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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주님께 그들을 의탁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모범 두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을 세상이 꼭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삶을 꼭 보여주어야 하신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을 교육하기를 원하십니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그런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했습니다.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이가 비뚜로 걷고 있다면 그건 엄마가 비뚜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는 그저 보고 따라 하며 배울 뿐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모범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 가르침이 모범을 넘을 수 없을까요? 모범에는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통해 흐릅니다.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합니다. 지시하는 사람에게는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 편해지자고 말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취객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아무도 돕지 않으려 하자 우리나라 청년 이수현 씨가 뛰어들어 그를 구하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그렇게 선로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신문에 많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지식은 피와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그 사람을 닮고 싶게 만드는 사랑이 섞여서 오지 않으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진리와 은총이 항상 함께 와야 합니다. 은총이 피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제자 47명이 이미 의사가 되었거나 의대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톤즈는 시골이고 수단에서도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공부를 굉장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태석 신부가 의사의 모범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지 않고 말로만 의사가 되라고 했다면 몇 명이 그분의 말을 따랐을까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선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분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이 두 가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거의 필요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본받게 하고 싶어서 가르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법과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비난하고 순종하는 모습도 없다면, 자녀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고 말을 잘 따라줄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범도 없고 피 흘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말 안 듣는 자녀를 고치는 수많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고쳐질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런 자녀를 자신이 직접 혼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대에도 가능합니다. 신앙의 힘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습과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습니까?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에서 무조건 화를 내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막말하고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나옵니다. 게임머니로 부모 몰래 600만 원을 결제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부모와 누나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착해 보입니다. 이런 아이에게 손이 올라갈 만도 한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입니다. 아이는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냥 죽겠다고도 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상해를 입혀 합의금으로 받아서 갚겠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학교도 나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착한 가족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부모가 돈 버느라 너무 바빠서 금쪽이는 할머니에게 키워졌습니다. 할머니도 금쪽이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줍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귀찮아합니다. 할머니를 쫓아내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자기를 탓하기도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사람은 모범을 보고 성장하지, 지시받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모범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주는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엄마입니다. 하지만 금쪽이에게는 할머니였습니다. 문제는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금쪽이는 할머니를 통해 윗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둘이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거의 전적으로 할머니에게 키워지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금쪽이가 어머니를 통해 윗사람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보고 배우도록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사제가 주교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신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기 말을 따라 달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신자들이 그 사제를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잘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그 중간에 총회장이나 간부들이 있다면 그 간부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나의 모범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것 안에서 모든 조직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됩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수출입 회사에서 비서직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취업이 급했던 어느 청년도 공고를 보고서 이력서를 제출했지요. 그런데 서류 면접에 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비서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학도 잘하지 못하고, 이력서에는 온통 오타로 가득합니다. 이런 비서를 저희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서류만 보고 자신을 함부로 판단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와 욕설이 가득 담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습니다. 발송하려는 순간, 이렇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뛴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습니다. 이런 항의와 욕설의 메시지를 보고서 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보낼 리가 없고, 또 자신의 화도 풀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기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이 청년은 뜻밖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비서 일은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힘들겠지만, 열려 있는 마음을 보니 행정 부처에서 먼저 경력을 쌓으면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처음의 마음대로 복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여전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충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물리적인 힘일까요? 관계 개선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삶의 기쁨을 주는 주님의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주시면서 평화를 이뤄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폭력의 관계가 아닌 평화의 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희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