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종교
1966년 퀘이커 연말모임 강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무렵부터 오늘까지 줄곧 나는「새 종교」라는 생각을 해 오는 사람입니다. 좀 더 적절한 말로 한다면 「새 말씀이 임하기를」기다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물론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또 변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은 부단히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변합니다. 자랍니다. 자라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진화(evolve)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혁명(revolve)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혁명의 원리가 곧 말씀이요, 그 말씀을 받아 인간 앞에 제시하는 것이 종교의 책임입니다.
말씀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처음부터 하나님과 같이 있는 말씀이요, 곧 하나님 자신이요, 그 말씀으로 세계가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 말씀은 믿는 것, 곧 깨달아지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물질 속에서 불변히 새롭는 말씀을 발견해서만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육이 된 말씀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곧 다시 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서만 역사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차례의 대전은 세계역사의 심판입니다. 그로 인하여 선고를 받은 것은 기성 모든 종교들입니다. 종교는 문명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몇 천 년의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날까지 피와 땀으로 이루어 놓은 지식 기술을 총동원하여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문명파괴와 인간의 대량학살을 심술껏 하는데 인간을 건져간다는 모든 종교들이 그것을 막기는 고사하고 정당화 시켜주고 축복해 주었으니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현대의 세계적 혼란은 종교들이 그 지도 능력을 잃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기성종교들이 이날까지 문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사회에 제정해 준 세 가지의 신성률이 있습니다. 1. 소유권의 신성. 2. 가정의 신성. 3. 국가의 신성입니다. 이것이 경제 도덕 정치의 기초를 이루어서 오늘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만일 없었다면 인류는 야만의 지경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 셋이 다 밑둥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도 그것이 걱정스러운 일인 줄은 알면서도 아무도 힘 있는 새로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들 그 자체가 부단히 새롭는 그 생명력을 잃고 스스로 만든 제도에 애착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그만 늙어버렸습니다. 내가 새 말씀을 기다리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제도화한 종교는 죽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때까지 문명을 유지 발전시키던 신성 불가범이라던 법칙이 왜 권위를 잃었나? 한마디로 세계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나가고 인간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자라서 옷이 그만 낡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벗어야 하게 됐습니다.
변한다 해서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자동적으로 완전에 이른다는 옅은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생각하는 인간을 선두로 하는 이 생명의 행렬에 있어서는 도덕이 아무래도 그 중축입니다. 자기반성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입니다. 가깝게 겉으로 보면 세상이 변하는 것은 대부분이 사람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의미적인 입장에서 보는 사람은 그 보다는 좀 더 깊게 그 잘못을 하게 되는 근본원인이 어디 있는 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한히 자라지는 절대적인 충동 아니고는 변천도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은 곧 잘의 반면(反面)입니다. 선의 삐뚤어진 것이 악입니다. 모든 죄의 뒤에는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세계적인 혼란 속에서 새 역사의 방향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간은 타락했다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하는 식의 보수적 정통신앙 가지고는 오늘의 역사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병이 들었지만 앓는 사이에도 자랐습니다. 자라려니 앓았습니다. 이젠 마음도 몸도 어린이가 아니고 성인의 단계에 들었습니다. 치료도 성인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이 대변동은 왜 왔습니까? 한마디로 과학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하게 됐고 과학하기 때문에 사회가 정적인데서 동적인 데로 올라갔습니다. 예나 이제나 죄를 짓는 인간인 데서는 다를 것이 없으나 정적인 옛날 사회에서는 이렇게 어지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문 잡지 영화 전신 전화로 사회가 아주 동적이 돼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영향력이 큽니다. 인간은 예와 같은 인간이 아니고 질적으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과학을 버리고 옛날의 단순 질박(質朴)에 돌아갈 수 있나? 천만에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이 변질된 삐뚤어졌으나 성인이 된 이 인간을 놓고 새 종교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인화되는 현대인의 특징을 들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자주하는 인격과 유기적으로 통일 되는 하나의 세계. 이것이 있기는 처음부터 내재했겠지만 과학에 의한 성장에 따라 두드러져 나온 성인인간의 성격입니다. 어떤 도덕가 종교가라도 이 두 점을 무시하고는 진단을 할 수도 투약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병을 없애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면 별 문제지만. 보수주의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새 종교가 어떤 것이겠는지 그것은 나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의 방향이 어떤 데 있을 것인가 그것을 부지런히 생각할 필요는 있습니다. 깨여 있어야 신랑을 맞지요. 그렇게 생각할 적어도 위에 말한 두 가지는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합니다. 보수적인 신앙은 툭하면 자주를 주장하는 나머지 통일을 무시하려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일을 강조하는 나머지 자유를 배격하려하나 요점은 어떻게 하면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 두 원리를 잘 조하하여 산 통일을 이루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현대의 고민은 여기 있습니다. 모순된 두 주장이 점점 더 강조 대립되고 있습니다. 오늘 같이 자유정신이 발달된 때는 없는데 사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또 되살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보다 높은 자리에서 그 둘을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믿음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새 말씀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 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내는 통합 따위가 아닙니다. 엄정한 의미에서 진리는 계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받는다는 것은 곧 자기부정입니다. 현재까지의 나를 완전히 부정함 없이 새 시대의 말씀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기부정은 인간은 완전 타락했다 하는 은총일변도 낡은 신학 같은 것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서 역사를 건지는 새 힘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믿음은 어린이의 하는 무조건 순종 모방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부정은 자기부정을 하는 그 자체 속에 자기 속에서 전체에 듣자는 뜻이 있습니다. 내가 전체는 아니지만 전체는 내 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새 말씀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볼 때 퀘이커는 스스로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를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깊은 속에 빛을 믿습니다. 아무 중간적인 지도자를 기다림 없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가려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체를 말씀의 내리는 곳으로 압니다. 그들은 또 자라나는 과학에 대해 넓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평화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계를 갈망합니다. 아무도 새싹이 어느 순간에 땅 껍질을 뚫고 올라올지는 예측 못합니다. 그러나 대체의 방향을 짐작하고 기다릴 필요는 있습니다. 찾는 자만이 만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으로서의 우리 처지를 생각해 봅시다. 동서 진영의 권력 싸움에 허리가 끊어진 이 한국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심판 날의 속죄양 아니겠습니까? 제단위의 이삭입니다. 새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게 짊어진 역사적 책임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적어도 우리게는 모든 기성종교가 다 소용이 없습니다. 6.25를 겪고 나서도 또 월남 전쟁을 위해 축복하는 그런 따위 기독교, 불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3천 년 전 히브리주의와 헬라주의의 맞당기고 싸우는 싸움에 어린 양 같은 예수의 허리가 끊어졌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에서 새로 역사를 부활시킬 새 말씀을 받은 것은 극히 적은 수의 믿는 사람뿐이었습니다. 믿기는 무엇을 믿었습니까?「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곧 하나가 전체 안에 있고 전체가 하나 안에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30억 미치는 인류 속에서 퀘이커는 한 줌밖에 아니 되는 수요, 그 세계의 퀘이커 중에서도 한국의 퀘이커는 이제 갓 나오는 한 두 오리의 새싹 같은 것이지만, 자유 통일의 두 노한 물결 같은 주장이 마주치는 사이에서 허리가 찢어진 이 20세기의 희생의 흘러나는 피를 바로 마시기만 한다면 거기서 인류를 또 한 번 건질 새 말씀을 받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퀘이커 연말 강연 1966년(친필원고)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