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인간 / 최승호
어느 백제왕의 혁대는
비단벌레 껍질로 장식돼 있다고 한다
그 앞에 머리 조아린 문무백관과
궁녀들과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나
사라져버렸고
백제왕도 사라져버렸다
모래인간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가 된 인간은 많지만 모래로 된 인간은 없다. 모래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모래는 흩어진다. 모래는 흘러다닌다.
모래들이 물어뜯은 것 같은 움푹한 미라는 있지만
모래로 빚은 태아는 없다. 사막에 사는 모래쥐도 그렇다.
모래가 되는 모래쥐는 많지만 모래로 빚은 모래쥐는 없다.
모래에서 끝나는 육체, 모래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모래로 흘러다니는 육체,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다니고 바람에 불려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는 육체, 방황하는 모래들, 표류하는 모래들,
폭풍에 들려 빈 하늘에서 빈 하늘로 떼지어 날아가는 모래들,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누구의 뼈도, 그 누구의 살도 아닌,
남은 것은 혁대와
비단벌레 껍질에 흐르는 은하수,
4월의 황사는
고비사막에서 날아와
비단벌레 껍질과 속삭인다
- 최승호 자선시집 <얼음의 자서전> 2005
[출처] 최승호 시인 19|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