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삼종지도 삼종지도, 백년해로 굳은 언약, 꽃반지로 맺어볼까나”
80년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꽃반지>의 주제곡 가운데 한 구절이다. 드라마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가사의 뜻도 모른 채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조선조 여성의 삶을 옥죄었던 굴레였음은 고전을 전공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성이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를 의미하는 삼종(三從)은 태어나 결혼하기까지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의례(儀禮)』 등 유교 경전에서 나온 이 말은 유교의 윤리 규범이 되어 여성의 삶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당위성을 마련해 주었다. 이와 더불어 “굶주려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다.”라는 송나라 유학자 정자(程子)의 말은 성리학의 여성관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성리학의 뿌리는 삼종지도와 정절의 굴레를 씌워 여성을 가혹한 삶으로 내몰았다.
조선조의 헌법인 『경국대전』에서는 개가한 여성의 자손은 벼슬아치 명단에 들지 못하도록 아예 법으로 규정했다. 재혼을 하면 ‘따라야 할 남편’을 배신한 것이 되어 그 아들과 자손은 문과는 물론 생원시와 진사시에도 응시하지 못했다.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데 어느 여성이 재혼을 꿈꾸겠는가? 국가는 정절을 지킨 여성에게는 각종 혜택과 포상을 내리고 정절을 잃은 여성에겐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한 집안에 열녀가 생기면 그 가문에는 정려문을 세워주고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아들과 손자에게도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나아가 조선의 통치 세력은 『삼강행실도』, 『내훈』 등의 여훈서(女訓書)를 민간에 보급하여 어린 시절부터 열녀의 덕목을 반복해서 익히도록 했다. 이제 정절의 윤리는 평민은 물론 천민 계층까지 퍼져서 남편이 죽으면 수절(守節)하거나 순절(殉節)하는 것이 아내의 당연한 도리가 되었다. 여성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닌 가족과 가문의 질서 속에서 존재성을 확인받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남자들이 많이 죽자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이 늘어났다. 이제 열녀로 인정받으려면 수절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남편을 따라 죽어야 정려문을 세워주기에 이르렀다. 한 마을에서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이 생기면, 마을의 선비들은 그녀를 기리는 「열녀전」을 지었다. 나라에서 국법으로 정절을 통제하고 마을에서 선비들이 권장하고 가정에서 여훈서를 통해 의식을 내면화시키니, 전국에서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들이 넘쳐났다.
연암과 다산은 열녀가 만연한 풍조에 이의를 제기한다. 연암은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편 따라 죽기를 빌며 물에 빠지고 불에 뛰어들고 독약을 마시고 목매달아 죽기를 천국 밟듯이 하니 열녀긴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이어 밤마다 엽전을 굴리면서 깊은 고독을 견뎌낸 한 과부의 사연을 들려준다.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고 말한 전통 성리학자들과 달리, 연암은 인간은 누구나 정욕을 갖고 있으며 과부 역시 한 인간으로서 정욕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연암은 수절한 과부의 사연을 통해 과부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들려주고, 죽지 않으면 열녀로 표창되지 못하는 가혹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어서 함양 사는 박씨의 순절 사건을 기록하며, 일반적인 열녀전과는 다른 시선을 보인다. 연암은 함양 박씨가 천국 밟듯이 기꺼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홀로 살아봤자 동정만 받거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신세가 되었을 터,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나아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한다. 연암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을 시종 연민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글은 자못 모호하고 소극적이다. 얼핏 열녀를 기리는 글로 읽히기도 한다. 또한 열녀를 부추기는 국가적 사회적 억압 기제는 도외시한 채 여성 개인의 한과 내면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다산은 「열부론(烈婦論)」에서 “아버지가 병들어 죽거나 임금이 죽었을 때 아들이나 신하가 따라 죽는다고 해서 효자나 충신이라고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왜 유독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가 따라 죽으면 열부라 하여 정표를 세워주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남편이 따라 죽었다고 따라 죽는 아내는 소견이 좁은 여자일 뿐 열부일 수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다산은 남편이 오래 살다 죽었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 것은 제 몸을 죽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제 몸을 죽이는 것은 천하의 가장 흉측한 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조선 후기엔 간통을 저지른 여성을 가족이나 친척이 죽이는 사건도 있었는데, 다산은 이를 반대하고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순절(殉節)을 권장하고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맹목적인 자살을 단호히 반대한 점은 진일보한 시선이라 하겠다.
하지만 다산 역시 여성들이 자살하는 현상에 대해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부녀자의 편협한 성품’ 때문이라 말한다. 여성이 편협한 성품을 지녔다는 인식은 당시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갖는 일반적 시선이다. 다산은 말하길, ‘아내라는 것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맛난 음식을 갖추어드리고 돌아가시면 제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아 길러 선조의 후사를 잇는 존재’라고 하여 아내를 부부 관계에서 바라보지 않고 가족과 가문의 층위에서 생각하고 있다.
연암과 다산의 관점은 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서 합리적 사고를 지닌 사대부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최대치의 인식으로 보인다. 둘의 여성관이 그 시대의 일반 남성들보다는 진일보한 생각을 보여주긴 했지만, 존재의 평등을 지향한 연암과 자주지권(自主之權)을 주장한 다산임을 생각하면 많이 아쉽다. 열녀를 조장하는 국가 시스템과 가부장제의 억압 기제를 꿰뚫지 못하고 둘 역시 가문과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서 여성을 인식하고 있다.
숱한 열녀 담론에 정작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는 없었다. 21세기 실학은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한계는 한계대로 인정하면서, 두 지성인이 지향한 존재의 평등과 자주지권의 의미를 새롭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박 수 밀(한양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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