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도차이 04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반 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침투한 따가운 햇볕에 시원의 두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가늘게 뜬 시원의 부은 눈 틈사이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있었다. 얼마나 잠이 든 걸까. 문 밖으로 한 참을 서성이며 불러대던 시우의 목소리도, 출근을 닦달하던 시원의 엄마, 지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원은 신경질 적으로 커튼의 입을 닫았다.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었다. 기껏 해봐야 결근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전부지만. 짧은 한숨을 쉬던 시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커튼에 비춰지는 햇살이 아까보다 짙어진 것을 보니, 늦은 오후로 넘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도 누워있고, 엎드려 있던 탓에 찌뿌둥함을 느낀 시원은 허리를 굽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관심도 안 가지던 휴대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6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잔 것 같았다. 지연에게는 이미 12통의 부재중이 찍혀 있었고, 시우와 지은에게 몇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감흥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놓는 시원. 곧 방을 나섰다. 그리 짙지 않은 어둠이 가라앉은 주방으로 시선을 돌리자, 식탁에는 물 컵이 금이 간 채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 미쳤다, 유시원.”
시원은 지연에게 큰 소리 쳤던 오전을 곱씹으며 이마를 감쌌다. 매번 이렇게 피할 수 없는 노릇이고, 오늘의 일을 어떻게 뒷감당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다. 이마를 감싸던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내려다보자, 오전에 베인 두 번째 손가락에 피딱지가 두껍게 굳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웅과 헤어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이별 한 여자에게 찾아온 후유증은 시원에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힘들어 하고 울고불고 하면 뭐가 달라져? 난 절대 너랑 헤어져도 힘들어 하지도, 울지도 않을 걸?’
시원은 오래전에 우스갯소리로 지웅에게 말했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까짓 알지도 못하면서 잘도 그런 말을 뱉어댔다. 이렇게도 힘들 줄 알았으면, 헤어지자고 좀만 늦게 말할 걸 그랬다. 혼자 마음 정리 다 하고, 이제 헤어져도 되겠다 싶을 때. 그때 말할 걸 그랬다. 시원은 멍하니 거실에 서서 주방을 바라보고 있다가도,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을 향하여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우체국입니다.”
문을 열자, 시원의 이름이 적힌 노란 봉투를 건네는 택배기사. 발신자는 다름 아닌 경찰서였다. 본인 확인을 하고 나서야 택배기사는 돌아갔고, 시원은 의아한 마음에 재빠르게 봉투를 뜯어보았다. 잃어버렸던 지갑이 들어있었다. 지갑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아주 잘 됐다. 가벼운 미소 위로 시원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메말라있었다. 푸석푸석한 피부에 갈라진 입술. 눈은 잔뜩 부어 있었고, 머리는 어떤 모양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소파로 걸어가 쓰러지다시피 앉았고, 지갑은 오른편에 무심히 던져놓았다. 그때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아! 21만원!”
도통 정신없을 때라,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약속한 날짜도 지나가 버렸다. 벌떡 일어난 시원은 곧바로 방에 들어가, 그날 입었던 바지를 찾기 시작했다. 옷장을 뒤지고 행거에 아무렇게나 걸려 진 옷들을 들춰보지만 그날 입은 바지가 없다. 빨래실로 달려가, 설마 하는 마음에 확인 해보자, 역시나 그 바지는 잔뜩 축축해진 채로 널려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자, 이미 영수증이 종이 고유의 모습으로 잔뜩 젖은 채 글씨와 하나가 된 뭉탱이로 발견되었다. 완전 날강도 사기꾼으로 알고 있겠군. 방으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간 시원은 휴대폰을 열었다. 역시나 모르는 번호로 연락 온 것은 없었다. 까먹은 건가? 왜 하루나 지났는데 연락이 없지? 휴대폰 번호를 잘못 적어준건가?
“모르겠다. 왜 이래 진짜, 유시원.”
정말 모든 게 엉망이다.
* * *
어느새 집안 곳곳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곳은 시원의 방이었다. 어째서인지 시원은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시간은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상태였고, 집은 시원 외엔 인기척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리자 시원은 기다렸다는 듯 귀에 가져다 댔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양말 한 쪽이 삐뚤어진 것도 모른 채.
“응, 아빠.”
[챙겨놨어? 미안해, 딸. 마음 안 좋을 텐데, 아빠가 심부름 시켜서.]
“괜찮아. 바람이나 쐬지, 뭐. 호텔로 가면 되요?”
[응. 갑자기 임직원 교육이 잡혀버릴 게 뭐람. 얼마나 걸릴까?]
“택시 타고 갈게. 지금 가면 한 10분 정도 걸릴 것 같네.”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와. 아빠 로비에 있을 테니까.]
시원의 아빠인 형석의 전화였다. 이미 지웅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주 상세하게 시우를 통해 듣게 되었다. 물론 지웅이 바람피운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됐다면, 아마 형석은 지웅과 경찰서에서 시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형석의 간략한 생필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집을 나선 시원은 다행히도 오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엔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다. 곳곳에 보이는 추억 가득한 장소들을 지나치며 시원은 무표정하게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호텔에 도착한 시원은 빠른 발걸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로비에서 시원을 기다리고 있던 형석은 그런 시원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왔어?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
“아침 안 먹었다며. 점심은 먹은 거니? 아빠가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전화를 못했어.”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아빤 교육 언제 가는데?”
“응. 곧 직원들이랑 시작할 것 같아. 내일 바로 출근이고.”
“무슨 교육이 야간이래.”
“한 두 번이냐. 24시간 업무인 만큼 그런 게 없지.”
시원의 머리를 쓰다듬는 형석의 손길에 시원이 제법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쇼핑백을 건넸고, 형석은 턱짓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밥 먹고 갈래? 구내식당은 아직 운영 하는데.”
“아냐, 괜찮아. 엄마랑 2차전 준비 해야지.”
아무렇지 않게 장난스럽게 하는 시원의 말이 형석에겐 아프게 와 닿았다. 지연이 유달리 시우를 편애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워낙 자기주장 강한 지연의 고집과 생각을 꺾을 수 없기에 형석은 시우보다도 시원에게 더 잘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투정 부려도 될 나이에 굳은 소리 안 하고 올바르게 자라준 시원이 그저 기특하고 고마웠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얼른 가야하는 거 아냐, 아빠?”
“응? 어. 그래. 조심히 갈 수 있지? 택시 타고 가. 알았어?”
“응. 알았어. 내일 봐요. 교육 잘 받고.”
로비에서 간단한 인사로 형석과 헤어진 시원은 입구로 향했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위로 시원의 발걸음이 느릿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택시정류장으로 향하던 시원은 무언가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
시원의 시선 끝엔 그때 본 예쁘장한 여자와 건너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지웅이 있었다. 저쪽에서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갈 수 있는 목적지라곤 NS호텔 하나였다. 방금 시원이 나온 그 호텔. 시원의 아빠가 근무하는 그 호텔 말이다. 거길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기가 막혀 그 자리에 멈춘 채로 그 두 사람을 응시하는 시원. 지웅의 얼굴이 환했다. 분명히 나를 보며 웃었던 표정과, 행동. 그 옆에 내가 있던 저 자리엔 다른 여자가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또 다시 잠잠했던 가슴이 미어졌다. 곧 초록불로 바뀌고, 두 사람이 점차 가까워졌다. 꺼진 가로등으로 인하여 지웅은 아직도 시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야 할까. 욕이라도 한마디 날려줘야 할까.
“이봐요.”
수많은 생각에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누군가 익숙한 어투로 시원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시원은 두 눈이 커졌다.
“21만원 입금 확인 안됐던데?”
며칠 전 호텔에서 신세를 지게 된 남자였다. 차키를 손가락에 건 채로 빙빙 돌리던 남자는 시원의 얼이 빠진 모습에 짧은 한숨을 쉬며 성큼성큼 시원의 앞에 섰다. 시원한 향수냄새가 시원의 코를 찔렀고, 그제야 뒤늦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던 시원은 누군가의 낯익은 인기척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어느새 지웅이 그 여자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무척 놀란 얼굴의 지웅이 시원을 뚫어져라 보더니, 곧 시원 옆에 선 남자를 쳐다봤다. 시원의 곁에선 볼 수 없었던 남자였다. 여자는 어리둥절했고, 남자 역시 지웅과 시원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시원은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래?”
여자는 지웅을 향해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지웅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원은 옆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인기척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이 남자에겐 이런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입을 여는 시원.
“NS호텔 가는 거야? 가면 아빠한테 인사 해. 오늘 야간교육 있으시거든.”
시원의 말에 지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의치 않고 시원의 말은 계속됐다. 이번엔 지웅이 아닌 그 옆의 여자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불과 이틀 전까지 지웅의 여자친구였던 유시원이라고 합니다.”
역시나 여자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시원과 지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생긋생긋 웃던 예쁜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졌다. 시원은 말을 계속했다.
“그쪽이랑 바람 피는 거 들켜서 헤어졌어요. 근데 전 그쪽 원망 안 해요.”
“뭐라고요…?”
“얘랑 나 10년을 알았고 6년을 연애했거든요. 그동안에 몰랐던, 또한 앞으로도 모를 뻔 한 쓰레기 같은 모습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유시원.”
지웅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시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차갑다. 딱딱하다. 생전 처음으로 시원을 그렇게 불렀다. 시원의 표정에 순간 다른 감정이 비춰졌지만,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왜? 나는 둘이 합의 하에 나 두고 바람핀 줄 알았는데, 여자 분은 모르고 계셨나보네?”
싱글 웃어보이던 시원이 문득 내려다 본 지웅의 손엔 여자의 가녀린 손목이 잡혀있었다.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시원이 앞에 있는데도,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이 곳에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한 나머지, 허탈한 한숨과 함께 시선을 결국 다른 곳으로 돌린 시원. 코끝이 시큰해지려는 그때, 시원의 어깨에 무게가 느껴졌다.
“아, 이 사람이었구나.”
다름 아닌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남자의 팔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며 다정한 눈빛에 따스한 미소까지 지으며 시원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시원은 커진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고, 지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제대로 자세를 고쳐 서서는 지웅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석현이라고 합니다. 일단 시원이 썸남이라고 해두죠.”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시원은 석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석현은 시원의 어깨에 두른 팔을 풀고는 수트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웅에게 건넸다.
“NS호텔 자주 가시나 봐요? 오늘은 원하신다면 VIP룸으로 안내해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석현이 지웅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NS호텔 명함카드였다. 지웅은 무심하게 명함을 내려다봤다. ‘대표이사 남석현’ 순식간에 지웅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석현의 얼굴엔 보란 듯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석현과 시원을 번갈아 보던 지웅이 그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썸남?”
지웅의 질문에 시원은 얼빠진 얼굴로 지웅을 쳐다보았다. 지웅이 그 표정을 알아채기 전에 지웅을 향해 말하는 석현.
“썸남 몰라요? 썸타는 남자. 시원이랑 썸을 타는 남자. 그게 바로 나. 명함도 드렸는데. 더 소개 필요해요?”
“지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언제부터 시원이 옆에….”
“그걸 왜 궁금해 하죠? 궁금해 할 사이 아닌 것 같은데.”
석현의 말에 지웅이 입을 다문 채 시원을 쳐다보았다. 시원은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했고, 지웅은 뭐라도 시원이 직접 말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시원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궁금한 거 다 끝났으면 갈 길 가시죠? 우린 너무 바빠서.”
씨익 웃어보이던 석현은 다시 시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바로 옆에 주차 되어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보조석의 문을 직접 열어서 시원을 태웠고, 휘파람을 불며 운전석에 올라 탄 석현은 시동을 걸고는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멀어져가는 차량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웅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옆에서 여자가 무어라 다그치는 것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원이 눈앞에서 굉장한 남자와 떠났다.
* * *
고요한 차량 안에선 조금 전과는 상반 되는 정적이 흘렀다. 휘파람을 부르던 모습도, 싱긋 웃어보이던 모습도 볼 수 없는 석현은 그저 백미러를 보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원은 석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왜 끼어든 거지? 왜 온갖 오버를 하면서까지 내 편을 들어 준거지?
“저 세워주셔도 되요.”
시원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던 석현은 바로 도로가에 차를 멈춰 세웠다.
“왜 그랬어요?”
“뭐가요?”
“왜 굳이 썸남이니 뭐니 하면서 그 상황에서 왜 그러셨냐구요.”
“참 이상한 여자네.”
“…제가요?”
“항상 고맙다는 말보다 화를 먼저 내요?”
석현의 말에 시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맞는 말이었다. 분명히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할 생각이었는데 영수증을 잃어버렸고, 석현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은 지웅의 반응만 생각하느라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보다는 끼어들어서 일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더 컸다. 말없이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시원.
“뭐, 본의 아니게 끼어든 건 미안한데. 아 좀 괘씸하잖아요.”
“…….”
“바람 피는 것들은 상종하면 안 되거든. 그래서 내가 대신 상종해준 것뿐이에요.”
아리송한 석현의 말에 시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석현이 도와준 것이 어느 정도 지웅에게 타격이 있었던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시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엊그제 일도 그렇고, 오늘도 감사해요.”
“그걸로 입 닦는 건 아니죠?”
“아, 영수증을 같이 세탁을 해버리는 바람에 계좌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시 알려주시면….”
“아버님이 우리 호텔에서 근무하시나 봐요?”
“네?”
그제야 생각났다. 지웅에게 내민 명함. 이 남자는 시원의 아빠, 형석의 상사였다. 그것도 대표이사! 말조심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시원.
“아… 네.”
“성함이?”
“유 형자 석자에요. 유형석 과장님.”
“아, 유과장님 따님이구나?”
“저희 아빠를 아세요?”
“아니요?”
뭐야….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시원의 눈빛에 피식 웃어 보이는 석현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입을 열었다.
“술이나 한 잔 할래요?”
“네?”
“택시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마시진 말고, 그냥 간단하게.”
“제가 왜요?”
“21만원 대신이라고 생각해요. 완전 쿨하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시원은 입을 다물었다.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인 석현은 익숙하게 핸들을 쥐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데요? 우리 아빤 잘못 없잖아요. 21만원을 왜 대신해서 술 한 잔이랑 바꾸는데요.”
불안한 듯 안전벨트를 꼭 쥐며 정면을 직시하는 시원의 말에 석현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유과장님 잘못 있대요? 그냥 그날 술에 그렇게 만취할 만 했구나, 싶어서.”
시원이 석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이드 미러와 정면을 주기적으로 번갈아 볼 뿐, 석현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누구나 흑역사는 있잖아요. 그 흑역사는 목격자 또는 피해자가 있기 때문에 생성되는 거고. 난 목격자 겸 피해자로서 오늘부터 그걸 이해할 수 있게 된 거고. 그땐 뭐, 나도 기분이 안 좋아서 감정적으로 대한 것도 사실이고. 그냥 그렇다고요.”
“그게 무슨….”
석현이 처음으로 시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래 경험자만 알 수 있듯이, 유시원씨를 이해하는 마음에 술 한 잔 사겠다고요.”
그 말끝으로 시원과 석현사이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석현의 말엔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네온사인 가득한 번화가를 지나쳤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쌩판 모르는 남자의 차를 타고 술을 마시러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저 우스운 시원은 곧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왠지 석현이 더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첫댓글 ㅎㅎ 멋진 석현과 러브모드 기다리께요 ㅋㅋㅋㅋ 아휴 시우같은 동생 혹은 오빠 있음좋겟내요ㅠㅠㅠㅠ
감사합니다^^ 다음편 업로드 되었으니 다음편도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01 23:4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08 17:34
재밌게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편 업로드 되었으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03 09:1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08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