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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ost 비격진천뢰
1583년 1월, 경원부 아산보 번호 추장 우을지(慶源府 阿山堡 藩胡 酋長 迃乙知)는
"전 만호(萬戶) 최몽린(崔夢麟)이 번호를 침학(侵虐)한다."고 소문을 내면서
부근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만호 유중영(萬戶 柳重榮)은 이런 모의(謀意)가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통사 한옥(通事 韓玉-통사는 통역관)과 토병(土兵) 몇 명을 보내어 정탐(偵探)하게 했는데,
우을지가 그들을 잡아서 심처(深處-백두산 이북에 조선조정과 관계를 맺지 않은 여진부족)에
보내고
무리지어 야간(夜間)에 아산보를 기습(奇襲)하니 이것이 니탕개(尼蕩介)의 난(亂)의 시작 이었습니다.
최초의 공격을 받은 아산보는 계원장(繼援將-지원부대장) 이성현감 이지시(利城縣監 李之詩)가
겁에 질려있던 유중영 대신 용맹(勇猛)하게 성 위에서 맞서 싸워서
성 위에 올라온 여진족(女眞族)을 격퇴(擊退)하고 보존(保存)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상황은 경원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1월 26일, 경원부사 김수(慶源府使 金璲)와 판관 양사의(判官 梁士毅)는
아산 토병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경병(輕兵-가볍게 무장한 병사)을 인솔(引率)하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가 여진족를 쳐서 토병을 구출(求出)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 번호들이 모반(謀叛)하는 사정을 정탐하지도 않았고
거추(巨酋)들이 무리들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보고(報告)를 가볍게 여긴 상태에서 쳐들어갔으니
여진족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역습(逆襲)하여 군량미(軍糧米),군수품(軍需品),인마(人馬)를
모두 뺏았아 조선군은 전멸(全滅)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훈융진 내금위 백윤형(訓戎鎭 內禁衛 白允衡)이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포위를 뚫어
간신히 김수와 양사의는 탈출(脫出)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일 뒤인 1월 28일, 우을지가 규합한 여진기병 10000여 기(騎)가 경원부성(府城)을
포위공격(包圍攻擊)함으로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습니다.
이때 경원부사 김수와 경원판관 양사의는 각자 구역을 맡아 방어하기로 되어 있었고
서문장 전 만호 이봉수(西門將 前 萬戶 李鳳壽)가 적세를 망보고 있었는데
이봉수가 적세의 성대함에 겁먹고 달아나니
서문(西門)을 지키던 군사(軍士)들도 역시 도망치기 시작했고
여진족들이 서문을 통해 성 안으로 난입(亂入)하여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입한 여진족들은은 성안의 사람들을 살상(殺傷)하여
시체가 성안을 가득 차고, 유혈(流血)이 성 안에 흘러 넘치게 만들었으니
이 과정에서 정병 오한춘(正兵 吳漢春)은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여진족 속으로 들어가
겹겹으로 포위된 속에서 자기 아버지를 빼내어오다가 함께 죽었습니다.
이외에도 여진족은 남녀노소(男女老少)와 소·말·닭·개와 관청(官廳)에서 간직한 물건과
감옥(監獄)에 갇혔던 여진족들을 모두 다 노략질하여 챙겼습니다.
하지만 김수가 군사를 이끌고 군기고(軍器庫)와 창고(倉庫),관아를 지키며
힘을 다해 적에게 활을 쏘아대며 대항하여 여진족 40여급을 베니
여진족은 경성의 군사시설을 범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양사의는 자신이 맡은 구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지 않고 남몰래 향교(鄕校)로 들어가서
구멍속에 몸을 숨기고 두려워서 감히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니
그의 방지기(房直-심부름꾼,조선왕조실록에선 그의 첩妾이 납치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가 또한
적에게 약탈당해 가면서 울부짖었으나,
그는 끝내 숨은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1월 29일, 여진족은 경원 창고의 식량을 노리고 남녀 모두 우마를 데려온 상태에서
다시 경원부를 포위하였습니다.
이때 온성부사가 휘하의 정예 군사와 군관들로 경기병부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데리고 앞장서서 경원성을 구원하러가니
이때 여진족은 성을 세 겹으로 포위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온성부사는 조선군을 성 위에 쭉세워 놓고 활을 정신없이 쏘게 하고
적장(敵將) 중에 백마(白馬)를 탄 자가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돌격하여
보루(保樓)로 쳐오르는 것을 보고 한 개의 화살로 쏘아 죽이니
여진족은 기세를 잃고 물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경원은 보존될 수 있었으나
도호부(都護府)였던 경원이 한때 여진족에게 함락되어 유린된 일은 파장이 컸습니다.
종성(鍾城)의 여진족 율보리(栗甫里)와 회령(會寧)의 여진족 니탕개(尼湯介) 등은
우을지가 보낸 전통(箭通-화살통)을 받고 우지개가 같은 소리로써 내응(內應)하여
일시에 모두 조선을 배반하니
무용(武勇)이 뛰어난 온성부사(穩城府使)에게 승복(承服)한 온성(穩城)의 번호를 제외한
경원(慶源)·종성(鍾城)·회령(會寧) 등 진(鎭)의 많은 번호들이
조선을 배반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니탕개는 이 난을 통해 6진 주변의 여진족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한편 조선조정은 경원부의 패배 책임을 물어 선전관 이극선(宣傳官 李克善)을 보내
경원부사 김수와 경원판관 양사의를 2월 26일 해시(亥時-오후 9시~11시)에 참수(斬首)하고
처형 집행을 3일간 연기시킨 함경북병사 이제신(咸鏡北兵使 李濟臣)을 파직하여
평안도 의주 인산진(平安道 義州 麟山鎭)에 충군(充軍) 시켰습니다.
한편 김우서를 함경북도 방어사로 임명하고 경원부사에 임응룡(任應龍)을 임명하여 보내고
(이로부터 약 2개월 뒤인 4월 7일에 경원부사는 전라수사 이일로 교체 되게 됩니다.)
오운(吳沄)과 박선(朴宣)을 조방장으로 임명하고 80명의 군대
(선조수정실록은 8000명이라고 기록하였으나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이이가 병력 확보를 위해 노력한 것을 볼 때 80명이 맞는듯 하고
8000명은 잘못 표기되거나 나중에 증원된 병력으로 봐야할 듯 합니다.)를 보내 지원케 하였으며
경기감사 정언신(京畿監司 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右參贊 兼 都巡察使)로 삼고
이용(李鷛)을 함경남도 병마사(咸鏡南道 兵馬使)로 삼아
6진을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경원부(慶源府)에서 서울에 왔던 번호(藩胡)들을 돌아가는 길에 잡아서
함흥부(咸興府)에 가두고
그들의 부형(父兄)으로 하여금 반란에 가담했던 오랑캐들을 잡아 속바치도록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변사(備邊司)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양 중이던 전 병사 임진(兵使 林晉), 전 첨사 이숙남(僉使 李淑男),
전 부사 양사준(府使 梁思俊), 전 첨사 유옥(兪沃), 전 현감 이정서(縣監 李廷犀),
전 만호 송전(萬戶 宋荃) 등을 풀어주고 함경도 방어에 투입시켰습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지원군이 오기전에 6진은 여진족에게 계속 침략당하고 있었으니
경원부에서 재미보고 세력(勢力)을 규합(糾合)한 여진족은 건원보(乾原堡)를 포위공격하였는데
부령부사(富寧府使) 장의현(張義賢)이 힘껏 싸워 격퇴했으나
여진족은 2월 9일에 경원의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충차衝車와 판교板橋)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성(城)의 연대(烟臺-봉화대)를 허물고
사면(四面)에서 성을 매섭게 공격하니,
훈융첨사 신상절(申尙節)과 종성판관 원희(鍾城判官 元熹)가
밤낮으로 항거(抗拒)하며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으며
화염(火焰)과 연기가 하늘까지 솟아오를 정도로 거세어지고 여진족은 장성문(長城門)을 철거하여
장차 훈융진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온성부사가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대가
유원첨사 이박(柔遠僉使 李璞),군관(軍官) 차정(車禎),김경유(金景裕)와 함께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망의 중앙을 뚫고 여진족 진영에 치돌(馳突)하니
이번에도 온성부사는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에 온성부사의 얼굴을 알아보는 여진족 병사들이 서로 말하기를
‘온성영공(穩城令公)이다!’하면서 활을 휘두르거나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온성부사는 여진족 격퇴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쫓아가니
훈융진을 지키던 신상절의 군대도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온성부사의 군대와 합세하여 기세(氣勢)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여진족 70급(혹은 50급)을 베고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으며
곧바로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부락까지 쳐들어가 소굴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한 여진족 여인이 군진(軍鎭)에 다가와 목숨을 구걸(求乞)하니
그녀의 외모(外貌)가 매우 아름다워 군사들이 차마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는데
온성부사가 군사들을 꾸짖으며 그녀를 참(斬)하고 말하길
"이 년은 요물(妖物)이니라!"라고 하니
병사들이 그의 엄격함에 감복(感腹)하였습니다.
니탕개의 난 초기 온성부사는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여진족과 맞서싸워
경원부와 훈융진의 함락을 막았으니
이러한 전공(戰功)을 세운 온성부사의 이름은 신립(申砬) 이었습니다.
여진족은 훈융진 공격에서 패퇴하고 그들의 소굴까지 소탕당하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6진을 침략하여
이번에는 경원의 안원보(安原堡)를 공격하니
공격에 나선 여진족 수가 너무 많아 들판을 가득채우자
권관 이우춘(權管 李遇春)과 조전장 우림위 김진경(助戰將 羽林衛 金震經-제승방략에선 조전장을
북병사 이제신이었고 김진경은 우림위로서 참전했다고 기록 하였습니다.)
등 안원보를 지키는 조선 장수들은 모두 성을 굳게 지킬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입이 바야흐로 아산(阿山)을 구원하러 가다가 안원을 경유(經由-지나감)하게 되었는데,
성을 넘어 도망하는 토병(土兵)을 발견하고 즉시 목을 베어 깃대에 매달아 조리돌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鎭正시키고 군사들을 성(城) 위에 세운 다음에
북을 쳐서 사기(士氣)를 돋우니,
여진족은 신립이 안원보에 나타나 후원(後援)하는 군사가 있음을 알고 물러가버렸습니다.
그 후에 이제신은 안원의 성이 작고 외로운 군사와 잔열(殘劣)한 병졸(兵卒)로써
끝까지 지탱할 수 없다고 하여 병력을 거듭 경원부로 철수시키니
안원보의 창고(倉庫)의 곡식을 미처 경원으로 옳기기 전에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성(城) 안으로 난입(亂入)하여 민가(民家)에 불을 지르고
노소(老少)의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사로잡아 가고
창고(倉庫)의 곡식과 우축(牛畜-소와 각종 짐승)을 모두 노략질해버렸습니다.
(아산보는 일부 기록에 의하면 이무렵에 일시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여진족이 또 하수호(下守護)를 거쳐서 옛 건원참(乾元站)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인민(人民)과 우축(牛畜)을 다수 노략질하여 가버렸는데
그 과정에서 여진족은 아무런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아서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당시 경원진(慶源鎭)이 함락된 뒤에 6진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安正)되지 아니하였는데,
여러 보(堡)에 주둔한 여러 장수(將帥)들은 거대한 여진족에 눌려
그들의 침략을 관망(觀望)하고 위축(萎縮)되어서
각각 스스로 외롭게 성(城)을 지키며
어느 한 사람도 군사를 내보내어 적을 추격하여 깨뜨리는 자가 없었으니
함경북도 우후 이인길(北道虞候 李仁吉)의 경우 여진족의 세력이 성대함에 겁이나서 숨어다니느라
여진족 무리들이 횡행하여도 한번 성에서 나와서 쳐부수지 못하여 군기를 흐리고 있었고
심지어 후방지역이었던 길주의 경우에는 길주목사 이난수(吉州牧使 李鸞壽)가
북병사로부터 군대 징발(徵發)의 격소(檄召)를 받고도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지 않고 모르는 채 길주에 눌러앉아 있을 정도로
6진의 조선군은 압도적으로 불리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쟁없이 100년 이상을 지내온 터라
군사들은 그저 성벽(城壁)이나 지키면서 마치 먼 거리의 과녁을 맞추는 것처럼 활만 쏘아댔고
혹시라도 적이 육박전(肉薄戰)을 하며 성에 올라오기라도 하면
모두 겁에 질려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온성부사 신립이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벌이며
싸울 때마다 공을 세웠으니
그는 평소(平所)에 철기(鐵騎) 500여 명을 훈련(訓鍊)시켜
두만강을 따라 사냥을 하며 전술(戰術)을 익히게 하고
연안(沿岸)에서 치돌(馳突)하는 연습을 시켜서
그의 기병대를 인근 여진족들이 와서 구경할 정도로 바람처럼 재빠르고 날랜 수준으로 만들어
그 결과 그의 군대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적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 이었습니다.
이에 다른 군사들도 비로소 분발(奮發)하여 이에 과감하게 야전(野戰)을 벌여
여진족과 맞서싸우게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육진(六鎭)을 보전하여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은
신입이 앞장서서 용맹(勇猛)을 떨쳤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립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수천에서 수만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는 여진족과 달리
6진의 조선군은 수도 적은데다가 각 진(鎭)에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열세(劣勢)였고
이러한 6진을 지원할 중앙군(中央軍)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으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여진족의 공격으로부터 6진이 보존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2월 16일, 북병사 이제신은 온성부사 신립,부령부사 장의현(富寧府使 張義賢),훈융진첨사 신상절,
종성판관 원희(鍾城判官 元熹)와
군관(軍官) 김우추(金遇秋),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변국간(卞國幹),권홍(權洪) 등
장사(將士)들을 선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험애(險崖)한 곳에서 공격하거나 혹은 여진족 선봉(先鋒)을 공격하고
혹은 그 굴혈(窟穴)을 혼란(混亂)시켜서 꼼짝 못하게 얽어매도록 하면서
여진족을 두만강(豆滿江) 너머로 쫓아내고
마침내 군사들을 세 길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게 하고 여진족 부락들을 공격하니
신립ㆍ변국간 등은 금득탄(金得灘)ㆍ안두리(安豆里)ㆍ고중도(古中道)ㆍ중도(中島) 부락
4백 50여 굴(窟)을 불지르고 백여 급(조선왕조실록은 150급으로 기록)을 참획(斬獲)하였고
신상절ㆍ원희 등은 마전도(麻田島)를 불지르고 50여 급을 참획하였으며,
김우추ㆍ장의현ㆍ이종인ㆍ유중영ㆍ권홍 등은 상가암(尙加巖)ㆍ우을기거(于乙其車)ㆍ
여읍포도(汝邑浦島)ㆍ우을기내(于乙其乃)ㆍ다통개동(多通介洞) 등 80여 굴을 불지르고
수백 급(조선왕조실록에는 65급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을 참획하니
조선군은 금득탄,안두리,자중도(者中島)·마전오(麻田塢)·상가암,우을기(于乙其)·거여읍
(車汝邑)·포다통(浦多通)·개동(介洞) 등 여러 부족의 소굴의 쌓아둔 식량과 무기를 불지르고
여진족 약 300여 급을 벤 뒤 군사를 온전히 보존한 채 돌아왔습니다.
이 공세로 타격을 입은 여인족은 한동안 대규모 침공을 하지 않았으나
여진족이 적대행위와 도발(挑發)을 그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조선조정은 계속 증원군과 물자(物資)를 6진에 보내며 예의주시(銳意注視) 하였으니
조선 조정은 1583년과 1584년에 전국(全國)에서 무과 별시(武科 別試)를 여러 번 실시하여
그때마다 선발된 무사(武士)들을 6진에 보냈고
니탕개의 난 동안 6진에 최소 쌀 100000섬에 포(布) 50000필 이상을 6진에 공급(貢及)하였습니다.
1583년 4월 말~5월 초, 조선군의 맹공(猛攻)으로 잠시 주춤했던 니탕개는
다시 거병(擧兵)하기를 꾀하여
먼저 2000여기(騎)의 기병들을 종성 두만강가에 모아놓고
기병 10여명으로 강을 건너게 하니 조선군이 활을 쏘아 1명을 사살하고 말을 빼앗자
여진족들은 물러났습니다.
이에 니탕개는 정예기병(精銳騎兵) 10여 명을 보내어 중도(中島)에서
바로 삼봉동(三峯洞)의 농막(農幕)으로 들어와서조선 백성과 가축을 약탈하면서
조선 측 전세를 수탐(搜探-수사하고 정탐함)하였습니다.
그로부터 5~6일 뒤인 5월 5일,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는
20000여명(제승방략에는 10000여명으로 기록하였습니다.)의 기병을 거느리고
산골과 산봉우리를 거쳐 3개 길을 따라 종성(鍾城)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이에 함경북병사 김우서는 종성 남문에서 지휘(指揮)하며
우후 장의현(虞候 張義賢), 종성판관 원희, 군관 권덕례(權德禮) 등
기병과 보병 1백여명(제승방략에선 150명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을
두만강 여울의 요해지(要害地)에 보내 한참동안 도강하려는 여진족과 싸우게 하였으니
종성 별시위 김희령(鍾城 別侍衛 金希齡)이 활을 쏘아서
먼저 강(江)을 건너던 백마(白馬)를 탄 여진족을 맞춰서
물에 거꾸러뜨려 죽게 만드는 전공을 세웠으나
여진족은 강을 지키는 조선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깃발을 한 번 흔들어 일제히 장궁을 쏘아대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강을 건너니
그 수가 너무 많아 강물의 흐름이 막힐 정도 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과부적의 상황이 된 조선군은 패배하여 급하게 말을 달려 종성으로 퇴각하니
장의현과 원희는 어려움을 겪다가 몸을 빼내어서 도망하여 서문(西門)으로 들어갔으나,
권덕례는 그의 말 현황(玄黃-병들어 쇠약해진 말)을 타고 있어서 도망하지 못하고 피살되어
여진족에게 목을 베이고 몸이 찢겨져버렸고 최소 10여명 이상의 조선군이 전사했습니다.
이때 종성 봉수군 한양(鍾城 烽燧軍 韓揚)은 화살이 몸에 박혔는데도 불구하고
쳐들어오는 여진족에게 돌입하여 자기 아비를 구해 돌아와
훗날 선조 임금으로부터 포상(褒賞)을 받았습니다.
(한양의 일은 구체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적중에서 아버지를 구출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마 이 전투때 발생한 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군을 종성으로 쫓아낸 여진족은 장성(長城)에서부터 금산(禁山) 밑에 이르기까지 배치되어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2색 깃발을 꽃고 하루종일 성을 공격하였고
한편으로 기병을 나누어 응곡(鷹谷)의 동쪽 지역과 풍삼리(豊三里)와 종성부 앞 들판에 보내어
농민(農民)들과 민가(民家)의 가축(家畜)을 수색(搜索)하여 노략질하였습니다.
종성은 김우서(金禹瑞)의 지휘 아래 수성전(守城戰)을 펼쳐니
해가 저물자 여진족은 노획한 것들을 챙겨 물러났습니다.
김우서는 허락하지 아니하자
유영립이 몰래 원희에게 영을 내려(제승방략에 의하면 원희 스스로 판단하였다고 합니다.)
기병장 김사성(騎兵將 金嗣成)과 함께 동문(東門)을 열고 나가게 하여 여진족 5급을 베어 왔는데,
김우서는 오히려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원희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습니다.
이튿날 여진족이 또 와서 포위하여 한바탕 싸워 일진일퇴 (一進一退)하다가
해가 질 무렵 여진족이 일제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군은 성 위에서 지키기만 할 뿐 가만히 있다가
여진족이 성 밑에 잔뜩 모여들자 일제히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난사(亂射)하여
철환(鐵丸)을 빗발처럼 퍼부으니 여진족은 급히 성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날 활용된 승자총통의 효과는 조선 조정에 보고되어
승자총통을 개발한 김지(金墀)는 1583년 6월 13일에 포상을 받았습니다.)
이때 온성부사 신립(穩城府使 申砬)이 영건보(永建堡)에서 적변(賊變)을 듣고
안길[內道]을 따라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소암(嘯巖)에 올라가서 관병(觀兵-전투 상황을 살핌)하니
여진족도 정탐하는 신립을 보고 조선 후원군(後援軍)이 오는 줄로 알게 되었고
때마침 니탕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진족 효정(孝汀)이 니탕개가 부락을 비운 것을 알고
그의 부락을 공격하여 불태워버리니
다급해진 니탕개의 군대는 창황(蒼黃)하게 후퇴하여 물러나고
신립의 군대는 두만강까지 그들을 추격(追擊)하여 멀리 쫓아내니
비록 니탕개의 군대가 3개 둔(屯)으로 나누어서 1∼2둔이 차례로 강을 건너고
최후의 1둔은 말을 달려 빨리 건너는 바람에 조선군은 크게 전과를 세우지 못했으나
신립은 강가에서 여진족 2급(級)을 베고 말 2필(匹)을 빼앗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김우서가 사람을 시켜 신립을 성으로 맞아들여 서로 만나보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응하지 않았고 그의 군대는 북치고 피리 불면서 성을 지나쳐 가버리니,
김우서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우서가 겁을 잘내고 계책計冊이 없다고 하여 그를 좋지 않게 여겼는데
신립도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후에도 5월 13일에 여진족 기병 1000여기가 다시 종성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조선군에게 패퇴(敗退) 당했으며
5월 16일에 여진족은 동관진(潼關鎭)과 방원보(防垣堡)을 포위공격하니
이때 방원보 공격에만 투입된 여진족 기병이 5000여기나 되었으나
만호 최호(萬戶 崔浩)가 조전장 이천(李薦)·이영침(李永琛) 등과 함께
강한 쇠뇌[弩]로 사격(射擊)하니,
여진족은 기세가 꺾여 패퇴하고 그 결과는 동관진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은 포기하지 않고 5월 19일에 다시 수만 기(數萬 騎)의 병력으로
동관진을 포위공격했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1583년 5월경 율보리가 지휘하는 여진족 기병 수만 기가 동관진을 습격하였는데
첨사 정곤僉使 鄭鯤과 조전장 박선助戰將 朴宣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고 기록하였으나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은 매일 종성과 회령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사람을 납치하고 물건을 훔쳐가는 등
도발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83년 6월 말~7월 초, 유원첨사 이박(柔遠僉使 李璞)과
건원보권관 이순신(乾原堡權管 李舜臣),일부 여진족이 계략을 세워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건원보로 유인했다가 잡아 죽이고 그 목을 동소문(東小門)에 걸어 놓으니
우을기내는 바로 니탕개의 난을 선동(煽動)했던 번호 추장 이었습니다.
이에 선조 임금은 기뻐하여 공을 세운 군관들과 여진족에게 포상하였는데
북병사 김우서가 조정에 이순신이 사전 승인(事前 承認)없이 함부러 군사을 움직였다고 장계를 보내어
이순신은 포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우을기내가 1587년에 순변사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잡혀 죽어서 이순신이 죄를 사면 받고 유명해졌다고 기록하였으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둘 중 하나가 잘못되거나
우을기내라는 동명이인의 여진족이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최소한 니탕개의 난을 선동한 우을기내가 조선군에게 잡혀 죽었고
이순신이 우을기내를 잡아죽일 때에 공을 세운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우을기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서
7월 말에 율보리와 니탕개가 지휘하는 여진족 20000여기가 방원보를 포위공격 했으나
만호 최호와 조방장 이발(助防將 李潑)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성 위에서 힘껏 싸워
여진족을 저지(抵止)했고
여진족이 방원보에서 쩔쩔 매는 동안
종성부(鍾城府)에서 우후 장의현(張義賢)과 판관 윤담(尹湛) 등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방원보를 구원하러 와서 여진족을 공격하자 이에 방원보의 조선군도 성문(城門)을 열고 나와
여진족을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퇴하였습니다.
그 퇴각하는 여진족을 조방장 이발이 추격하여
수급 1급을 베는 전공을 세우고
고령첨사 변기(高嶺僉使 邊璣)와 방원보 복병장 윤안성(伏兵將 尹安性)은
이 전투에서 각각 수급 2급씩 얻었습니다.
1583년 1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반년동안 여진족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動員)하여
6진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나
아무런 소득(所得)을 얻지 못했고
그동안 조선은 중앙과 다른 도에서 정예병(精銳兵)과 물자들을 징발(徵發)하여
속속 6진에 집결(集結)시키며 정벌(征伐)의 기회를 노리게 되니
이에 여진족은 점점 승산(勝算)과 이익(利益)이 사라져가는 이 전쟁(戰爭)에 대해
회의감(懷疑感)이 들면서 조선을 배반(背叛)한 것을 후회(後悔)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을 배반하고 6진을 공격하였던 번호들은 다시 조선에 귀부(歸附)하고 납관(納款)하였으며
율보리와 니탕개는 멀리 도망쳤다가 다시는 세력을 회복(回復)하지 못하고 몇 년 후에 죽었습니다.
이 니탕개의 난을 통해 가장 크게 부각된 인물은 신립이었는데
그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신출귀몰하게 위기에 빠진 성들을 구원하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상대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엄청난 위험을 감수(堪受)해야하는 것 이었습니다.
(니탕개의 난때 6진에서 활약했던 조선군 장수 중에 김응상金應祥이 있었는데
그도 6진을 누비며 용감히 싸우다가
패퇴하는 여진족을 쫓던 도중 화살을 맞고 거기에 등창까지 터져 전사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로서 싸운 신립의 활약은
그와 맞서싸웠던 여진족에게 있어 온성영공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조선에 있어서는 당대의 명장이자 국사무쌍(國士無雙)이었으니
당시 선조 임금은 신립을 한신(韓信-한 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을 도와
초패왕 항우楚覇王 項羽와 그의 제후諸侯들을 격파한 명장,
어려운 시절 불량배의 바짓가랑이를 기어간 일부터 시작하여
국사무쌍,다다익선多多益善,토사구팽兎死狗烹 등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습니다.)과
백기(白起-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때 진秦나라 장군으로서 6국을 상대로 상승常勝하여
70여개 이상의 성을 공취攻取하고 840000명 이상의 적을 살육殺戮한 명장이었는데
그가 승리한 장평전투長平戰鬪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 입니다.)와
같은 부류(部類)로 평가했으며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의 귀신들(실제로는 작자 윤계선尹繼善의 평가였을 것입니다.)은 그를
장료(張遼-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나라 장군으로 합비合肥에서 800명의 군사로
100000명의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군대를 격파하고 오나라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어
오나라 지역 어린아이들은 장료의 이름만 들어도 울음을 그쳤다고 합니다.)
와 이목(李牧-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 장군으로서 흉노匈奴를 방심放心하게 하여
침공을 유도誘導하고 쳐들어온 흉노 100000명을 섬멸殲滅하여 그들을 멀리 쫓아내었으며
임호林胡와 동호東胡를 격파하여 북방을 안정시켰으며
진나라의 공격 또한 수차례 막아낸 조나라 최후의 명장)에 비겼습니다.
1583년 1월 말~7월 말 6진 전황도(六鎭 戰況圖)
붉은색 실선은 여진족의 침략 방향을 나타냅니다.(단 여진족의 소굴 위치는 임의로 설정한 것임.)
파란색 실선은 조선군의 기동방향을 나타냅니다.
노란색 실선은 온성부사 신립의 군대의 기동방향을 나타냅니다.
초록색 실선은 번호 효정의 공격방향을 나타냅니다.(단 효정의 번호 위치는 임의로 설정한 것임.)
각 진의 전황 설명
회령부
1583년 1월 말,회령부 소속 번호 니탕개가 경원 아산보 소속 우을기와 음모를 꾸밈
2월,경원부 함락이후 우을기,율보리 등과 함께 조선을 배반.
2월 16일,
회령부는 니탕개의 난 동안 여진족의 대공세를 겪진 않았으나 여진족이 소규모로 자주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납치하는 도발을 자행함.
방원보
1583년 5월 16일,여진족 5000기가 공격을 하였으나 만호 최호의 조선군이 강노를 난사하여 격퇴함.
7월 말,니탕개와 율보리의 여진족 20000기가 다시 대규모 공격을 하였으나 만호 최호의 조선군이 막아내고 우후 장의현이 지휘하는 종성 조선군과 함께 격파함.
종성
1583년 4월 말~5월 초, 여진족 기병 2000기가 종성 두만강가 출몰, 여진족 10여기가 삼봉동으로 진출하여 약탈 및 정찰 실시.
5월 5일, 여진족 20000기가 대규모로 도강하고 강가 요해지에서 저지하던 우후 장의현의 조선군 패퇴시킴.종성포위전. 일부 여진족은 응곡과 풍삼동과 종성 앞 들판 약탈.
5월 6일, 종성포위전. 저녁무렵 종성 조선군이 승자총통 난사하여 여진족을 격퇴하고 온성부사 신립의 구원군이 여진족을 강 너머로 축출함. 번호 효정의 공격으로 니탕개의 소굴 소각.
5월 13일, 여진족 1000기가 종성을 다시 공격했으나 패퇴함.
동관진
1583년 5월 16일, 여진족이 동관진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에게 패퇴함.
5월 19일, 여진족 수만 기가 동관진을 다시 공격했으나 조선군에게 패퇴함.
훈융진
1583년 2월 9일,여진족이 훈융진을 충차와 판교로 공격. 훈융진첨사 신상절이 대항하였으나 장성문이 철거되고 성의 봉수대를 무너졌으며 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함락직전에 몰림. 온성부사 신립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도착하여 적장 사살. 여진족이 후퇴하자 신립의 군대와 신상절의 군대가 추격하여 여진족 소굴까지 불태우고 귀환함.
경원부
1583년 1월 28일, 우을기의 여진족 10000기가 경원성을 포위공격. 서문장 이봉수가 겁먹고 달아남. 여진족이 서문을 통해 경원성 진입. 경원부사 김수가 힘껏 싸워 여진족을 저지하였으나 경원판관 양사의는 향교 구덩이에 숨음. 여진족이 경원부를 약탈하고 돌아감.
1월 29일, 여진족이 다시 경원성을 포위공격. 온성부사 신립이 경기병을 데리고 급히 와서 성 위에서 맞서싸움. 신립이 적장을 사살하자 여진족이 퇴각함.
안원보
1583년 2월 중순, 여진족이 안원보를 공격하자 안원보의 장수들이 여진족의 수에 겁먹어 싸움을 포기하려함. 온성부사 신립이 아산보를 구원하러 가다가 안원보에 이르러 도망병을 베고 성위에서 전투준비함. 여진족이 그것을 보고 구원군이 왔다고 판단하여 퇴각함.
2월 중순, 북병사 이제신이 안원보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병력 철수시킴. 식량이나 주민들이 아직 피난을 다 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진족이 안원보를 침략하여 식량과 주민들을 가져감.
건원보
1583년 2월 초, 여진족이 건원보를 공격하였으나 부령부사 장의현의 조선군이 격퇴함.
2월 중순, 여진족이 옛 건원참의 식량창고를 공격하여 약탈함.
아산보
1583년 1월, 우을지의 여진족이 아산보를 야간에 기습. 만호 유중영은 겁 먹고 숨었으나 이성현감 이지시가 성 위에서 맞서싸워 여진족을 격퇴함.
2월, 여진족이 아산보를 공격.(일부기록에 의하면 아산보가 이무렵에 함락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국역 제승방략
사기열전-회음후(한신),백기,염파,인상여 열전
신립청변비
달천몽유록
서애집
규장각한국학연구원(지도제공)
첫댓글 신립의 리즈시절이군요
신립이 기마병은 잘 이끌이죠...
아름다운 여진여인이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는데 왜 죽여
22 신립 게이설
그 전에 민간인 살해... 상황이 상황이긴 했지만, 무력한 여인네를 죽여서 뭘 한다고... 물론 그 여인네가 조선을 공격한 부족의 여인이긴 했지만...
멍청한놈! 아름다운 여진여인이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줘서 처로 삼아야....?
헑헑헑헑 승자총통 난사 헑헑헑헑
우리 조상님들은 역시 예나 지금이나 "포"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포방부 포방도감...
승자총통은 포보단 총에 가까운 무기 였습니다만 확실히 조선시대의 국방의 상징은 화약무기 입지요.
게임스샷인가..?
무슨 게임인가요호..?
기마병에게 승자총통을 부착하면
하앍..!?
잘 봤습니다.
찰목합:신립의 리즈시절(잘 나가던 시절)입지요.
gksmf(하늘):저당시 조선 기병들은 기창돌격보단 기동사격을 좋아했기에 신립의 군대는 특별한 존재 였습니다.
알프스아이스:저랬던 신립이 왜구가 침입했을 때 싸우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민의 딸을 첩으로 삼습니다. 타국녀에겐 차가운 무인이지만 자국민에겐 따뜻한 남자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신립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 입니다. 아 적국녀우 냉혈한, 아국녀우 훈남자.(申砬曰 我 敵國女于 冷血悍 我國女于 薰男子.)
무장공비:종성 전투에서 활용한 승자총통의 효과가 좋아서 1583년 6월 13일에 조선 조정이 승자총통을 만든 김지에게 포상을 내렸습니다.
근데 수급의 숫자가 좀 작은 거 같은데 수급이라 함은 대게 전공의 의미도 강하니 일본에서처럼 궁시나 화포에 의한 사상은 뺀 순수 백병이나 돌격으로 얻은 것을 말하는 건가요?
화이트캣:동원된 게임 스크린 샷은 엠파이어즈 돈 오브 더 모던 월드와 라이즈 오브 네이션스 입니다.
엠파이어즈엔 승자총통으로 무장한 조선 기병이 나오긴 합니다.
치우승천:신립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진 여자 때문에 군대의 안전이나 전투력 발휘에 해가 될까봐 제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의 엄한 성격을 감안해서 말하자면 이때부터 그의 거친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화루:아무래도 무장의 전공만 보고 된 듯 합니다. 조선의 수급제도는 격살이든 사살이든 간에 죽인 적병의 목을 베어 상관에게 바치면 수급의 귀를 잘라 조정에 바쳐 보고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