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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46
10월12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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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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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RE9H9xaR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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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자유로움은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종속됨을 통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특징적인 모습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세속적 권세나 명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헤로데나 로마 총독, 최고 의회, 대사제 등 지상 권세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셨으며, 할 말 안 할 말 다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야심이나 권력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한 줄기 바람 같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그토록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헌신짝처럼 차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들었던 고향 나자렛을 포함해서, 즐겨찾으셨던 제2의 고향 카파르나움이라 할지라도, 결코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지체없이 떠나고 또 떠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율법으로부터, 제사 규정으로부터,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정결례로부터, 성전으로부터, 재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우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어제와 결별하고,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또 다른 여행길을 재촉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좀 더 머물러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 앞에 예수님께서는 얄짤 없으셨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또 다른 고을로 떠나가셨습니다.
그 모든 예수님의 자유로움의 원천이자 배경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아버지께 매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 내 의지, 내 계획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의중에 순명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당신 삶속에서 실천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세속의 권력이 들이대는 협박이나 강요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갖은 유혹과 달콤함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자유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종속됨을 통해 참 자유를 얻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음으로 인한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100퍼센트 종속됨으로 인한 자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기를 갈구합니다. 동료 인간 존재로부터의 자유, 관계로부터의 자유,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죄나 유혹으로부터의 자유, 재산이나 명예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더 얽매이고, 더 짓눌리고, 더 종속되어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티아서 5장 1절)
오늘 우리를 억압하는 것을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자유로움의 모델로서, 오늘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은총 안에 좀 더 자유로운 오늘 하루를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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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나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Cb_OQlKf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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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그 멀리서 솔로몬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표징이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울 마음이 없어서 안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설사 표징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고 난 뒤에 니네베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요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니네베 사람들이 다 회개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는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지혜로우시고 요나보다 크십니다. 솔로몬은 하느님 지혜를 발산하는 사람이었고 요나는 그 표징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진리를, 요나는 은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그 은총과 진리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만약 하늘로부터 태어났다면 표징이 없어도 믿고 변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은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을 창조하였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완전한 표징은 없습니다.
어떤 대학 교수의 ‘나는 꼴찌였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 머리도 그리 좋지 않은 나를 대구로 유학 보냈다. 나는 대구중학교에 다녔고, 석차는 68/68 등, 꼴찌였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대도시 중학교로 유학을 보냈는데, 꼴찌라니. 가난한 소작농이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오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찬석이는 공부를 잘했더냐?”라고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봐.” 마을 사람들은 “자식 하나는 잘 두었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하면서 부러워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였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께서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 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아버지께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려 했다. “아버지,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사실은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식이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하신 부모님 마음을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교수의 글’이라고 합니다.
한 나라가 망하려면 어떠한 믿음이 사라질 때일까요? 바로 ‘자녀를 낳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믿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하고 인류가 멸종합니다. 이런 믿음이 사라진 나라로부터 자연 파괴가 더 심각하게 일어납니다. 동물들은 이 본성을 절대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적이 없는 이상 동물들은 영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믿음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사람은 세속-육신-마귀가 더 행복이라 믿습니다. 이들은 자녀를 낳는 게 왜 행복이냐고 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새로 태어남의 행복은 자녀를 낳을 때 완성됩니다. 박찬석 총장 아버지의 행복은 자신이 믿어주면 자기 아들이 훌륭하게 될 것을 믿고 가장 소중한 돼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돼지를 잡는 것이 참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음을 나중에야 확인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했을 때 행복한 모습이 바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던 요나의 표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키려 십자가의 피 흘림을 당하셨어도 부활하여 기쁨을 누리시는 바로 그것이 표징입니다. 이 표징을 두고 계속 표징을 운운하는 것은 그런 행복을 따를 마음이 없다는 것만을 증명해 줍니다. 제가 사제가 된 기쁨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징은 사제로서 또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기 위해 피 흘림으로써 얻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고 표징을 요구한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자녀를 낳는 행복,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나의 표징입니다. 이 요나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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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29-32 :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서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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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니네베는 북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입니다. 요나는 원수를 위하여 예언하고 싶지 않아서 타르시스를 향하여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태풍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요나는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하여 니네베로 갑니다.
본디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도시인데 요나는 하룻길을 걸은 다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의 외침만으로도 니네베 사람들 전부가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따로 없이 임금마저 단식하였습니다.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자루옷을 입혔고 단식하게 하였으니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다 회개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표징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싫어 니네베로 가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시려고 몸소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내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셨기에 사흘 동안 저승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네베에 심판 선포를 할 때 그는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 가시며 예언자직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성의 없는 표징에도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지만, 요나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신 분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좀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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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나의 표징>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요한 3,17)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심판 예고 말씀’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호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라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심판 예언’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와 그 회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잘 나타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멸망한다.”였을 것입니다. (무조건 멸망한다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예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예언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그 예언을 듣고서 단식하고 회개한 것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어떻든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했고, 심판과 멸망을 피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요나 4,1) 하느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은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들은 죄가 없고, 또 짐승들도 죄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짐승들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판과 멸망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것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모습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또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그 용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용서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랑과 용서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여기서 ‘이 세대’는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에 빠져서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고 구조대원이 손을 내밀 때,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구조대원이 내민 손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고, 구조대원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면? 믿으면 사는 것이고, 안 믿으면 죽는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좁은 뜻으로는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서 나온 일을 가리킵니다.(요나 2,1)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예언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즉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회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면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 ‘표징’이라는 말은,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 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증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루카 10,21)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시비를 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고 ‘어리석음’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죄’일 뿐입니다. ‘철부지들’ 같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믿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지혜’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영화를 보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1열왕 10,1-9)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솔로몬의 지혜는 하찮은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에 비하면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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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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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al Dilemma'를 보았습니다.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에서 일하던 전직 고위 간부들이 쇼셜 미디어(SNS)의 위험성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물은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물은 도구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잘 사용하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환경을 보존하는 교통수단이 됩니다. 자전거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습니다. SNS는 잘 사용하면 정보를 얻는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고, 금용거래를 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자전거와 SNS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전거는 나의 정보를 수집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는 나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SNS는 끊임없이 나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신호를 보내서 SNS를 보게 만듭니다. SNS의 뒤에는 거대한 자본이 있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보와 나의 관심은 광고주에게는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전직 간부들은 SNS의 위험성을 4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분극화입니다. 다양한 의견이 공유되지 않고 자신만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에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나의 정보를 알고 있는 SNS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SNS 속으로 들어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극단화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약탈과 방화는 물론 살인까지도 일어납니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모임 집회가 약탈과 방화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정부의 정책을 규탄하는 집회가 방역을 방해하고 전염병이 퍼지도록 방치하기도 합니다.
셋째는 가짜뉴스입니다. SNS를 통해서 가짜뉴스는 일반뉴스보다 여섯 배 빨리 전파된다고 합니다. SNS는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는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가짜뉴스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합니다. 넷째는 중독성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SNS를 체험한 세대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SNS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가상의 세계에 머물도록 합니다. 거기에는 가치, 질서, 윤리, 진실,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SNS에 빠져있는 세대의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전직간부들은 SNS의 위험성을 증언하면서 자녀들이 SNS에 중독되지 않도록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잠자리에는 SNS를 가져가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SNS를 사용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한다고 합니다. 주체적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본인의 관심분야를 스스로 찾으라고 한다고 합니다. 가상의 세계에 머물기 보다는 책을 읽고, 토론하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라고 한다고 합니다.
SNS가 내 삶의 독이 되지 않도록 분별하고 식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SNS를 통해서 거대한 이익을 챙긴 기업은 SNS를 통해서 생긴 갈등과 분쟁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얻는 만큼 세금을 내야한다고 합니다. SNS를 통해서 분노가 커졌다면, SNS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면, 가족과 있는 시간에도 SNS를 더 가까이 한다면 SNS가 나의 삶에도 ‘독’이 되고 있음을 알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하는 표징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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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選民思想’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였고,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다른 민족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민족우월주의를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도 타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교도라는 이름으로 배척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서 사람의 인격을 차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Veritas liberbit vos!)’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고, 이제 우리는 신분과 계급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세계 인권선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인간은 성별, 피부, 민족, 재능, 능력’에 따라서 차별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 질병, 굶주림은 사람들의 인격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세상에 살고 있고, 재물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은 전쟁과 폭력을 가져오고 있으며, 수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Veritas liberbit vos!)’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방전된 핸드폰은 충전을 해 주어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연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연을 날리는 사람과 연줄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주는 것, 우리를 영적으로 충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나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회개’입니다.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3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생각을 바꾼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얼굴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 원망과 불평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영혼의 암세포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세포는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은 우리의 마음에 암세포처럼 자라납니다. 그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반대로 원망을 하면 원망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회개한 사람은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으면 그것이 마음에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주님께 봉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주님께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가 환난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시련 중에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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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바로 당신>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당신>
당신이 누구신지
선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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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2)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살기 위해 도망쳤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주님 말씀의 선포를 거부했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9-10)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요나는 두려움 없이 외쳤습니다. 니네베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로부터 구원이 오니까요. 쾌락과 탐욕에 제 몸 던지고 우상 숭배를 탐닉하던 니네베 사람들은 준엄함 심판을 선포한 요나를 죽이는 대신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힘껏 부르짖었습니다.(요나 3,6-7 참조)
예수님께서 분열, 불평등, 억압, 배척, 탐욕에 물든 악한 세대에게 회개하라 외치셨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악한 세대가 살길이니까요. 비록 이 외침이 당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광기어린 음모를 자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외치고 외치고 외치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참회의 피눈물 흘리며 가슴을 찢지 않고 자신들을 살리려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모질게 때리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죽였습니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의 자리에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저를 놓아봅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감히 주제넘게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제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스스로 들어봅니다.
큰 물고기의 밥이 되기 전제 살길 찾아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던 요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움 없이 외침으로써 니네베 사람을 살린 회개한 요나를 닮은 제2의 요나 예언자가 되어야 하는데,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온갖 질시와 비난 속에서 십자가 수난 여정을 당당히 걸어가신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때때로 약하고 비겁하며 아직은 때때로 두렵고 흔들립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시작해야죠. 오늘 제게 들려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네가 나의 참 사제가 되고자 하느냐?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라. 내 십자가의 표징을 뼛속 깊이 간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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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란 무엇일까요? 악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의 선포일까요? 아니면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비와 사랑의 부르심일까요? 그것은 요나의 모습 속에 잠시 들어가 보면 압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평하신 하느님답지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주님의 명을 거스르고 도망치지만, 풍랑을 만나고, 바다 속에 던져져서 고래 배 속에 사흘간 잠들어 있다가 결국 주님의 뜻대로 니네베로 보내집니다.
요나 안에 내가 있습니다. 내 판단과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당함과 그분의 자비가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여전히 잘살고,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무시당하는 불공평한 세상을 그냥 놓아두시는 하느님이 못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자란 나를 통해서도 당신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하고, 내 욕심대로 살아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곧바로 벌하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불편한 윤리 규범이나 신자로서의 의무들이 못마땅할 때에는,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성당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속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우리의 아집을 곧바로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려는 것이었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도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한없이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넓은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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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청하지 말고 배웁시다.>
며칠 전 오랜 후배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하는 사업이 조금 어렵다는 이야기와 함께, 남편이 며칠 전까지 54일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은‘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하느님은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으니, 하느님이 정말 계시냐?’고 하더랍니다. 전 세계 곳곳의 성모님의 발현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기적, 표징을 일으킨 예수님을 보면 그 모든 기적은 다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난처한 입장이 된 혼인 잔치 주인을 위해서, 배고파하는 군중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 불쌍한 처지의 환자를 위해서,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음도 당신이 아닌 다른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고, 부활 역시도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악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찾으러 왔던 여왕처럼 그분의 모습을 배우려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분에게 청하지 말고 그분에게서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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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국제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3층 난간 안쪽에는 시커먼 연기와 새빨간 불꽃이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창가에는 3살, 10살 먹은 아이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의 크기는 점점 커져 오고, 구조대는 오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있었던 창가 아래에 있던 주민들이 아이들을 향해 “뛰어내려!”를 외치고 있습니다. 뛰어내리면 아래에서 받아주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잠시 뒤에 아이들은 뛰어내렸고, 주민들은 아이를 안전하게 받아서 구조했습니다. 이때 아이를 받아낸 주민 두 명이 팔이 골절되었습니다. 아무리 아이라 해도 3층이면 12m 높이니까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몸이 다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를 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아이들이 뛰어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받아준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뛰어내렸던 이유는 밑에서 받아주겠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민들도 그 믿음에 응답했습니다. 손목 골절이 되더라도 아이를 구했던 것이지요.
사람도 이러한데 하느님은 어떠실까요? 우리의 믿음에 무조건 커다란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위협에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주님께 뛰어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표징을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으신 기적 역시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드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그런 신비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또 다른 표징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향해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라는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절대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주님의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만 잘 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나만을 위한 주님을 요구한다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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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서 시작하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 나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재미를 느끼고 즐거워야 실력도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타가 그랬고, 더 어렸을 때 배웠던 탁구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독서 능력도 학창 시절 때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깨달은 성인이 되어서였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런 기쁨이 아닐까요? 기쁨을 통해 내 안의 성취는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개인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기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의무요, 강요가 아닌 기쁨의 길임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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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중심의 삶>
-말씀, 회개, 자유-
바로 지난 토요일 복음 ‘참행복’ 주제에 이어 오늘은 복음은 ‘요나의 표징’이 주제입니다. 참행복, 참사람의 길은 말씀과의 일치에 있음을 강조한 지난 번 강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군중이 모여들자 이와는 대조적으로 충격적 말씀을 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세대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다른 표징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표징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요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모든 이에게 표징중의 표징인 당신께 집중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늘 함께 계신 그리스도야 말로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징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해 표징을 요구하는 눈먼 세대, 악한 세대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더 이상 표징들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회개의 표징,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에 마음의 불안이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의 동인動因이 되는 말씀공부가 우리의 본질적 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했습니다. 말씀을 통한 회개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일치입니다. 정말 말씀 공부에 전념하는 이들, 즉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절대 표징을 찾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을 통한 회개를 통해 구원의 표징이자 회개의 표징인 주님과의 일치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말씀 공부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의 고질병 같은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 그리스도와 일치의 삶을 통해 참으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더 이상 표징도, 기적도 찾지 않을 것이며 세상 우상들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말씀과 회개를 통해 굳건해 지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요 이의 열매가 자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자모이신 교회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교회의 자녀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셨으니 절대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말고 자유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참 구원의 표징이요 우리의 모두입니다. 말씀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에 이어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당신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참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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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세대입니다. 악한세대는 자신이 회개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심지어 예수님이 회개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럼에도 이 악한세대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성령께, 돌같이 딱딱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주기를 청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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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과 믿음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당신 주위로 몰려드는 군중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탄하십니다. 군중의 마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보다 저급한 호기심과 탐욕스런 기회주의를 읽으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약속의 성취이고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백성들은 그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걸었던 인물들이 반짝 하고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무수히 경험해 왔을 겁니다. 이제는 쉽사리 믿기도 어렵거니와 섣불리 믿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더 살펴보고 더 시험해 보아야 최소한 본전이라도 건질 터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보다 검증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니네베 사람들은 먼 이국에서 온 떠돌이 예언자의 외침을 듣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있음에도 유다의 예언자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가 자기들에게 오기 전에 있었던 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도망가다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에게 삼켜지고, 그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뒤 멀쩡하게 살아서 육지로 나온 신기한 사연을 그들이 먼저 알아서 그를 믿었던 걸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는 니네베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주력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언짢게 여길 만큼 그들에게 애정이 없었으니 자기 이야기를 해가면서 그들을 설득할 이유가 없었을 것 같네요.(요나 4,1-3 참조) 그러니 니네베인들이 접한 것은 오로지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멸망의 예언뿐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를 표징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민족의 신도 아니면서 자기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방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표징으로 말입니다. 요나는 민족의 적에게까지도 무한히 자비하신 사랑의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요나의 파견을 통해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을 관할하는 지방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심이 드러납니다. 온 세상 모든 만물, 모든 존재는 야훼 하느님의 귀한 소유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도 이처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표징입니다. 군중은 자기들을 믿게 만들어 보라며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지만, 이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이고 신비이며 표징입니다.
이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믿기 위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데이터는 앎을 위한 것이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믿을 이라면 기적 없이도 믿습니다. 믿음은 선택이고 결단이며 자신을 내던지는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약의 백성인 유다인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백성인 교회를 아브라함의 두 부인, 하가르와 사라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31)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성령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의 문자에 달려 있지 않고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움을 인정받고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고 허락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사랑하고 헌신합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육의 허영이나 욕정, 탐욕을 만족시키는데 쓰지 않고,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데 쏟아붓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자유로운 이는 그렇습니다.
가장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비참한 죄인으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으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당신 사랑을 보여 주셨지요. 그러니 이를 믿는 우리에게는 다른 표징이 필요없습니다. 사랑의 완결판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삶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도무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지금 내 모습이 나에 대한 주님의 최선인지 회의가 들 때, 한 번 더 용기를 짜내어 주님께 믿음을 고백합시다. 내 앞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생생한 증거임을 믿읍시다.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은 믿음과 동행하는 길이고, 또 그 결승점이니,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세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화답송)께 의지해, 힘껏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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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나이 들어도 배우며 익히며 살아야 하는데, 사람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한계는 : 악습입니다. 악습이란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몸과 마음에 밴 잘못된 습관을 말합니다. 그렇게 익숙해진 것은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처럼,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진 않게 됩니다.
두 번째 한계는 : 고집입니다. 고집이란 세상 사물을 여유 있게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만을 보게 합니다. 고집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더 문제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외엔 잘 새겨듣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신념이라고 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붙이고, 심지어 하느님 운운하며 과대표현까지 합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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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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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앞 장면에서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 되었듯이,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공생활을 알리는 첫 발설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입니다. 또한,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곧 요나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기적을 찾기보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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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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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회개의 표징(기적)!>
루카복음 11장 16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메시아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 성령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표징(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회개하는 이들의 과거를 결코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하기를, 오늘 우리 안에서 회개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짓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이 죄책감이 지금 나의 자유와 해방과 나의 평화와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몸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의 표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회개의 기적이 오늘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내 안에서 시작된 회개의 기적이 널리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 그 멋진 기적을 만들어 내는 '첫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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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zP7XztrhE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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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생명에
감사하는
가을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보다 더 큰
표징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앞설 순 없다.
예수님께선
친히 회개의
모든 것이
되신다.
진실한 회개가
복음의
참기쁨이다.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끝내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이를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인 변화로
이끄신다.
사람은 표징을
요구하고
주님은 참된
회개를
바라신다.
회개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회개와 표징을
이어주시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이
회개이다.
우리의 일상을
되살아나게 하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참된 감사와
참된 회개로
우리의 일상을
곱게 물들이신다.
회개는
일상의
기쁜 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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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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