계신다’ 라고 말을 한다면 이 말의 의미가 뭐냐? 진리가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성령님이 역사를 안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성도가 가는 곳에 하나님께서 가시는 거다. 이런 면에서의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자기의 하나님이 되겠지만 그러나 진리가 어두운 환난 때, 죄악의 밤에 하나님은 누구를 긍휼히 보시고 누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느냐? 사악한 무리들과 같이 하지 않고 진리생명의 도를 붙잡고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면서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만 같이 하신다. 이런 자의 하나님이 되어서 환난 때 도움을 주시는 거다.
그러면 무슨 도움을 어떻게 주실까? 첫째는 깨달음을 주신다. 두 번째는 그 성도가 견딜 수 없는 것을 이기게 해 주신다. 이 때 이 성도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다만 목숨을 걸고 진리의 길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바른 말씀을 깨닫고 이 말씀을 잡고 목숨을 걸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가 모르게 이리저리 일을 다 처리해 버린다. 이게 하나님의 도움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면, 하나님께 잘 보이면 하나님께서 소문으로 듣게 하시든지, 직접 보게 하시든지 하게 해서 나를 해코자 하는 무리들을 어떤 방식으로건 물리쳐 주신다. 환난 때에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이 되어서 도움을 주신다. 그리고 사악한 무리들의 죄악의 밤이 다 지나고 천국의 새로운 날이 밝아질 때 신앙정조를 지킨 성도는 주님을 찬송하게 되어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된다.
60편.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
다윗이 겪은 사건을 통해 교훈을 하기 위해 지은 시라고 하니까 우리는 이 시에서 진리이치를 발견해야 한다. 신앙사상 면에서 영의 눈을 가지고 깨달아야 한다. ‘믹담’이란 ‘황금의 시’ 라는 뜻이고, ‘수산’은 ‘백합화’ 라는 거고, ‘에둣’은 ‘증거’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수산에둣’이란 ‘백합화의 증거’ 라는 뜻이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아람 나하라임’은 북쪽 메소보타미아 지역이고, ‘아람소바’는 다마스커스와 유프라테스강의 상류다.
다윗이 이 지역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남쪽에서 방비가 허술했는지 그곳을 통해 에돔이 쳐들어왔는데, 이 때 요압이 이끈 군대가 12,000명의 에돔군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이 온 거다.(삼하8:13-)
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이스라엘이 전쟁 중인데 이 때 이스라엘 군인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에 관한 문제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고, 또 다윗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살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흩어버리실까? 다윗은 그 요인을 하나님의 분노로 보았다. 자국의 군인이 싸우다가 도망가는 것을 볼 때 안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뒤에서 사살을 해버린다. 그러나 신앙인인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를 봤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분노하셨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거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중을 무시한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싸움에 나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군인의 숫자가 많다고 승리를 장담한다든가, 무기가 많고 강하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한다든지 하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 안 드는 짓이다. 그 다음에 인간의 타락적 기존지식에서 나온 생각, 이것이 인간의 모략인데, 이것을 믿고 전쟁에 나간다든지 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드는 거다.
한국사람은 국민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상대방이 유리하도록 이쪽에서 외치면 안 된다.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이게 성경을 보는 거다. 성경을 통해 보면 눈에 보이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또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욕하는 것을 들으면 내 마음이 좋으냐? 이상하게 속에서 뭔가 올라온다. 은연중에 사람마다 한 나라의 국민이라고 하는 소속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마음들은 타락적 기존적인 지식에서 나온 것인데, 이방세상은 이런 사고방식으로 전쟁의 승리를 장담을 한다. 한국사람들도 우리가 북한보다 무기가 좋다고 자랑을 하며, 그래서 북한과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 무기는 그들보다 좋지만 군인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정신이 있는지 이게 의심스럽다. 정신무장이 바로 안 돼 있으면 아무리 무기가 강해도 지는 거다. 군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무기를 적군에게 팔아먹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영적 이스라엘의 승리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사면 아무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인간이 왜 꼭 하나님만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하느냐?’ 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되느냐? 왜 예배시간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시시콜콜 간섭을 하느냐?’ 이런 게 없느냐?
예수 믿는 내가 자기의 소원 목적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 따로 있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는 다르다. 따로 있다. 이것은 확 표시가 난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이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과 같아야 하느냐,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 같아야 하느냐?
자기의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소원 목적 안에 들어있어야 한다. 이게 진짜 자기의 소원 목적이다. 이런 줄로 알고 이렇게 해 봐라. 제 멋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살기가 편한 거다. 훨씬 평화롭고 훨씬 행복한 거다. 그렇지 않고 세상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마음 속에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되어 들어가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기독자들 속에는 자기의 소원 목적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이 다로 있다. 이건 잘못된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말씀 자체화 되고 당신의 성품을 닮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자가 되라는 것인데, 믿는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로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러실까, 엄청나게 고통으로 살게 해 주려고 그러실까? 어느 쪽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