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봉에만 쓰는 편지 / 이정록
편지를 멀리한다 싶어
편지봉투를 한 꾸러미 사놨건만.
편지는 쓰지 않고 부위 봉투로 다 써버렸다. 흰 종이 띠만
남았다. 이곳을 빠져나간 봉투는 아무도 본인 답장이 없었구나.
그가 남긴 一家가 인쇄된 영수 통지나 보내왔구나
갈수록 賻儀란 한자가 반듯하게 써진다. 꼿꼿하게 잘 나온다.*
쓰는 김에 몇 장 더 써놓을까? 흠칫 놀랄 때 많아졌다.
편지봉투를 묶고있던 종이 띠에, 수갑처럼 양손을 끼워 넣는다.
손가락도 묶지 못하고 툭 끊어진다. 슬픔이나 설렘 없이
편지봉투를 꺼내는, 내 손에서 屍臭가 났다
편지봉투가 떨어져서 공무용 흰 봉투에 쓴다. 봉투 가장자리에
남빛 지느러미가 인쇄돼있다. 亡者는 지금쯤 어느 먼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까, 문득 공용봉투가 수족관처럼 느껴진다
죽어
賻儀로나 한 번
돈 봉투를 받는구나
그것도 관용 봉투로 받는구나
봉투만 보고도 뜨끔하지나 않을까. 영정 안의 눈초리를 피해
부조함에 떨군다. 부조함 안에서 물방울 소리가 난다.
어망에 든 조기 떼처럼, 부조함 속에서 살 비비고 있을 흰 봉투들.
火葬을 마치고 물속에 들면 비늘 좋은 조기나 될거나.
새벽 세시, 상주 먼저 지느러미를 접고 바닥에 눕는다
지하 영안실이 물 빠진 수족관 같다
화투 패처럼 가라앉는 남은 자의 비늘들
* 정진규의 시 '나의 봉투쓰기'에서 빌림
- 이정록 시집 <의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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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의자>는 '신의 은총'이 일상의
현실에 어떤 모습으로 내리는지 시적 언어로 증거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신의 음성이나 모습은 장엄한 배경음악을
깔고 구름사이로 상서로운 빛을 내뿜는 할리우드 영화장면 같은
과장된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어둠과 고린내 속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고 떠받들다보니 저도 모르게 닳고닳아
반질거리는 낡은 구두 뒤축에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드러낸다.
시인은 열세살 때 집을 뛰쳐나와 양복점의 조수로 일하다가
마흔세 살에 이르러 장애인 후원회장이 된 가난했던 친구에게서도
하느님의 옆얼굴을 본다. 그래서 그는 "옷은 제 상처로 사람을
철들게 한다/ 한 땀 한 땀 옷을 꿰매던 사람/ 누더기 많은 어둔
세상에/ 등 하나 내다 건다/(중략) 세상의 하느님은 언제나/
시다다 조수다 기레빠시다"(- 옷, 이문영에게)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에는 연민이 가득 실려있다.
'의자'나 '옻나무 젓가락'처럼 죽은 사물에까지 닿아있는
그 연민은 종교적 엄숙성이 아니라, 사랑이 끓어넘쳐 종종
욕설을 동반하는 시골 어머니의 일상 어투로 전달된다.
"어머니, 이 젓가락 본래부터 짝짝이었어요?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간데요. 저런 싸가지를 봐.…
배운 놈이 그걸 농이라고 치냐?/ (중략) 서러워라, 어머니 쪽에서
불내가 솟구친다./ 숟가락 내동댕이치고 서둘러 떠난 식구들/
저 밤하늘 어디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있나?"
(- 옻나무 젓가락) 라거나 "쥐구멍에 꽃 꽂는 놈이 어딨냐/
그래도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 목메겄다 저 꽃다발이나 뽑아드려라/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 꽃벼슬)는
母子의 대화는 사뭇 원색적이다.
시인은 참된 사랑의 언어야말로 온갖 치장을 다 벗어던진
근원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임을 이런 시들을 통해 생생하게
증거한다. 나아가 시인은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의자)라며 母性에 닿아있는 한없는 자애로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타자의 아픔을 감싸안는다.
그 연민은 "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르자/ 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 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 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 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
(-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거나 "고장 난 보일러를 뜯었다/
쥐똥이 수북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제 심장 박동 소리와
비슷했을까/(중략) / 작은 창 너머로 그가 물어 날랐을/
차가운 양식과 시린 앞 이빨이 떠올랐다"(- 쥐눈이별)며,
애처롭고 가련한 풍경을 통해 읽는이의 여린 마음을 건드린다.
세상의 그늘진 곳을 비추는 한줄기 따사로운 햇살같은 시인의
연민은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 햇살의 경문經文)거나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마른 해삼이
담겨 있다 물통은 빛바랜 중국 국기 같다/(중략) /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크게 부풀어 있다/죽어서도 저렇게 자랄 수 있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다" (- 해삼의 눈)라며, 죽은 사물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기까지 한다.
/ 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출처] 이정록 시인 15|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