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의 詩의 발견] 쌀 한 톨을 그리다/신달자
시인·前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교수 김성춘 gyeong7900@daum.net 수정 2023.05.09 19:00
쌀 한 톨을 그리기로 했다
밥이 아니라 마음을 먹고 그리기 시작했다
쌀은 마음의 주인
쌀 한 톨을 그리는데
쌀이 안 되고 터널이 되고 기차가 되고 먹구름이 되고
쌀 한 톨을 그리다가
쌀이 가마니가 되고 푸대가 되고 되가 되고 한주먹이
되고
몇 개의 종이가 찢어지고 늑대가 울고 몇 개의 밤이 뭉친
어둠이 지나기고
쌀 한 톨이 보이네
쌀 한 톨 안에 우주가 보이고
내가 자란 땅이 보이고
내가 밟아 자란 흙이 꽃이 피어나는 잎들도 보이네
시든 잎 다 떨어지고 새잎이 돋아나네
들판에 허리 구부린 자연의 주인이 한 톨에 목숨이 열
리고 닫히는
희열이 보이네 노동이 만들어 가는 생명 줄
인간의 무궁무진이 보이네
와와 이 우주 안에 사람의 목구멍이 보이네 생명의 길
이 보이네
무더기가 아니라 한 알의 존중이 보이네
아름다워라 천근의 쇠뭉치보다 무거운 한 톨의 생명이
보이네
쌀 한 톨을 그렸는데 역사의 증언이 보이네
생명력이 퍼덕거리네
-신달자,'쌀 한 톨을 그리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면, 김용택 시인이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사과
한 알을 보여주며 재밌는 시 창작 강의를 한다.
김용택 시인은 사과에 대한 시를 쓸랴면 눈 앞에 보이는 붉은빛의 사과 한 알, 그 사과의 형상만을 노래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사과 한 알이 내 앞에 올 때 까지의 그 수많은 시간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의 과정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길까지도, 땀방울까지도 느끼면서, 입체적으로 한 알의 사과를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한 알의 사과를 제대로 본 것이라고 말한다.
신달자 시인의 '쌀 한 톨을 그리다'에서도 우리는 '조그만 쌀 한 톨' 속에서 퍼득거리는 생명을, 쌀
한 톨에서 내가 자란 땅의 흙냄새와 역사의 증언까지 느낀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광활한 우주적 감각을 만난다.
조그만 쌀 한 톨! 그 쌀 한 톨 속에 캄캄한 터널과 기차와 먹구름들이 살고,
쌀 한 톨 속에, 종이가 찢어지고, 늑대가 울고, 몇 개의 어두운 밤이 있고, 들판에서 허리 구부린 농부
들을 본다. 그리고 쌀 한 톨 속에 아, 쌀 한 톨 속에, 소중한 노동이 만드는 거룩한 생명과, 인간들의
무궁무진한 슬픈 오늘의 삶까지 깊히 들여다본다. 놀라운 시인의 마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