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당선 『데드·마스크』조용득(서울 영등포구 공항동26의9)
가작 『여름의 끝에서』오영일(수원시 화서동103)
<시> 가작『기공』국효문(서울 성북구 동선동5가110)
가작『은유의 꽃』이진흥(공군 제5692부대작전부)
<시조> 당선『가을에』김종(부산시 부산진구 평화종합고등학교)
<희곡> 당선·가작 없음
<문학평론>당선『자의식 문학과 난해의 한계성』장윤익(대구시 효목동 효목아파트8동6호)
<심사위원>
▲단편소설…김동리 황순원 서기원
▲시…박남수 김종길
▲시조…김상옥
▲희곡…유치진 여석기
▲문학평론…홍사중
* 뒷이야기 : 시를 심사한 두 분 시인들이 각기 뽑아든 작품을 들고 서로 의견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 두 편을
다 가작으로 정했다는 말을 국효문 시인이 나중에 (박남수 선생님으로부터)들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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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起工)
국효문
빈 터에는 죽은 꿈만이 휴지처럼 쌓이고
탑 둘레를 돌며 춤추는 나비여
싼 임금, 나쁜 노동조건 속에
스스로의 손금을 털고
햇빛과 바람의 교직(交織)에 파묻힌다.
또 하나의 설계를 풀어낸다.
벽돌에 그려진
이슬 젖은 날개가 파닥인다.
바람의 빈 껍질이 쓰러져 있는 공사장의 빈 터
햇빛은 지푸라기를 밟고 뛰어다니고
꽃불처럼 따가운 사랑에 눈 떠
치자빛 저고리를 받혀 입은 무희.
일찍이 청사진에 담긴
타의의 설계라 하더라도
철근이 숲처럼 들어선 공사장에
날아와 앉은 나비여,
홑적삼인 채 시선을 떨며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발 아래에 깔린 가난과 풍요의
절대치를 굽어보면서
본능만이 잡초처럼 우거진 일상과 싸운다.
모래를 퍼 올리고, 자갈을 쏟아 넣고
시멘트를 풀어
벽돌을 찍어낸다.
물을 뿌려서 햇볕에 내어 말린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하루의 생활도
찬 달빛 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이 슬픈 전신(轉身)이여
그러나, 오늘 기공(起工)의 하늘 높이 펄럭이는 깃발.
은모래로 찍어내는 한 장씩의 벽돌에
물을 뿌린다.
삽 끝에 파헤쳐진 피리조각과
선녀들의 옷자락이 너울거린다.
온종일 물을 긷던 샘에서
솟아오르는 칠보의 활이여,
봄 아지랑이를 잉태했던 신혼의 단란(團欒)은
알 수 없는 소리의 톱날에 잘려 아프더라도
나락의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한 장씩 가로질러 쌓아올린
벽돌의 어느 모서리에서
사랑이 싹트기도 하는,
불완전하나 지순하게 다가오는 탑
기와 올린 지붕들 날개를 펴고
햇빛 속에서 헤엄쳐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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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隱喩)의 꽃
이진흥
1
너는
우주가 하나로 집중할 때
비로소 열리는 눈이다
보석처럼 견고한 고독의 사슬로
일체의 빛을 묶어
흔드는 손이다
온 생을 한가닥 활줄에 걸어
죽음을 겨냥하는 사수(射手)의
한 치의 흐트림도 거부하는
엄격한 포즈
중심을 깨뜨리는
모순의 얼굴이다
날카로운 난(爛)의 춤, 꽃이여
2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고 나면
잡힌 것은 애매한 그림자다
돌아서면
슬픈 몸짓으로 다가오다가
손을 주면 이내 사라지고
잡는 방법을 전혀 포기할 때
남몰래 내 안에
깃을 치는
너는 한 오리 율동이다.
내 어린 시혼(詩魂)의
현을 퉁기는
3
한밤중 머언 하늘 끝에서
우주의 비밀처럼 빛나는
별이 떨어질 때
가장 신비한 모습으로 피어나서
아름다운 소멸을
배웅한다.
스스로의 무게로
가지를 떠난 열매가
한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때
가슴을 도려내어
완성의 형식을
부여한다.
눈부신 빛의 뒤에 숨어서
온갖 빛나는 것들을 드러내는
어둠처럼
끊임없이 떨어지는 것들 속에서
하강(下降)의 질서를 다스리는 것은
꽃이여 너의 눈짓이다.
【심사평】박남수, 김종길
금년도 詩 부문 응모작품은 전반적으로 종전의 것들과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우선 난삽하기보다는 평이해진 점이 그렇다. 그러나 평이해지려는 노력은 의미 있는 노력이면서도 또한 그것대로의 위험을 가진다. 평이해지려는 나머지 압축이나 생략이 아쉽게 되어 간단히 말하면 싱거워지는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주의를 끌 만한 작품들의 수효는 예년에 비해 적은 편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은 국효문의 「起工」, 이진흥의 「隱喩의 꽃」및 이상철의 「傳燈寺」 3편이었는데 금년에는 아쉽게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3편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고 작자들의 앞날이 기대되는 작품들이다.
국효문의 「起工」은 우선 언어의 질이 청신한 것이 좋았다. 그리고 작품의 세기도 섬새하였다. 그러나 주제가 명확하지 않고 구성이 허술한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앞으로 이러한 약점만 극복하면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진흥의 「隱喩의 꽃」은 「起工」과는 대조적이었다. 短章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주제나 구성면에는 별 무리가 없고 관조와 대상의 해석에 적당한 깊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너무 관념적이어서 참신한 느낌이 부족한 점이 아쉬웠다. 시적 역량을 짐작케 하는 점에서는 이 작품이 가장 확실한 것 같았다.
이상철의 「傳燈寺」는 깜찍한 시적 기교를 보였으나 주제나 규모가 가벼워서 가작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 작품의 작자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유망한 신진들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정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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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효문 시인 대표시>
오후의 외출 (외 5편)
국효문
나의 외출은 술렁거리는 잎사귀
소음에 젖어
점점 커지는 귀를 세우며 간다
눈 시린 거리에
먼지는 불티처럼 끓고
회오리바람에 밀리듯
횡단로를 건너면
진흙처럼 찐득이는 거리
도로변 과일장수의 바구니가
위태로이 곡예를 하고
아크릴 간판의 커다란 글씨는
희극배우의 얼굴이 되어
기우뚱 웃고 있을 때
대기 속을 휘저으며 떠도는 소문의 구름떼
노끈처럼 동여진 수세기의 산책이
부르튼 발바닥을 내밀며
땀 속에 절여지고 있다.
어느 먼 나라의 지붕 아래서는
착한 천사가 내려와
해진 구두를 꿰매고
아픈 발을 어루어 주기도 한다는데
나의 신발은 해진 잎사귀다
찐득이는 거리 속에
먼지는 불티처럼 끓고
나는 시린 눈을 비비며
조각도 앞에 선 목재처럼
단단히 굳어진다.
그 마을․ 2
—피에타
화가는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에 보았던, 피 흘리는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비탄에 잠긴 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가위눌린 꿈이었던지
꼭 생시만 같았습니다
그 꿈은
앉아 있을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담배를 피울 때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는 그 꿈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더 눈을 맑게 씻고 열심히 그렸습니다
마을 앞 개울에 나가
징검다리를 그려서 벽에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제목은 징검다리인데도
피 흘리는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그런 그림이 되어버렸습니다
화가는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소도 그렸고, 산도 그렸고
동네 아이들도, 초가집도, 도시의 빌딩도
번화한 시가지 풍경도 그려서
그의 벽에 붙였는데 제목은 각기 달라도
화폭에 담긴 것은 모두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의 방 벽은 같은 그림으로 꽉 차게 메워져서
똑같은 사진을 수십 장 전시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밑에 붙인 제목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 후로도 화가는 계속 같은 그림을 그려서
벽이란 벽은 모두 채우고
방바닥부터 쌓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방바닥에서 쌓이기 시작한 그림은
무릎에 차오르고
배에 차오르고
가슴에 차오르고
그의 목덜미에까지 차올라서
결국은 목이 메어
피울음이 되어 터졌습니다.
—계백의 이야기 13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문 밖에 나와 서 있었어요.
전장에 나가신다던 당신이 왜 이리 갑자기
돌아오셨는지요.
당신의 투구에서는 비의 냄새가 나고요.
당신의 옷 속에서는 솔잎 냄새가 나네요.
당신의 칼 속에는 번개가 숨어 있어요.
아아, 당신에게서는 아직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이상한 향기가 납니다.
젖 비릿한 냄새 같기도 하고
음률 같기도 한 냄새가 나네요.
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왜 우두커니 서 계시나요
아이들은 모두 잠들고
아래채 사람들도 자라고 했어요
왜 그리 말씀이 없으신지요
미안하다고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용서해달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알고 있어요
조정의 의론은 백출하고
"흥수"의 말까지도 믿지 못하다가
나당군이 밀려와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살아서 노비가 되느니보다는 죽음만 같지 못하다
당신 말이 옳아요
우리 모두는 각오가 되었답니다.
마지막 밤입니다.
사랑했었다는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인데
어쩌면 이렇게 윤이 나기도 하지요
저와 애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의 인연이 이토록 깊어
당신 앞에서
한날 한시에 떠나게 되니까요.
그러나 어찌합니까
우리를 보낸 후 당신의 아픔을
어찌할까요
당신은 그렇게 혼자 아파야 하나요
그 무서운 고독의 동굴을
누가 밝혀줄까요
어떻게 혼자 전장으로 가시게 할까요
모두가 운명이라고요
제가 왜 당신의 그 아픔을 바라보게만 되었을까요
제가 떠난 후
백마강의 물을 보셔요
그 강줄기 맨 가운데로 흐르는 물이 되어
파르르 파르르 넘실대는 물줄기가 되어
당신의 아린 눈빛을 식혀드리겠어요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결행하세요
가장 큰 기쁨으로
가장 큰 아픔으로.
모닥불
맨처음 드리고 싶은것은 솔향기입니다.
아름드리 나무였던 몸이 비록 장작으로 잘렸지만
아직 향기는 살아서 전해드리고픈 제 순결입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말도 미처 전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던 제 부끄러움이라 여겨 주십시오.
다음으로 드리고 싶은 것은 따스한 기운입니다.
제 몸이 불이되어 당신 몸을 따스하게 어룰 수 있다면
그 따스함에 핏기가 돌아 당신의 환한 웃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기꺼이 타오르는 불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것은 꽃다발입니다.
춥고 어두운 세상일에 이리저리 지쳐서 이 몸 마디 마디
잘려 형체도 없지만 계속 타올라서 이 뜨거운 마음과
타오르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꽃 무데기 되어 당신 가슴에
한아름 꽃다발로 안기고 싶습니다.
이 부끄러운 마음의 향기와 이 몸을 태운 따스함과
이 마음의 열정으로 만든 꽃다발을 당신 마음 위에 모두 바친다면
정말로 진실의 문은 열릴 것인가
정말로 그 문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이 밤 깊이 타올라서 한덩이 숯이 될 때까지
그 숯덩어리가 다음 생을 꿈꿀 때 까지
이 몸과 마음을 그대로 태우겠습니다
아침의 꽃
그와 만나는 아침은
맑은 유리컵이다.
그는 밤새 품고 온 그물을 꺼내어
달빛 즙을 짜서
오렌지 주스를 만든다.
안개 부딪는 소리 사근거리며
심호흡을 크게 내쉬어 발성연습을 하고
피아노 소리 숨가쁘게
물방울을 튕기는 아침
식탁 위로 뛰어다니는 웃음은
달빛 묻힌 수저처럼 반짝인다.
그와 만나는 아침은
유리컵에 따르는 소리다.
소나기
싸리나무 튀는 소리가
구급차의 사이렌처럼 가쁘다.
도시의 잡답을 지나
먼지에 묻기도 하고
소문이 되어 선들바람 따라서
들판에 어른거리다가
지리산 줄기 말라붙은
능선을 흔들며
세차게 번지는 산불과 만난다.
그 불길 사뤄지고 사루어져서
튀며 보채다가
먹장구름 산등성이를
쓰리게 적신다.
후미진 계곡에서는
지나간 날들의 수첩을 넘기며
애틋한 격정에 나부끼던
이파리들이 하늘하늘 떠돌다가
백금의 빛나는 회초리만 휘두르며
온 산을 후려친다.
국효문(鞠孝汶 1949.7.19 ~ 2017.7.28)
■ 1949년 전남 담양 출생
■ 전남여고를 거쳐 성신여대 국어교육과 및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1972년 「중앙일보」신춘문예 시 가작 입선
■ 1973년 「현대시학」추천 완료(박남수 시인) 등단
■ 목요시동인, 원탁시 동인
■ 송정여중 교사, 호남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이사,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역임
■ 제1회 광주문학상, 제7회 한중 작가상 수상
■ 시집 『홍적기의 새』(1979, 배재서관), 『님이시여』(1988, 현대문학)
2000년 겨울 '원탁시회 詩낭송회'를 마치고, 뒷줄 좌로부터 강인한, 김종, 진현성, 박홍원, 전원범,
앞줄 좌로부터 김영박, 김준태(초청시인), 국효문, 문도채, 최봉희, 문병란, 오명규 시인 등.
(범대순 시인 촬영)
일제시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온 신식 여성(국효문)이든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겨우 한글을 터득한 분(심상운)이든 자식을 사랑하고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은 매한가지다. 시인 심상운은 6·25전쟁 당시 소년병의 다리 상처를 씻어주던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그는 늘 바르고 꿋꿋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어머니의 정신이 시집에 오롯이 담겼다고 했다.
국효문 시인에게 어머니는 ‘인생의 형성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직접 시 쓰기를 가르쳐줬던 어머니를 추억하며 사모곡을 적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치마를 잡으면/ 파아란 하늘이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고/ 따라다닐 때면/ 세상은 언제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에세이집 《그리운 어머니 사랑합니다》소개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