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1 천안ubf 메시지
누가복음 8장 9부 강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8장 49-누가복음 8장 56
요절 누가복음 8장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누가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두 사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죽은 청년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으로 살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죽은 청년을 청년답게 살게 하십니다. 노인도, 어린이도 청년답게 살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은 야이로의 믿음을 받으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딸을 살린 야이로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울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사탄이 일합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 안에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사탄이 물러가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우리도 살고, 죽어 있는 우리의 가족친지 그리고 주위 형제자매를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불신의 말이 예수님을 괴롭힙니다.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야이로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을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 그녀의 간증까지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가는데 지체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늦어지자 조바심으로 손에 땀이 났을 것입니다. 딸이 점점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빨리 달려가셔서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괴롭게 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야이로는 다리에 힘이 풀렸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야이로를 위하고, 예수님을 위한다고 예수님을 집에까지 모시고 가서 예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그 말이 사실은 예수님을 더 괴롭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죽은 청년도 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야이로의 딸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나 죽은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도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이런 말이 예수님을 괴롭히지 않고 기쁘시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불신의 말은 예수님을 괴롭게 합니다. 절망을 심고 두려움을 심는 말은 예수님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평안을 주고, 소망을 주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하라면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하라고 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긍정적인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에꾸눈이 있었습니다. 화가들을 불러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한 화가가 사실적으로 에꾸눈을 그렸습니다. 임금은 초상화를 보고 불쾌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화가가 두 눈 다 성한 눈으로 그렸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거짓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화가가 눈이 있는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제서야 기뻐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있는 쪽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2)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야이로는 불신의 말을 들었을 때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임하였습니다. 이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야이로에게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말을 통해서 두려움을 심습니다. 사탄은 부정적인 현실을 통하여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하여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현실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미래를 망하게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두려움을 심습니다. 욥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고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 취업에 대한 두려움, 자녀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탄은 이런 두려움을 심어서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두려움이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공황장애가 됩니다. 공황장애가 걸리면 활동하는데 자유가 없습니다. 보도를 걷는데 빌딩이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런 두려움을 빨리 극복해야합니다.
둘째,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도 사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습니다. 죽을 때 두려워하면서 죽으면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계시록에는 두려워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한다고 나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모습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더 잘 되려고 잠자는데 왜 두려워합니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죽을 때 잠자듯이 평안히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심는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탄은 죽음을 통하여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육신만 죽이지 영을 죽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더 좋은 곳에, 더 좋은 몸으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것입니다.
제가 엘까미노 ubf의 잔백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 좋은 예이고 지금도 생각하면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두려워할 때 사탄은 항상 잠을 못자도록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천국가서 더 좋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는 믿음으로 담대하였을 때 사탄은 꼼짝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엘까미노 생명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관악7부의 이모세 목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어려서부터 꿈에 뱀으로 와서 두렵게 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예수님을 믿고 사탄을 대적하자 뱀은 물러가고 평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사탄과 싸워서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기도합니다.
(3) 울지 말라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함께 아이의 방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현장에 믿음 있는 사람만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방에 들어가자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위해서 울며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자는데 우는 사람이 없겠죠? 우는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분명히 죽었는데 잔다고 하시니 예수님이 현실파악을 못했다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스데판이 죽었을 때도 잔다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잠을 푹 자고 깨면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몸으로 우리가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는 말은 사람이 죽었을 때 아주 울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심하게 울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성도들도 울었습니다. 저도 형이 돌아가셨을 때 울었습니다. 죽음이 비록 잠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이별이니까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심하게 울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잠자는 것이니 우리는 며칠 슬퍼하고 오히려 기쁨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초상집에 가면 마치 잔칫집 같은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너무 깊은 슬픔에 오랫동안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슬퍼하면 사탄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우울증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친근하게 느껴서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 우울증 환장의 말을 들어보면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면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이 포근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제가 아는 두 분에게서 두 명의 젊은 사람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슬픔도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슬픔을 이기고 항상 기뻐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슬퍼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명령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슬픔을 이기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기쁨을 충만히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4) 아이야 일어나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먹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밥맛이 없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밥을 맛있게 먹는 것도 큰 복입니다.
예수님이 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까요? 죽은 아이는 누구나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였을까요? 어떤 분은 이 말씀에 기초하여 죽은 아이를 데리고 기도원을 다녔다고 합니다. 이해는 되지만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은 이 세상에서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린 사람은 과부의 아들 청년, 야이로의 딸, 나사로가 전부입니다. 세 명 뿐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살린 이들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우리에게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아이야!” “청년아!” “나사로야!” “요한아!” 그 때 우리는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 새로운 몸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부활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아이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의 소망을 갖고 두려워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아야합니다.
(5)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아이를 살리자, 야이로와 그 아내는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경고하셔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고 한 손마른 자를 고치고 아무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마태는 에수님이 아무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대로 들레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들레다는 말은 큰 소리로 소문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 나팔을 불어 소문내기 쉽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은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 구제하는 것을 나팔을 불어 소문냈습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고 나팔을 불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사셨습니다. 우리도 선을 행하고 나팔을 불어서 알리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수록 예수님처럼 스스로에게 경고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널리 알리시고 이 땅과 하늘에서 상을 주십니다.
(결론-부활을 믿을 때 달라지는 것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다시 살아날 소망을 갖고 평안히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사람들에게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하고 담대히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를 살리고 나의 주위 사람들을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8,1 천안ubf 메시지
누가복음 8장 9부 강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8장 49-누가복음 8장 56
요절 누가복음 8장 50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