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청해 자유국의 발전과 청해민국으로의 재탄생
청해 자유국이 수립되고 난 뒤, 초대 대표 이준은 청해국으로 흘러온 난민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난민들 중 상당수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청해국의 안정을 위해 이들의 의식을 자신들의 나라에 맞게 새로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초기 자유국 시대에는 경제 발전보다는 국가 안정과 진보적인 법 제정, 그리고
국민들의 의식 개혁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1949년 청해국의 국군이 조직되었다. 국군은 5000명으로 구성되었고 남성들은 1년 동안 의무적으로
군대에 복무하게 했지만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대체복무제를 확대하는 등 법집행을 융퉁성 있게
실시하였다.
1950년 5월 간통죄 폐지에 이어서 10월에는 공창을 법적으로 합법화를 하고 매매춘 여성들을
정식 직업으로서 인정을 하였다. 매매춘 여성들을 착취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엄단하였음은
물론이었다.
1960년 8월, 이준에 이어 새로운 대표가 된 허정은 본격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실시하였다.
물론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경제개발을 실시하여 1차,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1년부터 실시된 3차,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1973년 터진 오일 쇼크로 경제 상황이 어려움에 처했다.
이에 허정 대표는 청해국의 경제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사업계와 노동계에게 고통분담을 하자고
한 뒤, 먼저 자신의 월급을 반으로 줄이고 특혜를 없애는 등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가졌다. 평의회
의원들과 공직자들 또한 자신의 월급 동결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처음에 고통분담에 반대했던 사업계와 노동계는 대표를 비롯한 공직자들이 고통분담에 나서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곧 고통분담을 함께하였다. 사업계는 노동자들의 월급을 동결하는 대신
노동자들을 함부로 해고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 정비에 나섰다. 노동자들 또한
직장 안정을 위해 월급 동결을 감수했다. 정부에서도 해고된 노동자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그리하여 1978년, 청해국은 경제 위기에서 확실하게 탈출한다.
그 뒤 1980년 8월, 허정에 이어 대표 자리에 오른 이명선은 5차, 6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행과 동시에 급변하는 세계 변화에 맞춰 개방적인 법을 많이 제정하고 실행하였다. 먼저
1981년 4월부터 투표권 연령을 만 18세 이상에서 만 16세 이상으로 낮추는 법개정을 했다.
그리고 1983년 10월부터 남성들에게 1년 가량 의무적으로 부과했던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하였다. 징병제하에서는 국군의 처우와 인권이 개선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1984년 1월부터 동성간에도 결혼할 수 있으며 동성부부가 원하면 아이를 입양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공식적으로 통과되어 실행되었다.
1988년 10월, 이명선에 이어 대표 자리에 오른 김공은 국가내의 인권 개선과 함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나갔다. 1992년 4월에 김공 대표는 기본적인 국가 체제인 청해 자유국에서
더 발전된 국가 청해민국을 만들어 가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이 투표율은 91.4%였다.
투표 결과 찬성 55%, 반대 45%로 2000년 8월 15일에 청해민국으로 국호 및 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새 헌법에 따르면 새로운 국가 청해민국의 대표는 임기 4년의 중임제로 하기로 했다.
마침내 2000년 4월, 새로운 국가 청해민국의 초대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많은 청해국의
시민들이 투표에 앞장섰다. 투표율은 92%를 자랑하였으며 투표 결과 혁명당의 정원익 후보가
51.4%의 득표율을 얻어 40.9%에 그친 민주당의 이대발 후보를 크게 이기고 청해민국의 초대
대표로 당선되었다.
2000년 8월 15일, 마침내 청해 자유국은 정원익을 초대 대표로 한 청해민국으로 새롭게 바뀐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정원익 대표는 전 김공 대표를 이어 인권 개선과 함께 해외 원조와
구제에 많은 힘을 쏟았다. 또한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민을 와 2004년 12월 현재 이민온 사람들 숫자는 44만명에 이른다. 청해민국도
이제 국제화가 진행된 국가로 본격적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2004년 12월 새대표 대선에서 혁명당의 정원익 대표의 뒤를 이은 이대용 후보가 63.2%의 득표율을
보여 27.3%에 그친 민주당 한정희 후보를 크게 이기고 청해민국의 제 2대 대표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이전 치루어진 4월 평의회 총선에서도 집권 혁명당이 평의회 의석 200석 중 110석을 얻어
전체 과반수를 확실히 넘어섰다.
그동안 청해민국의 인구는 청해 자유국 건국 당시 750만명에서 2004년 12월 현재 2,200만명까지
증가하였으며, 수도 청해특별시의 인구는 자유국 건국 당시 50만명에서 현재 500만명까지
증가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500달러의 개도국에서 2004년 현재 20,170달러로
증가하여 선진국 수준까지 소득 수준이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환경은 거의 파괴시키지 않는
친환경적인 개발을 중시하여 세계 환경지수도 50년 연속으로 10위 안에 드는 보기 드문
국가라는 칭송을 들었다.
새로운 한민족들의 국가 청해민국은 그동안의 우려를 씻고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청해민국은 더욱 더 발전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세계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첫댓글 즐감하시고 평가 많이 해주세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