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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선 방어작전(해군작전)
[요약형으로 간략하게 언급하려 함]
제 1 절 작전 개요
동해안을 공격한 적은 6월 25일 6시에 동해안 옥계, 임원, 삼척에 일부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후 한국해군 및 유엔해군의 해안봉쇄작저능로 해상에서 적의 위협을 차단할 수 있었고, 반면에 아군은 적의 후방을 해상으로부터 압박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해군과 유엔해군은 한반도 주변해안의 수로 특성에 따라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다수의 섬들이 산재하며 저수심이 많은 서해안에는 한국해군이, 그 외지역은 영국과 캐나다 해군이 배치되고, 수심이 깊고 대형함정이 접근하여 함포사격을 할 수 있는 동해안은 미군해군이 배치 되었다.
남.서해안에서는 기간중에 적병 약 200명, 선박 50여척을 격침하는 성과를 거두웠고, 동해안에서는 8인치 함포를 보유한 중순양함이 도착하여 강력한 봉쇄작전으로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는 적 병력, 철도, 차량 및 보급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이 통영을 점령하고 거제도로 침입하려는 긴박한 상황에서 한국전 최초로 통영 원문고개를 차단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실시전에 영흥도와 덕적도를 점령하여 전력적 거점을 사전 확보하였고, 부산지역 방호하기 위해서 유엔군의 4척의 항모가 배치되어 지상군 작전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하였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3사단의 해상철수를 지원하여 8월 17일 새벽 병력 5,800명, 민간인등 기타 1,200명을 안전하게 구룡포로 철수시켜다.
제 2 절 한국해군 작전
1. 서해안 작전
(가) 서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
안면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YMS 502정은 8월 3일 안면도항에서 군수품을 적재중인 적 기범선 7척을 침몰시키고 509정은 8월 6일 인천근해에서 적발동선 60톤급과 범선 5척을 격침시켰다.
또한 8월 7일에도 JMS 301, YMS 502.503정은 100톤급 ㅓㄱ발동선 1척과 적 화물선 2척, 범선 13척을 격침시켰다
PC 701함은 8월 10일 덕적도에 집결중인 적을 함포사격으로 70여 명을 사살하고 704함은 8월 11일 안마도에 상륙작전을로 적 11명을 사살하고 섬내부 치안을 확보하였다.
안면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JMS301정은 8월 12일 적 보급선단 4척을 치몰시키고 적 70명도 사살하엿다. PC702함은 군량미를 적재한 적선을 치물시키고 13일에는 PC 704함이 안마도에서 12명을 사살하였다.
(나) 덕적도. 영흥도 상륙작전
1) 덕적도 상륙작전('50. 8 . 18~ 8. 19)
덕적도 상륙작전('50.8.18-19)
국수봉 북리 적선 나포지점
313함
덕적도
적 수석
서포리 구포
적 적 진리 301함
307함 비조봉
513함 적 309함
702함 701함 704함 영국함 캐나다함
덕적도에는 의용군 약 100명과 유격대원 4~50명이 있었고 적 병력은 1개 소대 약 30명이 주두하고 있었다. 또한 좌익청년으로 조직된 자위대가 해상 감시소를 운용하고 인민위원회, 여성동맹, 치안대 등의 기관이 덕적도 적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상륙부대를 탑재한 JMS 301, 309정이 8월 18일 진리 전방을 목표로 전진하고 상륙을 지원하는 함정ㅇ들은 덕적도 남방 서포리 비조봉을 목표로 , 북쪽에서는 구포를 목표로 공격하고 캐나다와 영국 함정들이 아군을 지원사격하였다.
국수봉으로 도주한 적은 완강히 저항하다 발동선을 이용하여 복리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다 전원 일망타진되었다. 전과는 사살 26명, 포로 7명을 획득하였다.
8월 20일 이작도에서 활동중인 적을 발견하고 다시 상륙하여 적 24명의 인민의용군을 생포하고 산정에서 대항하는 적 70명을 사살하고 21일 이작도를 완전 점령한 후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넘겼다.
2) 영흥도 상륙작전('50. 8. 20~ 8. 21)
적
내리1구 적
영흥도 내리 3구 적
적
어성리 적
적은 정규병력 약 30명과 좌익계열 청년을 동원하여 주로 내리와 어성리 일대에 근거지를 삼고 있었다.
아군 함정의 지원하에 8월 20일 06시에 상륙부대는 내리지역 만으로 상륙하였다. 적이 내리 남방고지에서 저항하다 어성리와 내리 항만 입구에서 모두 격멸되었다. 사살 6명, 포로 33명, M1소총 19정 등이고 아군 피해는 전사 4명, 경상 7명이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의해 첩보활동을 위해 함명수 소령등 17명이 첩보대를 구성하고 KLO대장인 최규봉 대령 일행과 영흥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여기서 수집된 정보는 미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되었으며 극동군사령부로 부터 9월 15일 인천 팔미도에 등대를 밝히고 성조기를 게양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9월 14일, 첩보대가 철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 1개 대대가 기습해 왔다. 미군 첩보대는 영흥도를 탈출했고 한국 첩보대는 6명이 남아 영흥도 의용대원 30여 명이 적과 결전을 벌였고 일부인원은 탈출하고 일부인원은 전원 전사했다. 이들중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3등병조가 미군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 남해안 작전
(가) 남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
남해안에서는 8월 3일 진동, 통영, 삼천포의 봉쇄작전에 참가중인 JMS 307정, YMS 512정이 미 공군기의 오인 사격으로 경찰관 10명, 경찰관 가족 10명 사망 및 경찰 부상자가 20명이 되었다.
완도 근해를 초계중이던 YMS 503정이 8월 13일 적병을 탑재한 대형범선을 격침시키고 다음날 YMS 514정은 대형 발동선을 함포사격으로 격침시켯다. 그리고 8월 15일 YMS 503정이 해남도 남단에서 군수품을 적재한 적 소형선박 15척을 전부 침몰시켰다. YMS 503정은 8월 20일과 21일에도 30톤 내지 100톤에 이르는 적 발동선 3척중 1척은 나포하고 1척은 격침시키고 1척은 파손 시킨다.
YMS 512정은 8월 25일 진도 동방에서 100톤급 발동선과 70톤급 선박을 격침하고 탑승한 적 병력을 전멸시켰다.
가장 큰 성과는YMS 514정이 고흥반도 남방 해상에서 3차에 걸쳐 3척의 선박을 격침시키고 8척을 파손하였다. 그 후 며칠 동안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8월 31일 PC 702함이 진도근해에서 대형 발동선 2척을 격침시키고 수척에 손상을 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나) 진해 통제부방위대 작전
통제부 방위대는 김석범 대령의 지휘하에 선박 중대와 3개 대대로 편성하였으며 제1대대 제1중대가 원문고개에 대한 해병대의 상륙작전에 참가하고 8월 27일에 중대장이하 30명이 리도에 상륙하여 적 적 70명을 사살항였고, 28일에는 1개 소대와, 9월 2일에는 1개 중대와 교전하여 적 전부를 섬멸 시키거나 패주시켰다
제3대대 예하 창원파견대는 창원 북면 구룡산 부근에 잠입한 적 편의대 4명을 사살하였고 창원 이남에는 침투한 적 게릴라를 제2대대가 소탕하였다.
3. 해병대 작전
가. 통영상륙작전
아군은 8월 중순까지 진동리로부터 낙동강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고 북한은 이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는 고성 이남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01시에 야포 등 각종 중화기의 지원하에 350명이 통영에 침입하고 그 후속부대 300명도 도착하여 통영반도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8월 16일 새벽에 약 370명이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출하여 17시경 원문고개에 도착하여 100명의 아군 경찰과 해군파견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한산도로 철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16일 17시에 해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통영방면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는 적을 저지 섬멸하라는 명령이 김성은 해병 대령에게 하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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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적이 650여 명이 통영에 들어온 상태로 김성은 대령은 통영에 상륙하여 원문고개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여 통용부근에 있는 모든 함정을 지휘하여 통영을 공격토록 승인되었다.
김성은 부대는 아군이 통영항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기만하여 포격을 실시하며 해병대 주력을 견내량 수로 입구로 이동시켜 야음을 이용하여 상륙을 완료 하였다.
북한군은 아군이 통영정면으로 상륙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야간에 매일봉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남망산 및 해안선으로 이동시켰다.
통영 탈환 명령은 8월 18일 05시에 하달 되었다. 1개 중대는 원문고개에 진지를 구축하고 고성에서 남하는 적과 통영에서 탈출하는 적을 섬멸하게 된다.
※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원혼들의 메아리
적이 뒤늦게 병력을 매일봉(망일봉?)으로 진출시키려 했으나 아군이 먼저 진출하여 적은 대대장까지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원문고개의 제2중대는 고성방면으로부터 남하하는 적과 교전하며 우군 비행기까지 참여하여 적을 강타하여 통영상륙작전과 원문고개 방어전에서 아군은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그리고 많은 포와 화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웠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47명이었다.
통영상륙작전은 미군이나 한국육군 등 아무데도 배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으로 수행한 상륙작전이었다.
나. 원문고개 방어전
※ 망일봉 / 원문고개에 죽은자는 어디로?
고성쪽에서 적의 포탄이 8월 19일 15시경부터 3시간동안 580여 발이 작렬하였다. 이에 공군과 해군에서 적의 포진지를 향해 불을 뿜어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포사격이 중단되면서 1,000명의 적 병력이 제2중대와 제7중대 진지 정면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몇번의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결국 해병대가 승리하게 된다.
적은 62명의 시체를 남기고 북쪽 죽림리 방향으로 후퇴하고 국군은 적 중대장과 병사 3명을 포로로 잡았다
※ 적군끼리 싸우는 수월리 전쟁터
통영을 탈환한 다음에 이 지역의 청년방위대원 33명이 참석하기를 자원해 참가하게 되는데 청방대는 8월 27일 원문고개 서북쪽 수월리 일대 봉화봉과 매봉산 주변의 적을 격멸하는데 참가하였다.
또한 8월 30일 적이 원문고개 해병대를 공격하려고 제석봉과 죽림리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미군용기 6대가 대지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주었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통영 앞바다에 수장된 원혼들의 메아리
우린 통영지역 해병대 참전전우회 초청으로 통영을 찾았다. 국군의 최초 단독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전사를 통해 원문고개의 전투사실을 인지하고 통영에 도착해 해병 전우회 사무실을 찾았다.
멋진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총무분이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망일봉지역 뿐만 아니라 원문고개, 죽림리 제석봉,수월리 등을 다 찾아 다녔다.
점심시간대에 도착하여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우리를 보고 지역주민이 질문을 했다.
"바다에 죽은 사람도 찾는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해병 사무장이 말을 받았다.
"어떻게 이분들을 아시나요?"
"그럼요, TV에 나오는거 다 보았지요. 거 어디요 경북지방에서 많이 하고 저기 창녕에서도 발굴하던데요"
내가 나섰다.
"감사합니다. 우리들 활동을 지켜봐주셔서. 그런데 질문하신 사항을 답벼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바다에 숨진 분들이 군인인지 아니면 민간인지 아시는지요?"
"아 군인만 발굴하는가요?"
"네, 저희는 군인이나 경찰, 학도병등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한 분을 찾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아저씨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군인이나 경찰이 총을 쏴서 죽은 사람은 발굴합니까?"
"그것은 진실과 화해위원회(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를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옆에 있던 다른 분이 받아서 이야기를 했다
"저 분이 아버지와 형님이 사실 전쟁통에 경찰과 군인에게 잡혀서 여기 통영 앞바다에서 죽었어요. 이유없이 잡아서 가더니 밧줄로 연처럼 엮어서 트럭에 실려 여기로 와서 군인이 올라가 군화발로 몇사람을 차서 밀어내면 나머지는 줄줄이 딸려서 바다물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인, 참 억울하게 죽은 분들이 이 지역에 수없이 많아요"
"참 죄송합니다. 우리도 조사하러 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아마 그 당시에 무슨 보도연맹인지 부역자인지 그런 호칭이 붙어다녔던 것 같은데 우린 그런 것은 잘 모르고 일단 군인이 우선입니다."
해병 사무장이 나섰다.
"이 분들은 그게 아니니까 나중에 별도로 다시 알아 봅시다."
이 지역일대에서 조금만 뭐하면 잡아서 이곳 바다물 속에 밀어넣었다는 피눈물나는 이야기였다. 얼마가 죽었는지는 몰라도 족히 3~400은 된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는 프락치들이 날뛰어 지역 유력인사와 군인 경찰 가족들, 그리고 잘산다고 하는 사람들을 잡아어 인민재판이라며 홀딱 벗겨놓고 매질을 하고 돌로쳐서 죽이더니 바로 공산군이 나가더니 군인과 경찰이 들어와 동조자를 색출한다며 다짜고짜 잡아다 묶어서 바다물 속으로 밀어넣어 버렸다는 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 망일봉 / 원문고개에 죽은자는 어디로?
※별로 전투흔적이 없다
전사책에는 적의 규모가 연대급이고 해병대도 대대병력 이상이 참여한 전투며 비록 아군은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많이 사살됐다. 그런데 망일봉이나 원문고개에 올라서니 개인호가 그리 많이 있지가 않았다.
망일봉 밑의 밭주인이 밭을 갈고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더니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고 하며 적군인지 지역 빨갱이인지 본인 밭에 죽은 자가 3~4명이었다고 한다. 지금 밭이 그당시 그대로라고 했다. 그러면서 죽어있던 위치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원문고개 밑에는 해병대 수훈탑과 기념관이 잘 만들어져 있다. 고개는 바로 찰량이 넘는 정상이고 평지와 같다. 산에는 변산에 있는 호랑가시나무가 식목되어 있는데 큰 나무가 별로 없어서 탐사에도 무리가 없었다.
"거기서 별로 전투가 없었어요. 적들이 저기 채석봉주변에 있었지 여긴 별로인데" 지나가는 어느 아저씨가 말을 던진다.
우린 죽림리와 용호리에 들어가 탐문을 해보았다. 지역주민 이야기는 공산군이 왔다가 바로 나갔는데 아주 어린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몇일 있는데 배가 고프다고 집에 들어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밥을 주기도 했다한다.
우린 원문고개 일대와 채석봉 남쪽 하단부분을 바룰작전을 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다. 적군끼리 싸우는 수월리 전쟁터
전사에 수월리 봉화봉과 매봉산지역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국군이 승리를 거둔 곳이다. 원문고개 유해발굴을 현장 통제하면서 수월리, 오륜리를 드나들며 국군의 유해 혹은 북한군 유해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음성 동락리, 화령장 동관리, 안강 곤제봉(형제봉) 전투
도 그렇다, 죽은 자가 없다
통영지역 전사는 일방작으로 우리 해병대가 이긴 곳이다. 그런데 국군은 제외하더라도 북한군이 없다. 이런 곳은 충북 음성의 동락전투도 그렇다. 전사에는 북한군이 몇천명은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는데 실제는 별로 없다.
이런 원인을 찾으려 사실 나는 많은 노력을 해봤다. 화령장 동관리도 많이도 찾아가 봤다. 하지만 단 1구의 유해를 찾는데 그쳤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그렇다고 시신을 북으로 옮겨갔다는 증언도 별로 듣지 못했다. 지역에서 화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어디로 갔을까?
"북한군 여자들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빠지다(문경 마성 성주봉 밑)"
죽은자를 옮기는 현장을 본 곳은 문경 마성면의 장효각이 있는 모곡리에서 할머니로부터 들은 것이 처음이다. 북한군 여군들이 부상병과 죽은자들을 차로 옮기는 것을 직접 본 새댁이었다. 시집을 와서 배가 불렀으니 누구한테 피해를 안당하고 피난도 못하고 집에서 살았다. 성주산으로부터 능곡산-하내리로 북한군이 해질무렵이면 이동을 개시하고 여군들은 차를 타고 나타나 부상병은 어깨동무를 해서 데려가고 죽은 사람은 들것으로 나르는데 남자들 저리가라였다고 한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
"지역 주민들이 부역으로 모두 땅을 파고 묻었다(동관리, 음성 동락전투)"
두 지역은 거의 한달이상 발굴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나는 충북지역 증평에서 동원사단 포병연대장을 하면서 이 지역들은 흔한 말로 심심하면 달려가 지역주민의 제보를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논바닥에 죽어있는 적군(동관리)
동관리지역은 갈령에서 내려서면 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인이 지역유지다. 올랫동안 살아온 집인데 자주 들려 정보를 얻고자 했다. 가장 유익한 정보는 청계사로 오르는 송내지역과 점촌 달래 지역에서 가장 많이 북한군이 이안천에서 씻고 휴식을 취하다 아군의 기습사격으로 죽어갔고 주로 논바닥에 널려 있던 것을 일부는 북한군이 수습해 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걸 수복후에 지역주민들이 경찰 통제로 주변에 묻는데 가장 많이 묻힌 곳이 바로 청계사에 오르는 삼거리지역 길과 이안천 사이에 묻히고 논과 논사이 골에 밀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강이 범람하여 씻겨 내려가고 길이 확장되어 가면서 유실되고 논은 경지정리하며 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묻혔는지는 모르지만 이해는 쉽지않았다. 대부분 북한군은 수습해 갔는지 아니면 세월 속에 다 자연으로 돌아갔는지 지금도 의문점은 남아있다. 산악전투는 그래도 개인호에 남아 있는데 왜 저지대 전투에서 그것도 주로 기습작전으로 대승을 거뒀다는 곳일수록 그런건지... .
☞저 길을 내면서 엄청 나왔다는데 그걸 추적해서 찾아요?(동락리)
이곳은 '50. 7월 5일부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를 괴멸시켜 전장병 1계급 특진이 주어진 춘천에 이어 두번째로 국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다. 도한 이곳은 제1사단이 치른 무극리전투도 인근에 있다.
[오웅진 신부의 조언]
나는 이곳에서 포병연대장을 하며 생극-무극-감우재-음성, 생극-신니-음성, 충주에 이르는 접근로별 주요고지는 다 올라가 탐사를 해봤다. 그러다 어느날 오웅진 신부님을 만나 뵙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있음이 행복하다는 것을 배웠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행복이다"라는 글귀가 새긴 도자기도 받았다.
하지만 신부님이 나를 보자고 하신 것은 전사자 문제였다.
"저 지금 길을 만들고 있는데 거기 몇 백명이 묻혀있다는데 국군이다 적군이다를 떠나서 다 소중한 사람들이었으니 잘 발굴하여 처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생극에서 신니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3번도로와 평택-충주간 고속도로가 신니 북쪽으로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다. 하지만 전사에 그렇게 큰 대승을 거둔 곳인데 이곳 용산리부터 용원리, 모남리 , 감우재 어디고 죽은 자의 흔적이 별로였다. 나는 감우재 재 남서쪽 동음리와 용산리 등에서 겨우 2구의 유해를 찾았는데 진작 신부님이 말한 곳은 식별이 불가했다. 도로가 개설 또는 확장되면서 모두 유실되고 만 것인데 무려 몇 백명의 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을까!
공사를 담당한 건설업자를 만나고 당시의 포크레인 기사등을 만났지만 모른다는 일관된 답변만 들었다.
☞곤제봉에 전사한 국군은 어디에?(사실 다부동도 328고지 보다는 369고지일대에 더 전투흔적이 많았다)
곤제봉은 제17연대 등이 무려 15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벌인 곳이다. 곤제봉과 무릉산 등 이곳일대에서 '00년부터 70여구를 발굴했지만 가장 전투가 치열했다는 곤제봉은 유해 찾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북쪽에 있는 188고지나 마미산에서 30여구를 발굴했다. 도대체 그 당시에 수습을 잘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전투지역이 비록 인접이지만 전사기록에 차이가 있는 건지 의문을 갖게 한다.
지역주민의 일부가 말하길 문등병환자분들의 출입이 많았고 군과 경찰이 지역주민을 통제하여 일정한 장소에 거둬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그럼 당시에 자가봉송으로 유가족 품에 안긴 유해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전사자 유해의 진실?
모든 기록중에 일치되는 부분이 없는 것이 전사자 및 실종자 숫자다. 물론 전쟁 당시에 제대로 기록이 남아 있을리 없고 '51년 2월의 횡성지구에서의 대 참변이나 그해 5월의 현리지역에서의 대 참변을 당했던 우리 군대이기에 그 정황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99년부터 이 숫자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그 진실을 파헤치려 했지만 결국 이 순간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군이 보유한 병적기록과 전사망 기록인데 이마저도 제대로 관리나 보관 또는 기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믿을 수 있는 기록이나 숫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 당시에는 각 사단 별로 징집병을 받아들이거나 지역에서 강제 징용하여 군번을 부여하고 전쟁터에 보내졌기 때문에 그 것이 수작업으로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기까지는 불특성 전선상황에서 어려웠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참전자는 4개의 군번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제17연대에서 다시 수도사단, 다시 제3사단 등으로 옮기다보니 그렇고 일부는 전장을 벗어나 있다 당시 입대 또는 징집되는 경우가 많았음) 전역할 때가 되어서야 군번을 부여받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러면 월급등 보급품들은 어떻게 받았느냐의 질문에 월급이 나오는 것조차 모른다고 하시는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많았다.) 현역에서 학도병으로 다시 8240부대원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전투에 참여한 분들도 있다.
1996년도에 발행한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 의하면 국군은 전.사망이 137,899명, 실종이 19,392명이고 경찰은 전.사망이 3,131명, 실종이 7,084명이다. 청년단은 전.사망이 628명, 실종이 222명으로 되어있다.
전쟁 당시에 그나마 유해로 남아서 보관중이던 유해는 부산 금정사와 범어사에 안치중인 31,057위였다. 이 유해들은 정부가 새로운 중앙봉안소를 대구 달성공원에 있던 시립박물관을 개조해 휴전이후에 이곳으로 옮기고 '53.10. 16일에 육.해.공군 합동 위령제가 봉행 되었다. 정부차원의 위령제는'52. 4. 6일 범어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봉행 되었다.
'54. 3. 1일부터 지금의 현충원이 당시는 국군묘지로 공사를 개시해 '57년도에 완성되는데 유해는 '56. 4. 13일부터 대통령령으로 군인 및 군무원의 영현을 안장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6.25전쟁 당시 전사한 인원은 모두 160,000명에 이르고 현재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29,325위다. 그러면 대략 130,000여 위가 위패로 모셔져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범어사와 금정사에 안치중이던 31,057 위는 무슨 말이며, 더욱이 국군묘지를 완성하고선 각 지역에 병사구사령부(지금의 병무청 역활)에 보관중이던 14,992구의 영현이 봉송되어 온다. 그런데 그 유해중에 37%인 5,614구의 유해가 반한처리되었다. 이유는 국군묘지에 안장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육군 병참사 1집 238페이지)
이런 셈법에 의해서 현충원에 안장되어야할 유해는 대략 3,1057에 각 지역에서 올라온 14,992위 이중 5614위를 뺀 9,278위를 합하면 40,335위다. 여기에 실제 자가봉송된 유해중 유가족의 요청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를 고려한다면 훨씬 많아져야 하는데 지금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29,000위가 안장되어 있으니 나머지 분들은 모두 화장하여 무명용사로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차후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고려해야 하는데 사실 이분야는 어떻게 보면 전무다. 이유는 국군묘지가 완성되고 나서 자가봉송된 유해도 받아들였는데 제대로 홍보가 될 수 없는 그 당시 상황이었기에 현황집게는 불가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 탐문하면서 자가봉송되어 지역에 묻혀있는 사례를 종종 보았고 유가족의 요청으로 발굴하여 현충원으로 이장하는 것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결국은 찾지못한 유해의 숫자는 육군본부 부관감실에 보관중인 전사자 명부 또는 매화장 보고서에 표기된 것을 확인해야 자가봉송 여부를 알 수 있는 실정이다. 현재 미수집된 매화장 명부는 사실 90,00여명 것이 있으나 실제 확인 가능한 것은 6,057명 것 밖에는 안된다. 결국 전사망카드를 상세히 분석해 보아야 하는데 이걸 전산작업하면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였으나 한문에 대한 잘못된 읽기와 표기로 엄청난 오류가 발생되어 있다. 그래도 이렇게 작업하여 만들어낸 위패카드가 바로 134,000여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현재까지는 찾지 못한 유해의 공식적인 기록에 입각한 자료이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으로 실제 전사자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그 기록의 보고인 전사자 명부가 오류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정리하면 많은 유해가 사실 신원확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가운데 이미 안치되어 왔고 그 중에 8400여위는 결국 화장처리 되어 통합하여 대형 항아리에 합동으로 모셔져서 현충원 중앙탑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지역 병사구사령부로 반환된 유해의 처리결과는 확인이 제한된다.
※ 더 늦기전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파악하여 현충원으로 모셔야 한다.
전사자에 관련된 여러가지 증빙자료를 분석하여 본 결과 자가봉송은 대력 24,000위가 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중에 몇분이 다시 현충원으로 안장되었는지는 확인을 못해봤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모형제가 다 운명하고 사촌이상으로 촌수가 벌어지는 가운데 누가 제대로 관리를 안해(안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못한다는 표현이 맞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걸 알고 있는 뜻있는 지역 분들이 실태를 제보하여 우리가 발굴하여 (양평 조양리 1구 : 그 동생 분이 아주 못살아, 파주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왜 손대느냐고 하더니 현충원 납골당에 왓서 얼마나 오열하고... .) 모신 적도 있다.
※ " 너 죽을래 아니면 잘 모실래~!"
현재 사천 비행장 부근 사천역 뒤에 가면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도 50여 위의 유명 용사님이 모셔져 있다. 자가봉송 되어 온 것을 지역에서 일정장소를 택하여 모셔놓은 현충시설이다.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자가봉송된 유해를 동네에서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원인은 엉터리로 화장해서 해당 전사자가 아닌데도 그저 검게 변한 잿가루만 담아서 가져온다는 류머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받을 유가족이 없다거나 일부는 잘못 들고온 경우가 있다보니 동네에서 받질않고 몽둥이로 가져온 봉송병들을 내쫒았다. 이러면 그 봉송병들은 동네 입구 야산에 놓고 가버리게 되면서 그 숫자가 많아지게 되었단다.
그런데 휴전이 되면서 한 참전용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동구밖에 그런 것이 보여 화가 치밀었다.
"아니 이00들이 누구 덕에 먹고 살고 감투쓰고 있는데 용사님을 요따위로 대저반단 말야?"
바로 군청에 쫒아가서 군수의 책상을 군화발로 차서 무셔버리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만 해도 대검차고 심지어는 수류탄까지 가슴에 매달고 다니는 군인들이 꽤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상이군인들은 죽기살기로 지역사회에 반항아적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묘지를 쓸 수 있도록 군유지를 내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소"
이렇게 해서 사천역 바로 뒤에 접근성이 양호한 곳을 임시묘지로 정하여 주변에 있던 유해를 모두 한곳에 안장하게 된 것이 오늘날 사천시 현충시설이 된 것이다. 전국에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상당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수월리도 위의 의문점과 비슷한 곳이다.
"현역이 아닌 지역에서 강제 동원한 의용군들이 아닐지... ."
수월리와 오륜리 사이에 매봉산(309m), 봉화산(326m)이 횡으로 펼쳐진다. 수월리포구 밑에는 필도와 이끼섬이 있다. 이곳에서 왜 북한군이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시간을 소비했는지 사실 의아한 판단이 든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해상권 장악에 무척이나 조바심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에 고심한 것 같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원문고개와 제석봉에서 물러난 북한군은 바로 진주방향으로 물러나지않고 수월리에 들어가 산으로 올랐을까. 정규군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했을 것이다. 수월리는 더이상 바다가 아니면 탈출할 방법이 없다. 아마 고성방향에 미군이 진주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 상황이 전달되어 취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는 있다.
어쨌든 적은 산으로 올랐고 국군 해군과 해병은 몰아 붙여 소탕작전에 나가고 적은 괴멸이 된다. 그런데 동네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밤내 전투를 하는데 양 고지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사실 그때는 국군은 없었다. 그렇다면 적군끼리 총싸움을 한 것이다. 이 내용은 전사책에도 나와 있다.
"여기에도 적군도 없고 아군도 없었다"
그런데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 가보니 시신에 관련된 제보가 없다. 여기서는 북한군도 시신을 북으로 옮기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진데 어디에 있을까. 산은 많은 폭격으로 자연림은 없고 거의 잡목으로 채워져 있다. 불타버린 산, 그렇다면 시신도 모두 불에 타버리고 흔적조차 사라진 것일까. 정말 전투가 있었는지 아니면 공비토벌 작전이 소소하게 벌어졌는데 이게 전사에 크게 전공으로 올라섰는지 약간은 의아한 판단을 가지고 산양으로 갔다
라. 통영 봉평동의 11인 참전용사 묘지
산양을 가기 위해 다시 통영으로 들러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올라본다. 통영항에 준비된 배다. 이곳에서 충무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해저터널로 갔다. 그런데 터널 입구에 나이드신 분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넙죽 절하고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의외의 제보를 받았다. 봉평동에 전사자 묘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봉평동 동하무소에 가서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동사무소 직원을 대동하고 현장으로 갔다. 동사무소에서 걸어서 바로였다. 가서보니 야산 밑에 연립주택이 있고 가정집들이 있는데 바로 산언저리에 조그맣게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고 듣기로는 원래 3분인가 있었는데 어느날 이렇게 11분이 되어 지역 참전전우회에서 관리를 해 왔습니다."
"여기 모두 주소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유가족이 있습니까?"
"그렇게 봐야 하는데 근래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오시분 분이 처음에는 일곱가족이 참여하더니 올해는 4가족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럼 주소는 다 있습니까?"
"있긴 다 있는데 연락이 되는 집은 5~7가족이고 나머지 분들은 연락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후에 나는 팀원인 해병대 조성우원사(전역)와 7분의 가족으로부터 현충원에 이장하는 동의서를 받았는데 나머지 집안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기다리기로 하고 이장업무를 일시 중단했다. 지금은 어이 되었는지... ."
마. 미수동 4인의 유해는 누가 현충원에 옮길 것인가?
봉평동에 조사를 하는 동안에 지역주민 한분이 오셔셔 이 광경을 지켜보더니 미수동 미수아파트 뒤에도 4명의 무덤이 있다고 제보를 했다. 그래서 다시 그곳에 올랐다.
"현충원 묘비보다 잘 단장된 용사님의 묘지"
미수동사무소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고 그 옆의 고추밭을 경계로 올라서면 야산 중턱에 묘지가 있다. 봉분을 크게 만들고 묘비도 아주 크게 세워서 장군묘역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이름도 있고 계급도 있는데 여기에 묘지가 조성되고 관리되는지 주변에 알아보았다. 관리인은 최초부터 한사람이 주도해서 해 오고 있고 어쩌다 유족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묘지 괸리인을 아파트에서 찾아 뵙고 사연을 들었더니 그분도 잘은 모르고 본인이 군대갔다 오니 이곳에 조그맣게 되어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 중에 뜻이 맞는 사람 몇이서 부담하여 이렇게 조송하였고 유족은 4위중 다는 모르고 3명은 1년에 한번은 만나는데 근래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전형적인 자가 봉송 유해다"
봉평동도 그렇고 여기도 전형적인 자가봉송 유해다. 일부는 유가족이 직접 확인하여 받아서 일정한 곳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고 일부는 수령인이 불특정하여 마을 입구 어느 야산에 놓고 가버린 것을 뜻있는 분들이 수습하여 일정한 곳에 매장한 경우가 많았다. 김해 공원묘지의 71인의 무명용사 묘지도 그런 것이다.
나는어르신께 감사를 드리고 명함을 드렸다. 임의로 개장을 할 수 없기에 유족이 혹시 오시면 연락이 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아직 연락은 없다('18)
바. 산양 연화리의 찬바람(자가봉송 유해를 관리하지 않는 저능인 장애자 동생)
이곳 통영의 산양읍 지역은 동쪽보다 서쪽이 도로망이 좋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당시에 지역 프락치가 자생하였던 곳이란다. 사람이 많으니 자연스레 전쟁통에 군에 간 사람도 많고 혹은 여타의 방법으로 가지않은 사람도 많았다 한다.
산양읍에서 연하리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윗마을 쯤에 갔을 때에 개인택시 운전사가 우릴 보자고 한다. 점심 시간이 막 지나는 싯점인데 손짓으로 불러서 가보았더니 기막힌 이야기를 하신다.
"저기 앞에 집이 참전용사 집인데 동생 놈이 묘를 관리하지 않아 없어질 지경이요"
"묘지가 이곳에 있습니까?"
"우리 밭이 저긴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전쟁 때에 나무상자에 넣어서 보내온 것을 묻은 묘지가 있었요."
"그러니까 자가봉송된 유해를 이곳에 묻었는데 동생분이 전혀 손을 안대고 있으니 우리보고 현충원으로 옮겨달라는거지요?"
"그렇습니다. 저 동생이라는 놈이 성질이 고약해요. 저 부모님들도 화병으로 다 죽었어요"
부모님도 다 죽고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데 형이 전쟁 나가 죽어서 그 보상금으로 먹고 사는데 자기형 무덤을 방치해서 곧 없어질 상태라는 것이다. 우린 운전사분의 안내로 현장에 가보았다. 정말 흔적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얼른 봐서는 아무것도 안보이는 곳인데 여기에 전사자 화장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그저 맨땅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우린 동생분을 만나 보기로 하고 집에 찾아갔다.
"혹시 관리하기가 어려우시면 저희들이 현충원에 안장해 드릴까요?"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 사정에 달려들어. 열받으니까 빨리 꺼져!"
이미 우리는 운전사분으로부터 이분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기에 더이상 말하지않았다. 괜히 칼부림이라도 한다면 좋은 일 한다고 하다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알겠다고 인사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추운 겨울날, 분명 그 용사님은 벌거벗은 산길에 홀로 남겨지고 산새도 울지않을 것이다. 형님의 전사자 지원금으로 살고 있는 동생분의 쾌유를 빌 뿐이다. 그래야 정신이 정상이 되면 아마도 옮겨달라 청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 풍화리의 찬이슬(지역주민 간단회. '12)
이곳은 해저터널 입구에서 만난 어르신중에 한분이 필도와 이끼섬(태도)에 전쟁통에 죽은자가 많다는 제보에 따라 지역주민 간단회를 하러 찾아갔다.
중부 마을회관에 1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미 우리는 해경과 협조하여 섬을 탐사할 배도 마련되었다.
김관익(76) : 산양읍 터미널 앞 창고에서 보도연맹이 학살되었다.
필도에서는 어디에서 실고 오는지는 모르지만 바지선에 사람을 밧줄로 묶어서 이곳에 와서는 총으로 배언저리에 있는 사람을 쏴서 바다로 떨어지게 하면 나머지 인원들은 쪼로니 딸려서 바다속으로 들어가 죽어버렸다.
이들 중에 한두명이 동네 앞 바닷가에 떠내려와 건져서 묻어주었는데 그걸 발굴하여 그 유족을 찾아주면 좋겠다.
최현옥(67) : 태도는 우리 해란마을에서 관리하는데 전쟁 후에 땔감이 없어 태도에 배타고 들어가 나무를 해왔는데 유해를 목격하지 못했다. 한동안 벌거숭이 산이엇는데 원한다면 내가 안내해 주겠다.
서한포(77) : 태도에서 군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군청뒤에 산에서는 죽었다고 알고 있다.
최복근(77) : 태도에 군인들이 죽어서 매장되어 있다고 어른들께 들었다. 지형이 변함이 없어 있다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도근처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린 행양경찰의 순시선을 타고 이끼섬에 올랐다. 최현옥씨가 앞장서서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우린 약 2시간의 탐사를 진행했는데 특별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몇군데 특이하다 싶어서 탐지기를 가동해보았으나 비닐이 묻혀 있었다.
필도에도 가보았다. 이곳은 다 무인도다. 함께하고 있는 최현옥님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때는 누가 누구를 밀고하고 하룻밤 사이에 몇명이 빨갱이한테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턴가 아니면 낮에 들어오는 군경에게 붙들려 가서 병신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당시는 오히려 군에 가는 것이 목숨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 한다. 하지만 본인은 나이가 어려 남아 있었고 동네 형들이 대부분 군에 갔다고 한다.
자. 마도섬의 비밀
마도섬은 삼천포항 동쪽에 있는 섬이다. 우리는 통영지역 탐사 및 탐문을 하면서 이곳에 대한 것도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이유는 유해를 찾지 못한 숫자가 98위다. 위패카드에 명시된 지명의 숫자다.
해경과 협조하여 삼천포항에서 순시선을 타고 마도로 향했다. 바다물결을 가르는 쾌속정의 짜릿한 승선감을 느끼며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있다. 이유는 이 조그만 섬에 어떻게 98위나 되는 유해가 있다니 기대가 많았다. 섬지역에 이렇게 많은 숫자는 대단한 것이다. 더욱이 바다에 대한 재해권을 우리가 장악했는데 어떻게 이런 전투가 있을 수 있을까... .
바다를 가르는 도중에 처음으로 죽방모습도 보았다. 그많은 갈매기들이 둘러앉아 먹이를 쫒는 모습이 안쓰럽다. 드디어 마도에 도착하여 이장을 찾았다. 사전 연락이 되어 있어 마을 회관('12. 12.11)으로 가니 무려 18명의 마을분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사뭇 긴장된 모습으로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리고 제보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박용준(81) : 마도에는 군인들이 들어오지 안했다. 마을의 치안대끼리 다툼이 있었으나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잉라 죽이는 일은 없었다. 섬 남쪽에서 문어잡이를 하던 민간인 1명이 비행기 기총사격으로 죽었을 뿐이다.
이학진(72) : 마을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곤양 중항리 질매섬(일명 장도라 부른다고 함)에 보도연맹이 엄청 죽었다는 풍문은 들었음
이우섭(65) : 마도에 전사자가 있었다면 아마 삼천포에서 마도로 오는 도중에 늑도나 신도, 두옹도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성성만(75) : 나는 통영이 고향이라 해병대 원문고개 전투는 직접 목격했다. 당시에 체격이 커서 13살인가 하는데 해병대 아저씨들을 따라 다녔고 해병대 진지에서 기관총도 소았다. 탄피 모르고 밥을 날라 주었는데 전투는 지금 전적비 위쪽(재방산)에서 주로 했다. 해병대 중위가 전사했는데 바로 유해는 군인들이 운구해 갔다.
많은 동네분들이 이곳에는 전투도 없었고 죽은 사람은 기총소사에 문어잡다 1명만 죽었다는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나는 탐사에 나섰다. 마무리 위패카드가 오기가 많더라도 거짓은 아니고 뭔가 분명 있을거란 판단에서다. 바로 마을은 낮은 야산을 두고 남서로 동서로 갈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여기 빨갱이 놈이 있었고 경찰도 한동안 못왔어요."
야산에 올라가 보니 군데군데 파인 흔적이 분명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다. 통상 이런 섬마을엔 팽나무나 마을에 큰나무가 있는 법인데 큰나무도 없다. 모두 폭격으로 불에 타버린 것이다. 야산을 넘어 남서쪽으로 낼려서니 바닷가에 자연산 굴을 따고 있다. 할머니 두분과 아주머니 몇분이다. 다가서서 인사를 하고 몇 개를 얻어 먹어봤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더니 멸치를 잡아서 건조시키는 집이 나타났다. 마침 아저씨가 있어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동네에 실제 토백이는 본인이며 얼마전 돌아가신 본인 아버지가 6.25 당시에 직접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네, 군인이 많이 죽었습니까?"
"저놈들이 배에다 실고 들어와 저기 박도에 끌고 내려 산 꼭대기에서 미리 땅을 파놓고 밀어넣은 다음 총을 쏴 수십명이 죽었다고 아버지께서 말했어요"
"혹시 군인이나 경찰이 확실합니가?"
"그건 내가 지겁 목격을 한 것은 아니니 뭐라 확답은 못하는데 분명한 것은 지역 프락치들이 끌고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혹시 올라가 보신적은 없습니까?"
"언젠가 궁금해서 올라갔는데 호구덩이를 크게 판 흔적이 그대로 있는데 사람뼈는 보지못했어요. 묻혀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본인은 장남이라 할아버지가 배에 태워 바로 맞은편 각산산성으로 숨겨놓고 가끔 밥을 일정한 장소에 갖다놓으면 내려와 들고 가서 토굴같은 곳에 기거하며 살았단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순시선이 임무가 있기에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한다.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때는 함께 동행을 약속받고 떠나왔는데 결국은 내가 약속을 못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