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65 돐 한글날
9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제565돌 한글날 경축식이 열리고 있다.
한글날 경축식에서 포상을 받은 유공자들.
주한 외교사절 부인 등이 한글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2회 광화문 광장 휘호대회가 열리고 있다.
한글 휘호 작품들.
9일 오전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제18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가 열리고 있다.
9일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제1회 세종대왕 전국 한글휘호대회가 열려 참가자들이 정성스럽게 한글 휘호를 써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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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8월31일 주시경·김정진 등의 한글학자들이 만든 ‘국어연구학회’가 한글학회의 모태다. 1921년 12월 3일 주시경의 문하생 임경재, 최두선, 등 10여명이 '조선어 학회'를 창립,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고쳤다. 1933년 이 학회에서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오늘날까지
우리 국어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1935년 조선표준어사정회의 때의 조선어학회 회원들.
▲..1935년께 <큰사전> 편찬을 위한 1차 독회를 마친 조선어사전편찬회 사정위원들의 모습.
▲..큰사전 완성기념 사진...국어사전의 초석을 놓은 <큰사전>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작업을 시작한 지 28년 만인 1957년에 완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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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9. 포토뉴스 再揭)
‘잊혀진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박사 집념 끝 ‘최초의 한글사전’ 편찬 … 조선어학회 활동 주도…월북 후 관심 묻혀
| ♣ ‘물불’ 이극로(李克魯·1893∼1978·사진)박사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3시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며 한글학회가 후원하는 ‘잊혀진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에 대한 생애와 업적을 다룬 연구 논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박용규 이극로 연구소 소장(고려대 문학박사)는 “한글학자로서 제1인자는 최현배 선생을 들 수 있지만 이극로는 한글운동가로 더 큰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서 “이극로는 한글 연구보다 이의 운동에 치중해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고 한글을 대중에게 보급했다”고 말했다. 경남 의령 출신의 이극로박사는 17세에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난다. 1916년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수학을 거쳐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예과를 마치고 1922년 독일 베를린대학에 입학, 궁핍과 싸우며 5년간 학업에 몰두해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이 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 3년간 강의했다. 한글은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멸시당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글이라고 탄압받았다. 한글 창제 465년 만인 1911년 조선광문회 주시경, 최남선, 김두봉이 최초로 한글사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일제 탄압 속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나타난 이극로에게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이고 문화운동이며 계몽운동이었다.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한글사전 편찬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동지들과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등의 작업을 거쳐 16만 어휘가 정리된 사전 원고를 완성하고 조판에 들어간 것이 1940년 3월. 그러나 1942년 9월 5일 편찬원 정태진이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비밀 독립운동을 한다는 허위 자백서를 쓰고 만다. 잡혀간 회원은 27명. 참혹한 고문 속에 이윤재, 한징은 옥사한다. 이극로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 6월, 정인승 2년 등의 형을 선고받는다. 해방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조선어학회 재건에 착수, 애타게 찾던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한다.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을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째 찾아가서 책상을 치며 호통쳤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나라문화 기둥인 한글사전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놈에게 가서 사정하라는 말입니까!” 정진숙 등 을유문화사 간부들은 크게 감명받아 출판 결단을 내린다. 드디어 1947년 10월 9일 한글큰사전 제1권이 발행되었다(1957년 전6권 완간).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큰사전을 앞에 놓고 감개무량해 눈물을 흘린다. 조선광문회가 편찬을 시작한 지 37년 만이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최초의 한글사전을 갖게 된다.
“이극로의 물불 가리지 않는 무서운 추진력은 누구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불이라는 별명이 그의 호가 되어 버렸다.” 이희승의 회고다.
이극로는 1948년 월북 탓에 학계 관심에서 멀어졌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북한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및 박사,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편,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월북 전 주요논저로 〈조선어 임자씨의 토〉(1935)·〈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1936)·〈짓말에 대하여〉(1937) 등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7)·《고투 40년》(194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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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작사 ‘한글날 노래’
세종임금 한글 펴니 스물 여덟 글자 사람마다 쉬 배워서 쓰기도 편하다 슬기에 주린 무리 이 한글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려 갈거나.
온 세상의 모든 글씨 견주어 보아라 조리있고 아름답기 으뜸이 되도다 슬기에 주린 무리 이 한글 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러 갈거나.
오래 동안 묻힌 옥돌 갈고 또 닦아서 새 빛 나는 하늘아래 골고루 뿌리세 슬기에 주린 무리 이 한글 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러 갈거나.
(이 노래 (작곡자(?))는 옛날 국민학교때 우리들이 많이 불렀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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