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부디 내가 없더라도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세요,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지만 아저씨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나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보들랭집사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은 후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잘 갔다 오십시오, 그리고......"
".......?........"
"도련님이 제 딸을 좋아하는 것은 좋으나 제 딸에게 상처를 주지는 마십시오. 확실하게 제 딸을 사랑하긴 하는 겁니까? 만약 그것이 철부지때의 한순간의 유희라면 일이 커지기 전에 여기서 그만 두는게 서로의 미래에 좋을 것입니다. "
"신 앞에서 맹세합니다. 나 자크리는 까트린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것이라고....."
나는 아저씨 앞에서 신께 맹세했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더니 의미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철부지들의 풋풋한 사랑에 대한 조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날 신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한번 간곡히 부탁드리지만 불쌍한 아버지를 부디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까트린도 역시......."
보들랭 아저씨가 내 방을 나간 후 조금 지나 난 마음을 가다듬고 플랑드르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긴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통안의 심정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녀에 대한 걱정이 남아 있어선지....서러운 생각이 내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가야 했다. 더 이상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리......그리고 그녀에 대해서도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으리.....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 대해 방관한다는 말은 아니다... 미래는 결코 정해지지 않는 법......내 비록 기구한 운명에 노출되어 있지만.......앞으로는 더 좋아질거야.....
어렸을때부터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는 장원밖의 모험이었지만 무조건 북쪽길을 따라가라는 아저씨의 말만 믿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서럽고 추위에 얼어붙은 차가운 내 마음과는 달리 찬란할 정도로 따사한 해가 내리쬐는 장원의 아름다운 아침이다. 평화로운 표정의 농부들......그 옆에서 뛰노는 아이들.....멀리 관목숲에서 들리는 이름모를 새소리, 게으름을 잔뜩 부리고 있는 양들을 호령하는 어린 목동,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똑같은 평화로움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누구나 똑같은 생각이 들겠지만 나 역시 이미 뿌리가 뽑힌 듯한 허전함을 잠재울 수 없었다. 나에겐 너무 소중한 사람들 싱클레어.....카트린.....아....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과연 행복했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친구들이여 당분간 안녕......
한참을 걸었을까? 이제 우리 성도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인다. 다시 말해 여기는 이미 영지의 바깥족이라는 이야기이다. 내 모습은 이미 철부지 자크리의 모습이 아니다.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있으며 다른 한손에는 지팡이, 그리고 고행자가 입는 순례복을 걸쳐입은 전형적인 초보수도사이다. 물론 내가 애용하는 웨일스산 단검 역시 가지고 간다. 이 단검은 도적과 강도로부터 날 보호해 줄 것이다.
그런데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 보였다. 누굴까?.........어쨋든 강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여인이다. 난 경계심을 풀면서 손에 들었던 단검을 허리춤에 다시 숨겼다.
"이보시오! 실례지만 이쪽으로 가면 플랑드르쪽으로 나오는게 맞습니까?"
나는 낮선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까이서 안면을 대하니 피로함에 찌든 모습을 한 더러운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어 이런!.............."
자세히 보니 어디서 본 것도 같은 느낌이 든 여인이었다. 아 맞다. 전에 마녀로 몰린 그 여자
였다. 그 덕분에 난 죽을고비를 넘겼었지...근데 왜 이 여자를 여기서 만난단 말인가?
"당신이였군요......그 날 이후로 걱정을 많이 했었죠.....그때 우리 성에서 좀 쉬다 가지 그랬어요?"
벙어리인 여자에게 대답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다만 여인의 표정으로써 알 수가 있었는데....눈에는 통한의 눈물이 고여 있었고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애처롭게도 그것을 표정으로밖에 표현을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 역시 여인의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짐작되는 것이 없었으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힘들었다.
"정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전 플랑드르에 갑니다. 십자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부디 그대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기 소매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손수건이었는데 먼지와 때가 낀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보통 부랑하는 여자의 소유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손수건에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그 뜻을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그 날의 고마움에 대한 표시려니 생각한 가운데 발길을 재촉했다.
"뭘 이런것까지 다...... 전 이만.....다시 인연이 된다면 또 만나겠지요"
나는 길을 재촉하며 돌아섰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한동안 내 손을 붙잡더니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인은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손, 얼굴, 가슴등에다 갖다대었는데 그리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여인의 몸과 옷에서 나는 오물을 뒤집어쓴듯한 더럽고 케케한 냄새가 역겹도록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전 갈길이 바쁜 몸이라.....부디 절 놓아주십시오"
아마 말로는 안될 것 같았다. 여인의 간절한 눈을 보자 계속 지체하다가는 많은 시간을 빼앗길 것 같았다. 사흘안에 플랑드르에 도착해야 한다......난 스스로에게 냉정해져야 했다. 여인의 손을 강제로 뿌리친후 난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여자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여인에게 친근한 느낌과 포근한 감정이 들었다. 예전부터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얼마간 뛰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여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이제야 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동쪽 숲에서 문득 낮선 소리가 났다.
낮선소리라고 했지만 다가가 보니 그것은 일종의 노래소리었다. 한 무리의 일행이 있었는데 집시들이 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집시들은 서로서로 깔깔거리며 감미로운 뮤트를 연주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세상 걱정이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남녀무리들은 어지럽게 뒤 엉킨체 술을 돌아가며 마시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문득 술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차마 수도사의 복장을 입고 그들과 어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한동안 그들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들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앗! 저기 수도승이 있다"
"잘 생긴 젊은이로군,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오게, 우리랑 한잔 하자고 술은 행복의 묘약이라네 하하하"
집시 남자 두명이 이윽고 나를 발견한듯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서 춤을 추던 집시 여자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혹하듯이 온 몸을 흔드는 요염한 춤을 추며 나에게 서서히 다가 왔다. 허리를 어지럽게 돌리는 것이 요염하기 그지 없었다.
"젊고 잘 생긴 수도사님! 부디 저의 술잔을 받으세요 이 술잔은 행복의 묘약이랍니다. 이 한잔으로 모든 걱정과 고통이 모래성 무너지듯 사라질 거에요"
집시 여자는 윗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배꼽이 보였으므로 사실 반 나체와 마찬가지였다. 아름답고 두툼한 여체를 요염하게 흔들어대며 유혹하는데, 아무리 수도승의 복장을 입고 있다고 한들 내 자신을 통제하는 데는 사실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술 생각 역시 간절했다. 한잔 정도는 괜찮으리라.......나는 그 요염한 집시 여자가 권하는 술을 한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입술에 대려는 찰나.........
"멈춰!!"
갑자기 어디서인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