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ㆍ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ㆍ소승ㆍ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동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도견(道堅)ㆍ혜란(慧鸞)ㆍ혜부(慧敷)ㆍ혜훈(慧訓)ㆍ도명(導明)
그 후 도견ㆍ혜란ㆍ혜부ㆍ혜훈ㆍ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