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 곰취 채집
사월 하순 주말을 맞았다. 퇴직하고 3년째 접어든 봄날이 간다. 퇴직을 전후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몇 가지 변화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퇴직 직전 근무지가 거제로 부임했던 일이다. 지역 만기가 되어 창원 바깥으로 나가던 해에 내가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양산과 거제여서 불가피했다. 연고가 전혀 없는 낯선 곳에서 원룸에 지내며 남은 교직 생활 3년을 마무리 짓고 돌아왔다.
주중은 연사리 와실에서 보내고 금요일 저녁 창원으로 돌아와 일요일 점심나절 거제로 복귀함을 반복했다. 때로는 한 주를 걸러 뭍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부임 이듬해부터 2년간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모두가 겪어보지 못한 미답의 길을 걸었다. 코로나 첫해 봄 신학기를 늦춰 닫혔던 교문이 열려 아이들과 화상으로 만나기도 하면서 정년을 맞아 돌아오니 코로나가 진정되는 국면이었다.
교직 말년을 거제로 건너가 보내면서 섬 구석구석에 발자국을 남겼다. 새벽에 고현을 첫차로 출발해 갯가로 가는 버스를 타고 포구 해돋이를 보면서 서성이다가 학교로 출근하기도 했다. 비가 오던 새벽은 우산을 받쳐 쓰고 나갔다. 해가 길어진 날은 퇴근 후에도 알려진 산을 오르고 고개를 넘으면서 무념무상 걸었다. 멋진 바다 풍광은 물론 지명에 얽힌 전설을 음미해 보기도 했다.
그곳 근무 3년 동안 거제섬의 자연경관은 물론 인문 지리까지 꿰뚫었다. 거제는 생각보다 알려진 산들이 많았는데 산기슭이나 임도에 피는 야생화들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고현과 옥포의 두 개 대형 조선소로 특유한 신흥 유입 인구와 연관 산업 구조였다. 그와 함께 시골의 전통 촌락으로 가면 무슨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출향 인사로 알려진 이가 누구인지도 훤히 알게 되었다.
거제로 간 첫해 봄 어느 주말 창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섬에 머물며 국사봉 산행을 나섰다. 국사봉은 국내 다른 지역에도 같은 이름의 봉우리가 있는데 정상부 바위 더미가 관복을 입은 신하가 조정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형국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국사봉 산행을 나선 그날 거제 현지인들은 정상부 응달에 움이 트는 다래 순을 따느라 타잔처럼 매달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국사봉 하산길 등산로를 벗어난 산기슭에 내륙에서도 귀한 곰취 군락지를 발견했다. 곰취는 고산지대 낙엽 활엽수가 우거져 그늘진 부엽토에 자생하는데 그럴만한 서식 여건을 갖춘 장소였다. 그때는 철이 일러 잎을 완전히 펼치지 않아 훗날 다시 국사봉을 찾아 그 곰취를 고스란히 채집해 와실 냉장고에 채워두고 끼니마다 쌈으로 싸 곡차 안주로 삼아 먹고 창원 집으로도 가져왔다.
거제에 머물렀던 그 이듬해와 3년째 되던 봄에도 국사봉을 찾아 곰취를 따와 자연인과 진배없는 식도락을 즐겼다. 자연산 곰취는 채집 이후 두어 달 지나면 다시 복원되어 그 자리로 가면 수북하게 자라 채집이 가능함도 알게 되었다. 퇴직 이후 올해로 3년째인데 해마다 봄이면 거제로 곰취 채집 산행을 다녀옴이 연례행사다. 내가 발품을 파는 덕에 이웃에서도 곰취를 맛보기도 했다.
사월 끝자락 주말 날이 밝아오지 않은 어둠 속에 길을 나섰다. 창원대학을 출발해 신항만 용원으로 가는 첫차 버스 3006번을 탔다. 미명에 시내를 관통해 웅천을 거친 용원에서 부산경제자유구역청 앞으로 가 부산 하단에서 거제 연초로 가는 2000번 버스로 갈아탔다. 가덕도에서 침매터널을 벗어난 저도 연륙 구간에서는 진해만으로 드는 고깃배 물살과 무인도 바위섬이 드러났다.
지난날 머문 연초면에 닿아 야부마을을 거쳐 임도를 따라 큰 국사봉을 비켜 작은 국사봉으로 올랐다. 정글이 연상될 정도로 활엽수가 무성한 숲을 한동안 누벼 곰취 자생지를 어렵게 찾아냈다. 생태계는 해마다 달라지고 등산로에서 벗어난 곳이라 곰취를 찾기가 쉽지는 않아도 발품을 판 성과가 있어 싱그러운 곰취 잎을 따 배낭을 채워 숲을 빠져나오니 해는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2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