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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토지’ 위에 세운 민족사
출생 | 19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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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8년 |
작가는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존재다. 무릇 작가라는 존재는 스스로 고난의 수형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과 불행에 대한 자의식 없이 대작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리라. 박경리(朴景利, 1926~2008)는 어느 지면에선가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일제 강점기, 전쟁, 군사 독재 시대에 걸쳐 가로놓인 그의 삶은 고스란히 불행에 물들어 있다. 아버지와의 불화, 편모 슬하에서의 불우한 성장기, 전쟁 때 겪은 남편의 죽음, 용공 혐의, 어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군사 독재 시대의 폭력, 고독과 가난······. 「불신 시대」 · 『시장과 전장』 · 『김약국의 딸들』 · 『토지』 등으로 한국 문학사의 큰 봉우리로 우뚝 솟아오른 그의 삶에 켜켜이 스며 있는 도저한 불행과 고통은 작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를 수밖에 없었던 대가인 셈이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으랴 하는 따위의 뜻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시종 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줍시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끓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은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각주1)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다. 작가의 출생은 스스로 털어놓은 바대로 “불합리했다”. 출생의 불합리한 배경은 숙명처럼 고독을 끌어안게 만들며, 고독 속에서 문학을 향한 그의 꿈은 영글어간다. 워낙 소심한 성격을 타고난 그는 어릴 적에 공부도 썩 잘한 편이 아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소외감으로 물들어 있다. 아버지는 열네 살 때 조강지처를 버리고 네 살 연상의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곧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진다. 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나돌면서 가정을 고의적으로 유기한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사는 소녀에게 소외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떠돌면서 딴살림을 차렸고, 박경리는 홀어미나 다름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의 사춘기를 지탱해준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여학교 시절을 평범하게 보낸 편이다. “평범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던 박경리는 무슨 보상을 받기라도 할 양으로 어기차게 독서와 시 쓰기에 매달린다.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자 분노한 나머지 여학교에 다니다 말고 고향 마을에 돌아온 그는 “어쩌다가 좁은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치게 되면 목뼈가 부러질 만큼 외면”을 한다. 나중에 임종조차 외면할 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반항심은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박경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곧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은 6·25가 터지면서 행방 불명이 되더니 1950년 말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는 다시 세 살짜리 아들을 잃는다. 그는 “악이 승리한다는 절망”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이런 것에 꺾이지 않고 현실과 정면 대응하기 위해 틈틈이 습작을 한다. 박경리에게 문학은 그 도저한 불행과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였다. 나날의 삶은 고투였다. 그는 뒤틀린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진, 어떤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자존심을 지닌 젊은 전쟁 과부로 세상과 맞선다. “이 곳 풍토에 있어선 과부란 인권 유린의 대상으로 예각(銳角)과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한 박경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존심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김동리의 부인이 진주여고 선배여서, 박경리는 자신이 써둔 시작 원고를 김동리에게 보일 기회가 생긴다. 습작 원고를 읽고 나서 한동안 반응이 없던 김동리는 얼마 뒤 작품을 갖고 ‘문예살롱’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낯가림이 심했던 박경리는 친구를 앞세운 채 문예살롱에 드나들며 김동리에게 습작품을 보인다. 김동리는 시를 주로 쓰던 박경리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던 박경리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던 중 문예살롱에서 누가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박경리는 모욕감에 떨며 다시는 문예살롱에 나가지 않는다. 그는 곧 김동리에게 넘어가 있던 습작 원고 뭉치도 친구를 통해 돌려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박경리는 김동리의 큰아들로부터 『현대문학』에 작품이 추천되었으니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습작 원고 뭉치를 돌려줄 때 빼놓은 작품을 김동리가 『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이로써 박경리의 「계산」이 『현대문학』 1955년 8월호에 발표된다. 첫 추천을 받고 1년이 지난 뒤 「흑흑 백백(黑黑白白)」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박경리는 비로소 한국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박경리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군식구」 · 「전도(剪刀)」 · 「불신 시대」 · 「영주와 고양이」 · 「반딧불」 · 「벽지(僻地)」 · 「도표 없는 길」 · 「훈향」 · 「암흑 시대」 · 「호수」 · 「연가」 · 「어느 정오의 결정」 · 「비는 내린다」 · 「해동여관의 미나」 · 「재귀열」 등을 『현대문학』 · 『신태양』 · 『사상계』 · 『여원』 · 『주부생활』 등의 지면을 통해 발표하고, 『현대문학』 1959년 2월호부터 11월호까지 장편 소설 「표류도」를 연재한다.
박경리는 등단 초기부터 전쟁의 상흔과 훼손된 삶의 세목을 사실적으로 복원한다거나, 삶에 들러붙는 불행을 개인의 운명으로 돌리지 않고 그것의 구조적 원인인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일련의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그에게 쓴다는 것은 곧 개인의 삶을 비극의 골짜기로 떼밀곤 하는 허위와 위선, 배금주의로 가득 찬 사회 현실에 대한 항거와 다를 바 없었다. 1957년 단편 소설 「불신 시대」로 제3회 ‘현대 문학 신인상’을 차지한 데 이어 몇 해 뒤 장편 소설 「표류도」로 김내성 문학상을 거머쥐며 박경리는 문단에서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다. 「표류도」가 매스컴을 타면서 대중에게도 이름이 알려지고 영화 원작료, 인세, 원고료 수입 등으로 그의 작가 생활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불신 시대」는 9·28수복 전야에 유엔군의 폭격으로 남편을 잃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타락과 폭력으로 치닫는 현실 속에서 시달리는 한 전쟁 과부의 체험을 담아낸 작품이다. 치료약의 함량을 속이는 병원, 의사의 무관심으로 “도수장 속의 망아지처럼” 목숨을 잃는 외아들, 내세를 미끼로 돈을 갈취하는 종교인, 돈을 떼어먹는 친척 아주머니······. 작중 화자는 “육신과 더불어 정신이 해체되어가는” 상황을 겪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도무지 못 믿게 된다. 작중 화자는 편안한 사후 세계를 보장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절에 맡겨온 아들의 위패를 태워버릴 결심을 한다. 기만과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속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던 종교마저 배금주의에 젖어 돈 없는 집안의 위패는 홀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패를 불사르는 행위는 곧 자신을 억압하는 ‘불신 시대’의 모든 조건을 불사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상이다.
작가는 소설의 끄트머리에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작중 화자의 말을 새겨 넣는다. ‘불신 시대’라는 말로 요약되는 타락한 세계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그 모든 타락의 조건을 끝끝내 수락하지 않은 채 거기에 완강하게 ‘항거하는 생명’은,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작은, 하나의 희망의 메시지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대하 소설 「토지」의 연재에 들어가기 전까지 창작의 무게 중심이 단편 소설에서 장편 소설로 넘어가는 것은 박경리 문학의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 시기에 그가 발표한 장편 소설로는 「성녀와 마녀」 · 「내 마음은 호수」 · 「은하」 · 「푸른 운하」 · 『김약국의 딸들』 · 「노을진 들녘」 · 「암흑의 사자」 · 「가을에 온 여인」 · 「재혼의 조건」 · 「그 형제의 연인들」 · 『시장과 전장』 · 「파시」 · 「녹지대」 · 「타인들」 등이 있다. 전작 장편으로 내놓은 『김약국의 딸들』과 『시장과 전장』을 빼면 이 작품들은 거의 다 『여원』이나 『주부생활』 같은 여성지나 일간지의 연재물로 발표된다.
1969년 박경리는 『현대문학』에 대하 장편 소설 「토지」 1부를 선보인다. 몇몇 평론가가 일찍이 내다본 대로 「토지」는 처음부터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이 될 조짐을 내보인다. 이제껏 박경리가 내놓은 작품들은 이 「토지」를 위한 준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작가는 한 특집 기사에서 「토지」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토지」는 육이오 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 있었어요.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주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토지」는 원래 1부로 끝낼 요량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5부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마흔여섯부터 지금까지니까, 스물네 해를 「토지」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에요.송호근, 「삶에의 연민, 한의 미학」 ― ‘박경리 특집’, 『작가세계』(1994 가을) 재인용
작가는 「토지」에서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변천 속에서 다양한 인물이 겪는 고난의 운명을 묘사하며, 그들의 현실 극복 의지를 통해 민족의 한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을 시도한다. 부와 노동, 공동체적 집단의 상징인 ‘토지’라는 문제가 지주와 소작인 또는 빈농의 계급 갈등이나 대립 관점이 아니라 가족사적 혈연과 재산의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는 게 흠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토지」는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대하 소설로 손색이 없다.
우선 방대한 분량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19세기 말에서 시작해 해방 공간까지 끌어안는 시간적 배경과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해 만주와 서울 · 도쿄 등지로 방사선형으로 뻗어나가는 공간적 배경을 아우르고 있으며, 윤씨 부인에서 시작해 아들(최치수), 손녀(최서희), 증손자(윤국 · 환국)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지주 최 참판댁의 4대에 걸친 모계 중심의 가족사(家族史)가 대하처럼 펼쳐지면서 독자의 의식을 압도하는 것이다. 최 참판댁을 축으로 여러 가계의 흐름이 얽히고, 양반 토호, 농민, 목수, 포수, 노비,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계층이 각양 각색인 사람들이 어우러지며 펼쳐지는 이 대하 소설은 개항, 의병 항쟁, 동학 운동, 병합, 독립 운동 등 한국 근대인의 삶을 규정한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재래 혈통의 인습을 깨뜨리고, 여성 즉 윤씨 부인에서 서희로 이어지는 가문 계승의 방법은, 여성의 시각에서 봉건적 가부장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토지」가 나오자 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토지」는 4세대에 걸친 최 참판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함께 한 마을의 집단적 운명이 평사리에서 북간도 · 진주(晋州) · 서울 · 중국 대륙 등으로 광역 이동되며 조명되는 총괄적 소설이다.
작가가 떠올리려는 삶의 다면성(多面性)에는 양반과 상민의 관점이 교차하며 불교 · 동학(東學) · 무속(巫俗) · 유가(儒家) · 기독교적 세계 인식과 윤리 의식이 치밀하고도 뜨겁게 얽혀 있다.”는 평가각주2) , 그리고 “가족이라는 혈연 단위와 그 확대를 역사적인 시대의 교체와 맞물리도록 고안함으로써, 조선 말기 이후 한국 사회의 근대화라는 격변기를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창조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각주3) , 그리고 “서부 경남 방언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풍속을 탁월하게 재현한 점, 심리의 미묘한 곡절을 섬세하게 추적하는 비상한 능력에 힘입은 심오한 인간 통찰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 군더더기 없는 정갈하고 담백한 문체를 정립함으로써 부황한 수사와 말장난이 뒤범벅된 박래의 문체를 구축할 수 있는 전범을 마련하였다는 점” 등이 「토지」가 거둔 성과라는 평가각주4) 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84년의 『한국일보』 창간 30주년 기념 ‘한국 전후 문학 30년 최대 문제작’ 선정 행사에서 선우휘의 「불꽃」, 황석영의 『장길산』과 함께 『토지』가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이런 평가의 객관성이 입증되기도 한다.
1969년 『현대문학』에서 처음 시작한 「토지」의 연재는 여러 매체를 거치게 된다. 작가는 1972년 『문학사상』으로 자리를 옮겨 2부를 연재하고, 1978년 다시 『한국문학』과 『주부생활』에 3부를, 1981년 『마당』으로 옮겨 4부를 연재한다. 이어 1983년부터 『정경문화』(1987년 8월부터 제호가 『월간경향』으로 바뀐다.)에 『마당』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4부의 나머지를 연재하고, 1992년 9월부터는 『문화일보』에 5부를 연재한다.
「토지」는 연재 도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는데, 1973년 ‘삼성출판사’에서 처음 펴낸다. 이후 ‘지식산업사’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 ‘솔 출판사’에서 완간한다. 『토지』는 나라 안에서 얻은 성가에 힘입어 외국어로도 번역되어 나온다. 1983년 1부 8권이 안우식의 번역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뒤, 1994년 민희식과 앙드레 파브르의 공동 번역으로 프랑스 ‘벨퐁출판사’에서 불어판이 출간되고, 1995년 홍명희의 번역으로 영국 ‘키건폴출판사’에서 영어판이 출간된다. 또 몇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토지』는 오랫동안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다.
1990년 박경리는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기행문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나라』를 펴내고, 동아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인촌상’을 받는다. 1994년 집필을 시작한 지 26년 만에 마침내 『토지』가 완결되어 전 16권으로 솔 출판사에서 나오다. 박경리의 불행한 개인사는 『토지』라는 대작의 완성을 통해 비로소 보상을 받는다. 그는 「토지」의 완성에 즈음해 이화여대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원주 교정의 객원 교수로 임용된다. 1996년 3월 제6회 ‘호암 예술상’을 받은 작가는 이어 4월에는 칠레 정부가 수여하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는다. 한편 1997년 8월 15일에 기공식을 한 ‘토지문화관(土地文化館)’이 1999년에 완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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