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기다리며"
마태복음 1장 18-25절
저는 강릉 함씨입니다.
강릉 함씨는 조상이 하나뿐이라
모두 같은 혈통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이
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요셉아, 너는 함씨 중에서도
항렬이 높은 편이야.”
이게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시골에 가서 알았습니다.
아버지와 형 동 생하는 분들의 나이가
굉장히 많으셨습니다.
어느 날은 저에게
“너한테 형님 되신다.”라고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저랑 스무 살은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씨 집안에서는
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함씨 성을 가진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항렬이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 친구가 어느 정도 쯤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씨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돌림 자야?”
“나는 ‘영’이야.”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여쭤보았습니다.
당시 집에 족보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는
전화로 시골 집에 연락하여 문의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저보다 아래라고 여겼던 그 친구의 돌림자가
저희 증조 할아버님의 돌림자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로 그 친구에게 단 한 번도
제 돌림자를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족보가 참 중요했습니다.
과거엔 어느 집안 사람인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도 했죠.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입니다.
특히 1장과 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저자인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을 축으로 14대씩
세 그룹으로 묶었습니다.
여기 나온 족보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먼저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마리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의미합니다.
사실 아직 성적 경험이 없는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척추 동물에서 볼 수 있는
자웅동체(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것)
가 아닌
인간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와 달리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다니셨던 분은 이걸 믿긴 참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요셉은 어땠을까요?
19절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지금 요셉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정혼 관계에 있던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답니다.
유대인이 지키는 율법에 따르면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질 경우 돌에 쳐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정혼은 결혼 1년 정도 전에 약혼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녀는 서로에 대한
순결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인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차 싶지 않았을까요?
누가 이런 상황 속에서 화가 치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떠실 것 같나요?
그냥 묻어두고 결혼하자니 너무 찝찝할 거고,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았던 겁니다.
결국 요셉이 했던 선택은 조용히
그 정혼 관계를 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와 여자를 모두 보호하는 일이었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납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하죠.
우리 20절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는 천사를 의미합니다.
천사가 꿈 속에서 요셉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기보니까 요셉이 어떤 집안 사람이라고
나왔어요?
‘다윗의 자손’입니다.
앞선 족보에 대한 말씀이 그냥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약속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
그리고 요셉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죠.
주의 천사는 바로 이 사실을
먼저 언급하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약속대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머리로 받아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 율법도 잘 지키려고 했고요.
그러나 성령 잉태 사건은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결국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에게
오늘 이 시간,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길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우리 함께 21절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셉을 향한 천사의 말이 이어집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날 아이는 아들이고,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다.
예수란 말은 히브리어로 ‘예호슈아’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졌죠.
이 세상의 구원자들은 인간을
육적 위험에서는 구원해 줍니다.
그러나 영적 사망의 늪에서는 이끌어 낼 수 없죠.
오직 예수만이 인간을 영적 멸망
곧 죄에서 구원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700여 년 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을 읽겠습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속죄를 위해
양을 잡았습니다.
그 양의 모든 피가 제단에 뿌려졌습니다.
그렇게 양은 물과 피를 모두 쏟은 채
번제단 위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에게 손을 얹은 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육신을 찢으시고,
물과 피를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 죄사함의 감격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아 진심을 담은 예배를
드리게 되길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우리함께 22,23절을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1:22,23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한번쯤 들어보셨을 단어죠?
여기서 ‘임마누’는 ‘우리와 함꼐 계시다’는 의미고,
‘엘’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압제로 신음하며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의 가장 마지막 책이 뭔지 아십니까?
‘말라기서’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후
400년간 어떤 말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점령당했고,
헬라문화가 이스라엘을 장악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뻗어간 도로를 통해
로마군과 장사꾼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어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천사를 통해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임마누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침묵이
느껴진 적이 있지 않나요?
기도는 하는데, 응답이 없는 거죠.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두려운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 중에 있는
우리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이죠.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지난 400년은 인간적으로 볼 땐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준비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강력한 로마의 등장으로
헬라어가 전 세계의 공용어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대부분이
헬라어로 기록될 수 있었고 통용되었습니다.
동시에 로마가 깔아 놓은 도로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용이하게 쓰였습니다.
전도자들은 그 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길이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2023년을 돌아보십시오.
정말 많은 일이 있지 않았나요?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셨고,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주셨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돈이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권력만 가지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세상의 돈과 권력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킴 윌스라는 여류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다니며
찬양했던 성악가입니다.
‘킴’이라는 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본래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두 눈을 잃고
시각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미군 병사가
그녀를 데려다가 신앙으로 잘 양육했습니다.
그녀는 인디아나 주립대학을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며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무대에 올라가 찬양을 부를 때면
많은 사람이 그녀의 영감있는 찬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그녀의 간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곤 했죠.
“여러분,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를 도와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계십니다.
이 분은 항상 저를 도와 계단이나
돌멩이 같은 장애물을 말해줍니다.
그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발 걸음을 옮겨
무대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내자도 제 100미터 앞에
무엇이 있는지까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장애물들을 이야기해줄 뿐이죠.
그럼에도 저는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 서서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10년, 20년 뒤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친절한 안내자 되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도달 할 줄 믿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큰 아이가 두 살 때쯤이었습니다.
한 여름 푹푹찌는
대낮에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혼자 차 문을 잠궜는데
차키가 안에 있다는 거였죠.
이미 시동을 끈 차였기 때문에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10여 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얼른 전화를 끊고 달렸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습니다.
중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뻔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저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아들이 죽어 가는데 무엇이 중요했겠습니까?
전력으로 달려 5분만에 도착했습니다.
헉헉 거리는 숨을 참으며 차에 도착했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아이가
다시 문을 열어서 나올 수 있었답니다.
그땐 힘들어서 털썩 주저앉았지만
아이가 무사한 걸 보자 다시 힘이 났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며 이 때가 떠오른 건
우리 주님도 이러셨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
우리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주님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기로 하셨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해야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사람들에게 받는 핍박은
작은 돌부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몸이 쓸리고, 찢어지고,
심지어 창에 찔리고 무시당해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아들을 사랑해서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늘 보좌 버리고 달려오신 것입니다.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동정녀 사건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해하면 믿어집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닙니까?
날마다 그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며
승리하실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