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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타자의 집
조강석(문학평론가)
1.
박성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는 조금 특별한 속내를 지니고 있다. 눈에 띄게 변별되는 세 개의 형식이 시집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첫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사람>에서도 그의 사는 좀처럼 단일한 해석으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다층적 특질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복안에 맺힌 다중적 상품을 다각적으로 제시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작품들을 그는 첫 시집을 통해 선보인 바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에는 복안에 포착된 다면과 사태의 다각성이 드러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발성법 자체가 명료하게 변별되는 세 가지 형식이 함께 살고 있다. 세 가지 계열의 시들이 묶여 있다고 할 수도 있겠고 아예 동일성의 품 안으로 귀환하지 않는 타자들의 세 영역이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영역에는 자치의 원리와 외교의 기술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원경으로부터 접근하며 입역(入城) 허가를 요청해 볼 것이다.
때마침 요른이 집은 것은 염소가면이었다 다리에 달라붙은 지느러미를 뽑아내느라 피가 흥건했는데, 가면까지 덧칠하니 캔버스는 더 어둡고 기괴했다 요른은 은밀하게 나이프를 놀렸다 폭염은 설탕처럼 녹아 끈적끈적했다 빌어먹을..폭염에 무슨 축제야 요른은 가면을 쓰고 말린 염소고기를 씹으며 걸어 다녔다 광장과 중앙역을 지나고 시립미술관으로 꺾어질 때 기어이 까마귀를 토해 냈다 염소가면은 더 깊고 더 무겁고 더 능숙하게 요른을 파먹었다 염소와 염소
가 아닌 것들이 아교처럼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요른, 요른,요른..…… 서대문역에서 요른은 더 이상 걷지 못했다 살구나무에 새파란 눈이 내렸다 요른은 검정에 붉은 물감을 섞으면서 축제의 끝을 덧칠했다 뼈만 남은 물고기들이 그의 사지에 붙어 파닥거렸다
- 요른 전문
제1영역에는 3인칭으로 기술되는 사건과 여기에 정서적으로 연루된 관찰자의 시계(視界)가 놓여있다. 마치 가장 짧은 형태의 엽편소설에서처럼 사건을 스케치하되 일의 전복값이 아니라 파국이 진행 중인 바로서의 사건을 다룬다.
대개 이 시집의 4부에 실려 있는 시들, 예컨대, 국립극장」, 「세상의 끝, 딜런」, 「왓슨」, 「요른」, 「출애굽 외전」, 「창과 라」, 「카페 뮐러」와 같은 시들이 여기에 속한다. 지배적 정서의 표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1인칭 화자를 최대한 배제한 채, 마치 편재하는 시계(視界)의 주재자의 것인양-물론, 어떤 경우에도 이때 시계는 숨은 1인칭의 것임
을 우리는 알고 있다 화면을 부려 놓고 여기에 파국을 던져 놓음으로써 정동적 동요(affective fluctuations)를 일으키는 이 시를 이 시집의 제1형식의 시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런 방식으로 타자가 거하는 영역의 자치 원리는 3인칭 시점을 통해 구현되고, 외교는 저 정동적 효과를 통해서 실현된다. 이런 방식에서라면 '세상의 모든 타자들'이 이 시야에 포착될 수 있으되, 지면의 한계상 여기서는 앞에 인용된 「요른」을 통해 그 양상을 살펴보자.
이 화면에 포착된 것은 덴마크의 화가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이다. 표현주의와 추상화를 거쳐 개성 있는 화품을 발전시킨 아스게르 요른이 자신의 방법으로 흥미롭게 활용한 것은 '차용(appropriation)'과 '변용(moditication)'이었다. 기존의 것을 취하고 그것을 변주시켜 새로운 화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런데 앞에 인용된 시는 거의 동일하게 요른의 방법을 바로 그를 대상으로 하여 취하고 있다. 염소가면을 덧칠하는 손놀림, 덥고 어두운 작업실, 폭염 속에서 축제에 한창인 광장이 순서대로 환기된다. 사건은 요른이 염소가면을 쓰고 작업실을 나서면서 발생하는데 "빌어먹을, 이 폭염에 무슨 축제야"라는 말이 바로 그런 정황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심리 모두를 간명하게 요약해 놓고 있다. 여기까지는 요른의 것, 그러나 상황은 "서대문역에서 요른은 더 이상 걷지 못했다”라는 문장을 전후로 크게 바뀐다. 유럽의 어느 광장과 서대문역 인근의 공간이 포개어지면서 기성의 것을 차용하는 요른의 작업이 시에서 재차 차용된다. 검정에 붉
은 물감을 섞는 요른마저 언어의 화폭에 담김으로써 1인칭 화자의 전면 등장 없이 시는 또 하나의 내포-화가를 넌지시 환기시킨다. 그 결과, "뼈만 남은 물고기들이 그의 사지에 붙어 파닥거렸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요른과 요른을 재차 화폭에 담는 화가와 시를 읽는 독자 모두를 하나의 정동으로 이끈다. 시의 끝에서 요른과 요른을 그리는 손과 이 모두를 들여다보는 독자의 심중에 새겨지는 파문을 구태여 하나의 추상명사로 지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짙은 회색 소나기가 떨어지다가 공중에 멈췄다 물방울을 뜯어내면 못 자국이 생겼다 구멍과 얼룩이, 보풀처럼 일어나 번지는 것인데 뒤집어지고 스며들며 멀리 간 것까지 불렀다 시청 계단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던 애인이 내 입술에 묻은 빨강을 보고 웃어 댔다 어리석은 취향이야 소나기가 쏟아지는 정오, 스페인풍의 오래된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비둘기가 높이 날고 비둘기는 높이 날아 맞은편 호텔 옥상까지 올라갔다 방향과 거리만큼 공중에 사들이 그어졌다 물방울을 뜯어내면 구멍과 얼룩이 생겼다 구멍과 얼룩이, 다시 구멍과 얼룩 속에서 희고 간결하게 번져 갔다 중앙역 지하보도에 사람들이 모여 비를 피하는데 정오를 알리는 시계탑 종소리가 울렸다 애인은 시청을 향해 뛰어갔고 나는 애인이 버린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물방울을 뜯어내면 그 자리에 구멍과 얼룩이 생겼다
- 물방울을 뜯어내면 - 사물의 영역 - 전문
제2영역은 사물의 영역이다. 이 시집의 3부는 '사물의 영역'을 부제로 한 연작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상으로 제1영역과의 뚜렷한 차이는 발화자인 '나'가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 생략되거나 '당신'이 발화 대상의 자리에 놓이기도 한다 '사물의 영역'이 시계의 중심에 놓임에 따라 시적 묘사가 주된 스타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인용된 시를 보자. "물방울을 뜯어내면 구멍과 얼룩이 생겼다"라는 문장은 사물과 결부된 특정한 개별사건을 지시하는 문장으로 우선 읽힌다. 물방울을 뜯어낸다는 표현은 비유적 표현으로도 직서적 진술로도 읽힐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비 오는 날의 기억과, 후자의 경우 물이 스민 벽지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니까, '물방울을 뜯어내는 것은 눈앞의 구체적 사건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기억을 소환하는 행위가 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쉽게 관념과 정서의 편에 인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관념과 정서에 쉽게 인계될 때 사물은 클리셰(cliché)에 복속되거나 기껏해야 개인 상징, 심지어는 개인 토템이 된다. 이 경우
사물의 영역은 쉽게 발화자 '나'의 기억 속에서 용해된다.
그러나 비유가 두 다리에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양쪽으로 내민 팔의 무게중심이 기울지 않는 때이다. 사물의 영역」연작의 묘미는 거기에 있다. 일종의 시계 겹침이라고 해도좋고 시계 착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생하게 두 화면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인용된 시에도 근경 쪽에 구멍과 얼룩이 전경화된 가운데 후경처럼 "애인"과의 한때가 포개어진다. 여기서 사물의 영역의 자치가 지속적으로 확보되어야 회상투의 감회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연작은 바로 그 중심을 팽팽하게 부여잡고 있다. 그러니 이를 제2형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를테면, 다음의 대목을 보라.
당신은 중국 출장 중에 목각인형을 사 온다 중국식 무덤에서 자주 발견되는 손바닥만 한 목각인형이다 그 인형은 진시황의 토기 병사들처럼 생매장됐으며 매우 고약했던 식인 풍습의 흔적도 묻어 있다 (적어도 품질보증서에는 그렇게.적혀 있다) 모두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식당에서 저녁 먹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끌려온 사람들을 아틀리에 어디쯤 놓을까 고민하다가 당신
은 테디 인형 가랑이 사이에 목각인형을 놓았다 롯데가 잠실 한복판에 거대한 종유석을 건축한 이유와 같다
(-------)
당신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틀리에로 간다 오른손 엄지로 중국식 목각인형을 쓰다듬는다 황홀해서 눈을 펼 수 없다 산 것과 죽은 것도 아닌, 이 흔해 빠진 유령들에게 가족과 같은 유대감과 놀라운 청교도적 사랑을 느끼는 것 인형이 불타 버리는 악몽을 꾼 다음 날 불안한 당신은 국가기록물보관소에 가서 그의 증명서를 신청한다 국가는 국민의 출생만 증명한다고 공무원이 말한다 그리고, "장난감 등록은 3층 소관입니다"
- 중국식 목각인형 사물의 영역 · 15 부분
'목각인형이 '사달'이다. '테네시의 항아리'가 그러하듯(윌리스 스티븐스), 목각인형 하나가 집안의 '아틀리에'에 놓이자 이 인형은 이내 사위를 장악하고 유형무형의 새로운 질서를 정초한다. 이 목각인형은 내력이 있고 계획도 있다.
"진시황의 토기 병사들처럼 생매장됐으며 매우 고약했던 식인 풍습의 흔적도 묻어" 있는 듯한 이 인형은 '잠실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종유석'처럼 집 안의 '아틀리에'를 장악하고 그 주인에게 “가족과 같은 유대감과 놀라운 청교도적 사랑"을 선사한다. 이것이 왜 사건이 아니라, 사물의 영역이 틈입하는 순간은 이처럼 돌발적이기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바로 지금 눈을 들어 반경 50센티미터 이내 의 사물들을 사방경계하시라)
시가 이 대목에서 끝이 났다면 한바탕 소동에 불과했을지 모를 이 '틈입'은 시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극적 아이러니와 더불어 예기치 않은 귀결을 맞게 된다. 역사와 결부되었을지 모를 '일(anecdote)'를 지닌 인형이라면 공적기록물보관소에 등록되어야 마땅한 일일 터. 그러나 진중한 선의에 대해 되돌아온 것은 "장난감 등록은 3층 소관"이라는 공무원의 답변이다. 내력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물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소관 관할 영역 밖이다. 사물의 영역은 마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게 기억이 그러하듯 발견하는 자에게는 무한을 선사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시가 사물의 영역을 여는 열쇠로 기능해 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3.
(1)
바람이 불었네
미세먼지가 씻겨 간 오후
외투에 툭, 떨어진 햇살 한줌 물컹했네
잠시 병(病)을 내려놓고 걸어 다녔네
시청과 시립미술관이 까닭 없이 멀었네
정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해 기우는 서촌에서 부스럼 같은 구름을 보았네
물고기는 허공이 집이라 바닥이 닿지 않는데
나는 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
가파르게 바람이 불어왔네
내 몸으로 기우는 저녁이 쓸쓸했네
쓸쓸해서 오래 머물렀네
- 저녁이 머물다』 전문
(2)
마른 볕에 당신이 고여 있었다 뜻밖이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당신은 꼭 그만큼 물러났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둑했다 볕은 숲을 흔들면서 꽃가루를 날렸다 북쪽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크게 휘어지고 출렁거렸다 하늘이 노랗게 덧칠되다가 물에 씻긴 듯 맑아졌다 너는 어디를 보고 있냐는 당신의 옛 물음 같았다 나는 소리가 없으므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만 몸이 무너졌다
- 「바라보다 전문
인용된 두 편의 시는 각기 이 시집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어온 독자라면 오히려 이 풍경이 낯설어 보일 수 있으나 시집에 실린 상당수의 시에서 가장 큰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의 영역이다. 처음과 마지막 시를 이렇게 배치한 까닭은 어쩌면 우리가 앞서 살펴본 두 영역이 바로 이 '당신'의 영역 안에 포괄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시집에서 '당신'의 영역은 넓게 전개되어 있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당신'을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시인 스스로에게도 이 영역은, 비록 처음에는 구체적인 지시 대상을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나 이내 관계의 현상학 일반에 가닿는 것이 된다. 김소월에게서 그랬듯이, 이성복에게서 그랬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 지시 대상이나 일신상의 문제와 관련된 개별적 사실관계들을 읽어 내기보다는 '나'와 '당신'의 관계의 구체성 그 자체에 집중해서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연역적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연역이 시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두 편의 시에 '나'와 '당신'이 맺는 관계의 특수성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저녁이 머물다에는 '나'의 정황이 담담한 어조로 진술되어 있다. “잠시 병()을 내려놓고"라는 구절과 "나는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라는 문장이 객관적 상황과 심리적 정황을 동시에 보여 준다. 바라보다는 '저녁이
머물다」에 제시된 정황을 조금 더 내밀한 논리에 의해 선명하게 보여 준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당신"이 있다. 정확히는 "당신이 고여 있었다"라고 시간적 경과와 함께 표현했으니 '당신'을 그리는 마음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의 배경이 된 '당신'과 '나'의 사정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관계의 양상
은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어 마음만 우뚝했다"라는 문장에는 부연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구절 역시 이런 정황과 결부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울에도 나는 맨발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면 당신의 구석이 나를 에워쌌다 당신의 구석에는 늘 울음이 고여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몸에 꽉 끼는 창백한 소리였다 얇아서 속이 다 비쳤다
- 맨발」 부분
한겨울에도 나는 맨발이었다"는 말의 함의는 저녁이
머물다」에서의 "나는 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라는 구절에서와 다르지 않다. '당신'의 영역에는 세 가지 이정표가 있다. '나'는 맨발이며 바닥 말고 기댈 곳이 없다. '당신'은 볼 수만 있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리고 '나'의 몸은 무너져 간다는 것이 이 영역의 심리적 이정표들이다.
이 간곡함 때문일까? 이 영역에서의 발화는 '나'의 기억을 통해 반복적으로 '당신'을 소환할 때마다 확인되는 거리, 다시 말해 '당신'에 다가가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는 거리일지언정 바로 그 거리를 붙들고자 하는, 즉, 거리 자체의 소멸을 막고자 하는 바람을 '나'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거리의 소멸이 관계의 소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엽서를 꺼내 그 두 줄의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
- 우체국」 부분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가 무엇일지를 묻는다는 것은 현상과 의지의 경계를 가늠해 보겠다는 것이다. 우체국에서 엽서를 보내는 대신 이 두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는 것은 현상과 의지의 교환을 삶의 태도로 수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집의 가장 수일한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이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 사이에서 깃을 펴는 "희고 간결한 새"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심중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한결 명료해진다.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의 깊이와 완력은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잔설이 멈춘 순간이다
붓이 까마득한 벽에 닿았을 때 시간의 연골이 바쁘게 빠져나갔다
속이 파이고 거죽만 남은 목어가 간신히 지느러미에 물은 흙을 털었던 것인데
지천에 널린 반백의 입술들이 쏟아 낸 것은 말이 아니라
울음들이 뒤엉킨 소리였다
단단한 것들이 피고 지는 몸에 다시 꽃잎이 터지고 허공은 그만큼 밀려났으며, 또한 살과 뼈의 경계는 분명해졌다
바람 한 무리가 새의 겨드랑이를 흔들거나 낙타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눈에 박힌 빙하를 녹이고서야 당신은 봄꿈에서 깨어났다.
- 「세한도, 봄꿈」 전문
주지하듯 '세한도(圖)'의 연원은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세한도 자체가 전고에 힘입은 소산일 것인데 인용된 시 역시 세한도와 관련된 맥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에 사용된 진술들은 직접 세한도를 지시하지 않는다. 시 속에서 구조화되는 것은 세한도라는 기호가 계속해서 일으키는 의미화 작용의 파장 위에서 성립되는 '나'와 '당신'의 관계이다.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그 본뜻을 알게
된다는 고사에 비추어 '당신'과 '나' 사이에 쉽지 않은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경과하고 난 후에야 명료하게 보이는 바가 있다는 깨달음이 시의 기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제시된 강렬한 이미지들은 바로 그 시간의 흔적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붓이 닿았을 때 바쁘게 빠져나가는 "시간의 연골", "속이 파이고 거죽만 남은 목어”, “새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바람 등의 이미지는 추사秋史)의 세한도 자체를 직접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세한도가 낳는 의미의 파장 안에 있음이 틀림없다. 고통의 흔적과 황량함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다른 시의 제목을 가져와 표현해 보자면, 깊은 상처를 안고도 스러지지 않고 '하염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태연함과 의연함이 함께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안식이란
하염없이 쏟아지는 부끄러움과 욕설뿐
바람이 짊어진 구름의 무게는
왜 한없이 투명한 걸까
왜 당신은 밤낮없이 눈을 감고 있었을까
- 하염없이」 부분
사태를 이렇게 정돈하고 보면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여러 겹으로 읽힌다. 세한도에 들었다가 세한도를 나오며, 녹을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를 어떻게 새겨야 할까 당신이 "눈에 박힌 빙하를 녹이고서야" 깨어난 꿈은 왜 한 겨울의 꿈이 아니라 "봄꿈일까? 이때 봄꿈은 겨울 속에서 꾸는 봄날의 꿈일까,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돋는 날의 꿈일까? '나'와 '당신' 사이의 일을 독자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것을 고지하는 게 시의 일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때 봄꿈이 만드는 이 다채로운 의미의 연한 파장은 세
한도보다도 길다. 시의 붓이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박성현의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는 시의 붓이 새겨 넣은 타자의 영역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웅숭깊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