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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불멸의투사
“산넘어 물건너 홀로 가는 지사의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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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2년여 동안 살았던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 초입의 입간판. 이 곳에서 단재는 장남 수범을 얻었고, 『조선사통론』 등 역사연구작업을 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
‘중국의 냄새’
나는 베이징을 냄새로 기억한다. 항공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의 몸을 휘감겨 들던 이질적인 냄새의 추억은 질기다. 그 냄새는 항공유의 자극도, 중국 음식의 향내도 아닌, 거름냄새와 가스냄새가 뒤섞인 듯한 낯선 것이었다. 냄새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나 엄청난 언어의 빈곤을 경험할 것이다. 내게 냄새는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표현하기에는 난감한 것이다. 처음 냄새를 통해 중국을 경험한 것이 1997년 1월 16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중국의 냄새’라고 부르곤 했다. 낯선 풍광에 자극 받기 보다, 냄새에 의해 이국의 정취를 느끼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험일까? 그 이후 나는 히드로 공항이나, 나리타 공항에서도 코를 킁킁거리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냄새는 호흡과 동시에 감각되는 것이기에 무차별적이다. 공기 중에 미립자가 한 인간의 기억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베이징 공항은 낯선 공기, 이질적인 냄새로 나의 정서적 변화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2001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중국의 냄새’는 더 이상 나를 엄습해오지 않았다. 베이징 공항에서 내려 베이징시내로 가는 택시 안에서 창문을 내리고 연신 코를 킁킁거렸건만, ‘냄새의 추억’은 간곳을 종잡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베이징, 그것은 현대화의 징후일까?
내가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지난 6월 1일 밤 9시경이었다. 홀로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면서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모른다. 나는 이방인이며, 경제적 출혈만 감내한다면 3박 4일간 베이징의 휴일을 즐길 수 있다.’ 잠시 잠깐, ‘민족문학연구소’의 일행을 찾아가지 말고 그냥 베이징의 낯선 호텔로 스며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3박 4일의 단독 왕복 항공권은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일행이 묶고 있는 ‘연산호텔’로 향하면서, 나의 내면에서 솔직히 울린 유혹의 목소리가 어디서 연유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일상의 피로감이다.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나면, 방심하기 마련이다. 연신 휴대전화를 걸어 다른 운전기사에게 ‘연산호텔’의 위치를 문의하는 택시기사의 분주함이, 이곳이 베이징임을 실감하게 했다. 베이징은 나를 ‘역사속의 나그네’가 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베이징의 골목길, 후퉁(胡同)
‘한국 근대문학과 북경’라는 테마의 학술 답사는 6월 1일부터 4일까지 베이징과 하북성 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0명의 국문학 박사들로 구성된 민족문학연구소(소장: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최근 활발한 저술활동과 학술행사를 주최하는 젊은 연구자들의 단체다. ‘한국 근대문학과 북경’이라는 테마를 통해 ‘북경의 도시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노력의 근간에는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한 문학인’을 현장에서 재인식하려는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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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 안쪽의 허름한 쪽방들. 골목에 즐비한 문을 들어서면 쪽방 형식 |
6월 2일 이른 아침, 단재 신채호의 행적을 안내하기 위해 최옥산 선생(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한국어계 교수)이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다. 조선족 학자인 최옥산 선생은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인하대학교에서 「문학자 단재 신채호론」으로 2003년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단재 신채호 권위자로, 베이징에서의 신채호 행적 복원을 위해 골목길을 수도 없이 걸었다고 한다.
“베이징의 작은 골목들은 후퉁(胡同)으로 불린다. 후퉁은 명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한 명칭인데, 원래는 몽골어 우물(水井)의 차용어이다. 베이징에는 수천 개의 후퉁이 있는데, 신채호가 살았던 후퉁을 찾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후퉁들은 베이징 시내 곳곳을 뒤져 밝혀낸 곳들이다.”
단재 신채호가 중국으로 망명한 시기는 1910년 4월 8일이었다. 신채호는 칭따오(靑島)에서 ‘향후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신민회 간부들간의 치열한 격론을 벌인 후, 베이징,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한일합방 바로 직전에 중국으로 망명해, 나중에야 조선의 식민화 소식을 들은 신채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때의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으니 돌아갈 땅이 없어진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산을 넘어 물을 넘어/홀로 가는 지사의 마음/우리 곧 아니면 동정할 이 누구냐?”(「새벽의 별」 부분)라고 읊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으리라.
단재의 짧은 행복 - 챠오떠우후퉁
신채호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띠안먼통따지에(地安門東大街)에 북편에 위치한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이었다. 자금성의 북동편에 위치한 챠오떠우후퉁은 베이징 지리를 잘 알 수 있는 이들만이 찾을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주변에 큰 건물로 북경중의의원(北京中醫醫院)이 있고, 근처에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모순(茅盾)의 생가가 있다.
챠오떠우후퉁에 들어서는 순간 베이징 시내에 옛 풍광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른 편에 긴 담장을 거느린 채 500미터에 이르는 골목길이 직선으로 늘어서 있고, 왼편에는 회색의 허름한 단층집으로 들어서는 대문들이 즐비했다. 신채호는 챠오떠우후퉁에서 1921~22년까지 2년여 동안 생활했다. 그 때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시 「가을 밤에 회포를 적음」에서는 망명객의 애수가 절절히 살아 있다.
외로운 등불 가물가물 남의 시름 같이 하며
일편단심 다 태울 제 내 맘대로 못할러라.
창 들고 달려나가 나라 운명 못 돌리고
무질어진 붓을 들고 청구 역사 끄적이네
이역 방랑 10년이라 수염에 서리 치고
병석에 누운 깊은 밤에 달만 누각에 비쳐드네
고국의 농어회 맛 좋다 이르지 마라
오늘은 땅이 없거늘 어디다 배를 맬꼬
- 「가을 밤에 회포를 적음」(1922) 전문
(신채호, 『백세 노승의 미인담(외)』(김주현 책임편집), 도서출판 범우, 2004, 250쪽에서 인용.)
흔들리는 등불에서 신채호가 읽어낸 자신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창과 붓’ 사이를 오가며 토해내는 자괴감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이 시기 신채호는 챠오떠우후퉁에서 『조선사통론』 등 역사 저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재는 민족의 역사기술을 통해 민족 정신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문화적 개화를 통해 ‘일제의 군사․경제적 힘’을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학인(學人)의 마음은 세월의 풍상 속에서 끊임없이 마모되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창 들고 달려나가 나라 운명’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회의도 날로 강화되는 일제의 힘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현실에 대해 회의해야 하는 학인(學人)의 의지와 즉각적인 실천을 행하고자 실천적 행위자(行爲者)의 의지가 바로 이곳 챠오떠우후퉁에서 충돌하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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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은 500미터 가량 길게 뻗어 있다. 안내를 맡은 최옥산 선생(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한국어계 교수)은 “챠오떠우후퉁 시절이 그래도 단재 신채호의 망명기 중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 서영인 문학평론가 |
단재 신채호가 망명 생활중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활동과 더불어 고대사 연구에 몰두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청구 역사’를 끄적인다고 가볍게 읊은 내용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낭가사상(郎家思想)’을 주창하며 『독사신론』 작업의 연장에서 『조선상고사』 기술 작업으로 나아갔던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민족사 서술을 통해 독립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당시 근대적인 역사서술이 노정하고 있는 ‘사대주의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미답지로 남아 있었던 고대사에 주목했다. 고대사 기술에서 나타난 신채호의 태도는 공격적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중국 동북3성 지역을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로 설정하고, 한반도의 주종족을 ‘부여족’으로 상정해 대고구려주의를 표방했다. 영웅사관적 민족주의를 통해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단재의 마음은 ‘강력한 자강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1922년 당시, 10년의 망명 생활 동안 수염은 점점 흰색으로 변해가건만, 조국 광복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으리라. 망명객의 생활은 여행자나 유학생의 한시적인 외국 체류와는 질이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망명자에게 고향은 조국이 해방되거나, 자신의 신념을 접고 변절하지 않는 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고향의 농어맛이 그립더라도, 이미 그곳은 ‘상실의 땅’이기에 쉽사리 미련을 두어 흔들려서는 안되었다.
번지수 없는 망명객의 고단한 삶
챠오떠우후퉁은 단재가 살았던 당시의 풍경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최옥산 선생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곳을 먼저 방문했다. 단재가 중국 망명 생활 중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골목길 모습이 변화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차분히 거닐면서 단재의 흔적을 더듬어 보라. 이 곳 어느 허름한 단층집에서 단재가 마흔 두 살 나이에 얻게 된 맏아들 수범의 출산을 기뻐했을 테니말이다.”라며 방문의 배경을 설명했다. 챠오떠우후퉁은 단재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두 번째 부인 박자혜와 결혼해 살림을 하던 곳이다. 이 곳은 또한 단재가 한문으로 된 월간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한 곳이어서 의미가 더 각별하다.
『천고』는 현재 북경대 도서관 희귀본 서고에 일부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귀국 후 자료를 조사하면서, 『천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고』는 독립운동사 연구와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열람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상태다. 『천고』는 1920년대 초반의 독립운동 소식 및 국내외 사건에 대한 논설을 담고 있다. 게다가 단재가 왜 고대사 연구에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가 하루 속히 국내 연구자들에게도 공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일행에 소설가 김인숙씨가 동행했다. 김인숙씨는 2002년부터 중국과 인연을 맺어 현재는 베이징에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을 돕고 있다. 능숙한 중국어로 일행의 부러움을 샀던 그가 우연히 챠오떠우후퉁에 있는 문화재인 ‘승왕부(僧王府)’에 기거하는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김인숙씨는 ‘집주인이 먼저 내게 작업을 걸어왔다’며 즐거워해 주위를 훈훈하게 했다. 집주인의 안내로 들어서게 된 가옥의 내부는 의외로 넓었다. 내부는 베이징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사합원(四合圓) 구조였다. 사합원은 가운데 마당이 있고, 건물이 마당을 사면으로 둘러싼 형식이다.
항상 가난한 살림을 꾸려야 했던 단재 신채호가 이렇게 넓은 집에서 기거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추측이었다. 사합원 형식의 집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대문 앞편에 쪽방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세대 주택을 통과해야 한다. 그 다세대 주택의 한 쪽방에서 신채호가 두 번째 부인 박자혜와 신혼살림을 꾸렸으리라. 하지만, 정확히 어느 집에서 단재가 생활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수가 없다. 신채호는 챠오떠우후퉁, 따헤이후후퉁(大黑虎胡同) 등 자신이 기거한 골목의 이름은 밝혔지만, 번지수는 그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다. 이는 망명객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안한 삶의 긴장을 견뎌야 했던 ‘이국의 방랑객 단재’의 일상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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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가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살았던 따헤이후후퉁(大黑虎胡同)의 입구. 사진의 우측 위편에 골목의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
아나키스트의 길 - 따헤이후후퉁
원·명·청 시기에 베이징의 일상은 새벽5시에 쫑러우(鐘樓)에서 울리는 ‘아침종’으로 시작되어, 저녁 7시 꾸러우(鼓樓)에서 울리는 ‘저녁북’으로 끝을 맺었다. 베이징의 오래된 전통은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자금성을 떠나면서 중단되었다. ‘꾸러우(鼓樓)’는 근대 이후 베이징의 아픔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1900년 의화단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 8국 연합군이 베이징과 텐진을 침입했다. 이때 이화원이 파괴되었고, 일본군에 의해 꾸러우의 북은 갈가리 찢겨졌다. 그래서 베이징 시민들은 꾸러우를 ‘밍츠러우(明恥樓)’라고 부르며 일본에 대한 분노를 아직도 되새기고 있다.
꾸러우 동쪽 맞은편에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이곳이 ‘따헤이후후퉁(大黑虎胡同)’이다. 민족문학연구소(소장:김재용, 원광대 교수) 연구원을 포함한 20여명의 연구자들이 이곳을 찾은 때는 6월 2일 오전 11시 경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궁핍한 시절을 견뎌내며 아나키즘 운동과 연관을 맺었던 곳이 바로 이 조그만 골목길 어름이다. 단재는 1922년부터 1924년 초까지 이곳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리스청(李石曾), 리따쟈오(李大釗) 등과 교우하며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구상했다.
챠오떠우후퉁에서 서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따헤이후후퉁의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골목의 폭도 눈에 띠게 좁고, 건물 외벽도 허름해 빈곤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단재도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따헤이후후퉁에서 힘겨운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 시기 단재는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아내 박자혜와 장남 수범을 환국시키고 홀로 남아 역사 연구작업을 지속했다. 그 때의 답답한 심경을 단재는 리 따쟈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라 운명의 절박함을 통곡하고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더니, 벌써 정세는 더욱 틀려지고, 기회는 더욱 멀어져 안타깝게 부질없이 머리만 어루만지는 동안 어느덧 사십을 지났습니다”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명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은 김원봉의 간청을 단재가 수락해 ‘민중 직접 폭력혁명론’을 주창하고 있다. 신채호는 ‘내정 독립’ ‘참정권이나 자치운동’을 비판하면서 ‘민중 직접혁명론’을 의열단 노선으로 정립했다. 이는 엘리트에 의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중을 독립운동을 지지한 것이고, 더불어 약자가 강자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으로 테러리즘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즈음 단재는 확실히 아나키즘에 매력을 느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신채호는 ‘조선혁명 선언’에 국가․민족이라는 용어보다는 ‘민중․사회’라는 용어를 더 빈번히 사용하며, ‘민중직접혁명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이는 아나키스트적 인식을 드러내는 어휘 사용법이다.
답사안내를 맡은 최옥산 선생(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한국어계 교수)은 이곳이 점차 베이징 재개발의 여파로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2005년에 이뤄진 베이징 증축로 개통공사로 인해 골목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버렸고, 이미 사라진 골목의 어느 집에서 단재는 고단한 삶을 영위했을 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가장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곳이 빈민가이고, 변하는 순간 가장 급격하게 변화하는 곳도 역시 빈민가이다. 이 곳 따헤이후후퉁의 운명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재개발의 폭풍이 몰아치는 순간, 이 골목도 1922년부터 1924년까지의 흔적은 좀처럼 찾을 수 없는 ‘몰역사적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조선혁명선언’의 마지막 구절인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라는 어구의 울림이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꿈 하늘」의 산실 - 진스팡지에
신채호의 행적을 더듬는 마지막 장소로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진스팡지에(錦仕坊街)다. 이곳은 1914년 경 단재가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와 처음 생활의 터전을 잡았던 골목이기도 하다. 진스팡지에는 명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자금성의 서쪽 북해공원 옆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 큰 건물로 인민의원과 라마교 백탑사가 있는데, 그 맞은편 골목이 진스팡지에다. 단재는 이시영의 권유로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919년 초봄 상하이로 다시 떠날 때까지 이곳 진스팡지에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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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헤이후후퉁(大黑虎胡同)에서 단재 신채호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 시절의 고 단했던 풍경을 증언하듯 아직도 이곳은 허름한 외양을 간직하고 있다. ⓒ서영인 문학평 론가 |
우리 일행이 진스팡지에에 도착한 때는 식사 시간 무렵이었다. 조그만 가게들이 골목입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중국 서민들의 식사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중국 만두인 지아오쯔(餃子)와 면음식인 미엔티아오(面條)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 음식을 먹는 이들로 분주했다. 이들은 낯선 복장의 이방인이 디지털카메라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골목길로 접어드는 모습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몇 명은 우리 일행에게 접근해 어디서 왔는가를 묻기도 했다. 가이드를 맡은 조선족 박홍래씨는 “우리가 한국인이라서 이들의 눈길이 부드러운 거에요. 만약에 일본인이라면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도 있죠”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점심식사를 하러 온 듯한 세명의 젊은이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뿌 쟈오(不照, 찍지 마세요)’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얼굴 표정은 유쾌해 보였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거리인 듯 했다. 이곳 진스팡지에의 어느 한 집에서 기거하며, 신채호는 조선사 관계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상고사』를 구상했으리라. 신채호 소설의 대표작인 「꿈하늘」(1916)을 집필한 곳도 이곳 진스팡지에다. 「꿈하늘」은 단재 자신이기도 하고, 조선의 개개 민중이기도 한 ‘한놈’이 등장해 국난을 이겨낸 역사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을지문덕, 풍신수길, 강감찬 등이 정신적인 싸움을 벌이는 환상적 알레고리로 채워져 있다. 화랑정신을 민족정신의 근간으로 세움으로써,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는 진취적 역사의식을 세우려 했던 단재의 열망이 이 소설에는 녹아들어 있다.
「꿈하늘」을 생각하며, 골목에 깊숙이 들어서니 초입에 위치한 가게들로 인한 분주함이 가신다. 그런데 골목 안쪽은 옛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재개발이 완료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고층 빌딩이 이미 들어서 있었고, 골목은 허리가 잘린 채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를 안내하던 최옥산 선생은 그나마 남아 있는 진스팡지에의 초입 풍경도 수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거리 저쪽까지 서민 가옥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고층빌딩이 들어섰어요. 그나마 신채호가 살았던 1910년대 후반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 골목 초입 주변도 몇 년 내에 사라질 것 같아요. 저 건물 보이시죠? 곧 철거될 거라고 하네요.” 연구원들은 이제 곧 사라질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고 분주했다. 옆쪽의 2층 건물은 곧 철거될 것처럼 허름한 모습이었다. 신채호의 대표적 업적인 『조선상고사』의 산실이며, 「꿈하늘」의 집필 현장은 어디쯤일까? 이 거리가 없어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서면, 신채호가 살았던 1910년대 후반 베이징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더욱 난망해지리라.
역사는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나는 신채호의 베이징 망명 시절을 재구성하는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두 아들과 부인의 삶이 궁금해졌다. 장남 수범과 차남 두범, 그리고 부인 박자혜 여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귀국한 후 자료를 조사하면서, 또 다시 가슴 서늘해지는 슬픔을 느껴야 했다. 안타깝게도 차남 두범은 1942년에 열네살의 어린 나이에 영양실조로 사망했고, 부인 박자혜 여사도 해방전인 1944년 병으로 인해 세상을 등졌다. 장남 신수범씨는 단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선린상고에서 쫓겨나 한성상업을 간신히 졸업했다고 한다. 자신이 배움이 짧다는 것을 한탄했던 신수범씨는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에 헌신하다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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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스팡지에(錦仕坊街)는 단재 신채호가 이시영의 권유로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와 자리잡은 곳이다. 이 곳에서 두 번째 부인 박자혜 여사를 만났고, 「꿈하늘」도 집필했다. 사진의 오른편에 보이는 2층 건물은 곧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
장남 신수범씨가 기억하는 생전의 단재의 모습은 단편적이다. 다만, 중학교 1,2학년 즈음 ‘신채호 뇌일혈 의식 불명’이라는 전보를 받고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으로 향했던 것에 대해 가슴 아프게 증언했다. 1936년 2월 20일, 뤼순감옥에 도착해 면회를 신청했으나 면회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면회가 성사되지 못했다. 그 다음날인 1936년 2월 21일 순국하셨으니, 올해가 단재 선생 서거 70주기가 되는 해이다. 신수범씨는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다 일제의 검문에 의해 유골이 헤쳐진 것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1910년에 망명한 단재 신채호가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고향인 청남 청원군 남성면 안장이 거부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면장이 같은 신(申)씨 여서 겨우 가매장을 할 수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면장은 일제에 의해 파면당했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단재 신채호는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이던 1936년 고향에 안장될 때 가묘를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를 포함한 무국적, 무호적 독립운동가는 200∼300명에 달한다. 이들의 국적 회복을 위한 ‘국적법 개정안’이 아직도 국제사법위원회에 계류중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고대사 연구에 헌신한 단재 신채호와 그 두 자녀의 삶은 현대사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다. 단재가 선택한 길은 일제 강점기에 보편적인 길이 아니었다. 이병도와 같은 친일 역사학자는 단재 신채호와 상반되는 길을 걸었고, 아직까지도 한국 역사학계에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병도는 조선 총독부 중추원 산하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하면서,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 간행에 관여했다.
새삼스럽게 이병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의 두 손자인 이건무, 이장무 때문이다. 2003년, 차관급으로 승격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병도의 손자 이건무씨가 임명되더니, 지난 5월 11일에 또 다른 손자 이장무교수가 서울대 총장 후보 선거에서 최다 득표자로 선정되어 교육부에 추천되었다. 현재 교육부총리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의 임명만을 남겨 놓은 상태라고 한다. 할아버지의 친일 행적만으로 인사에 불이익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이장무 서울대 총장 후보에게 한 가지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 강점기 조부 이병도의 행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입장을 정확히 밝혀 달라.”
영양실조로 사망한 신채호의 둘째 아들 두범과 학업이 짧음을 한탄하며 일생을 살았던 장남 수범. 그리고 친일파 이병도의 손자인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이장무 서울대 총장 후보. 두 가계의 극단적으로 엇갈린 운명이 한국 근현대의 단면을 증언하고 있어 마음속에 모래 바람이 이는 듯하다. 더불어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과연 신채호와 이병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역사는 항상 기억하는 이들만을 위해 존재해 왔다. 지금 이 시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역사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