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안전 항변
우선 이탈리아의 소장을 봅시다.
1. 프랑스, 영국 및 미국은 1946년 1월 14일의 파리 조약 제3부에 따라 알바니아에 기인할 수 있는 금의 일부를 1945년 1월 13일 알바니아 법에 의해 이탈리아에 초래된 손상에 대한 부분적인 만족으로 알바니아가 아닌 이탈리아에 전달해야 한다. 2. 이탈리아가 금을 받을 권리는 코르푸 해협 사건 재판의 부분적인 만족으로 금을 받겠다는 영국의 주장보다 우선권이 있어야 한다. |
이탈리아의 본안전 항변에 위원회 국가들의 반응은 전부 달랐습니다. 당장 받을 돈이 있었던 영국은 소장도 내고, 대체 주장도 내놓으면서 백방으로 달렸지만, 그런거 없던 미국과 프랑스는 소장도 안내고 그냥 법원이 잘 판단해달라고만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뛰다니는 것 보면서 팝콘 뜯으며 “Cheer Up!” “Se dérider!”이나 외친 겁니다. 진짜 적은 간부... 아니 내부에 있다더니, 영국은 딱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이탈리아가 본안전 항변에서 주장한 것은 법원에 관할권이 없다-쉽게 말해 법원 권한 밖이니 나 이 재판 못해-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영국은 이런 이탈리아의 주장을 어떻게든 격파해서 법원에서 본안을 다루도록 만들거나, 혹은 그런 과정 없이 핵심 이익 즉 금괴를 따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1. 법원의 권한 부족을 이유로 한, 이탈리아의 소장에 명시된 이의제기는 (1) 워싱턴 3국 성명서의 조건과 의도에 부합하지 않으며 (2) 이탈리아에 의해 사실상 철회 또는 취소되었으므로 무효이다. 2.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워싱턴 3국 성명서의 의미와 목적 내에서 법원에 어떠한 신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3. 영국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소장이 여전히 유효하고 존속한다고 법원이 판단하는 경우, 법원은 이탈리아의 소장에서 법원에 제기된 본안을 결정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 |
무슨 말이냐? 1, 2번 주장이 법원에 의해 인정된다면, 이탈리아에 의한 제소는 무효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금은 알바니아의 것이 되겠고, 그걸 영국은 받아먹겠죠. 만약 1, 2번이 먹히지 않는다면 영국은 3번 주장을 통해서, 본안 가서 판결하자고 주장할 셈이었습니다.
법원이 우선 판단해야할 것은, 이 공간에서 이탈리아의 본안전 항변을 다룰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만약 다루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저번 코르푸 해협 사건 때처럼 본안전 항변을 생략하고 본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파악할 것이었습니다.
우선 영국의 1, 2번 주장을 보도록 합시다. 이탈리아는 이 주장에 관하여도 법원이 판결할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법원은 어떻게 보았을까요?
이탈리아의 이 주장은 ICJ헌장 62조의 빈틈을 잘 찌른 것이었습니다. 이 조항에서는 본안전 항변을 제기하는 주체를 특별히 정해놓지 않았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소송을 건 이탈리아 측에서 그러한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요.
이탈리아는 워싱턴 성명의 결과로서 생긴 제안을 수락하면서 이 재판에 오게 되었고, 그래서 결정된 소송주체와 금괴를 두고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본인들이 보았을 때 이 소송에서 자신들의 반대편에 있어야 할 나라는 알바니아로 보았고, 이것을 법정에서도 밝힌 바 있었습니다. 법원은 그 입장에서, 과연 분쟁의 주체와 관련하여 법원에 관할권이 있는지 의문이 생겼을 수 있고, 이탈리아가 그 부분에서 본안전 항변을 제기했다고 보았습니다. 분명 일상적인 경우는 아닙니다만, 헌장에 위배되는 소재는 아니라고 본 것이죠.
영국은 이에 반박하여, 이탈리아의 이러한 관할건 거부는 워싱턴 성명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명 이탈리아의 법원 관할권 수락은 워싱턴 성명의 조건 중 하나였고, 그 성명에는 이탈리아가 특정 질문에 대해서만 법원에 물을 수 있다고 적혀있었는데, 이탈리아는 법원이 이런 질문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지요. 영국은 더 나아가 이탈리아의 소장은 실제적인 것real one이어야만 하나, 관할권에 대한 이탈리아의 반대로 인하여 그것은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법원은 이러한 영국의 주장을 하나씩 논파해냅니다. 이들이 보기에, 이탈리아의 관할권 수용과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안전 항변을 제기했다고 해서, 이탈리아의 관할권 수용이 워싱턴 서명의 것보다 덜 긍정적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지요.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는 해당 문제를 덮어놓고 비난하기 전에 법원을 찾았고, 이것은 이탈리아 측이 법원에 어떠한 상황에도 적절하지 않은 질문들을 결정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봤을 때, 법원은 소장의 부적합성에 대한 영국의 주장을 워싱턴 조건과 의도에 따라 받아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법원은 영국의 또다른 1번 주장-소장이 이탈리아에 의해 철회되거나 취소되었다-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 ICJ 헌장 69조는 신청국이 제기한 소송절차 과정에서 신청국이 법원에 그 소송절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서면으로 통지하는 경우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은 이 부분을 걸고 넘어졌는데, 법원은 이 건의 본안전 항변은 여기서 말하는 중단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1번 주장은 전부 논파당했습니다.
2번 주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는데, 소장이 제출 당시 무효가 아니었다면 본안전 항변으로 인하여 이후 무효가 될 수 없음을 명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면서 이 주장도 배척했습니다.
법원은 이 일련의 주장에 관하여, 소장은 유효하고, 영국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본 소장은 여전히 존속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련의 과정이 끝났고, 소장에 명시된 본안의 내용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본안전 항변을 검토할 차례만 남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본안전 항변은, 위에서도 몇 번 보았다시피, 이 재판은 알바니아와 해야할 것이지 위원회 구성국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원에 본안을 판결할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이에 대응하는 주장은 3번 주장 즉 1,2번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법원은 이탈리아의 소장에서 법원에 제기된 문제를 판단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법원은 이것에 대해서 판단할 것입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제소하면서, 소송의 주체를 미, 영, 프 위원회 3국에 국한시킨 워싱턴 서명의 (b)항에 의존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b)항에서 다른 국가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우선 법원은 이 세 국가와 이탈리아 간의 관계에 있어서 소장이 워싱턴 성명의 제안에 부합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영국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신들이 보기에 알바니아의 동의가 워싱턴 성명 (b)항 하의 이탈리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어쨌거나 ICJ에 온 이유는 알바니아의 몫이 영국과 이탈리아 중 어디로 가야할지에 관한 질문 때문이라는 겁니다.
법원이 보기에, 지금 다루는 문제는 금이 행방이 아니라, 재판을 지속해야할지 여부가 달린 법적 성질의 그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영국의 주장을 비껴두고,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의 본안전 항변으로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소장에 적힌 첫 주장을 봅시다. 이탈리아에 따르면, 자신들은 알바니아가 저지른 국제적인 잘못의 보상에 대하여, 자신이 알바니아에 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가 금괴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려면, 알바니아가 이탈리아에 대해 국제적인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알바니아가 이탈리아에 보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는지 판단해야하고, 만약 그렇다면, 보상금의 액수도 결정할 필요가 있겠죠? 그리고 이걸 판단하려면 1945년 1월 13일의 알바니아 은행법이 국제법에 합치하는지도 파악해야 할 것이고요. 이런 것을 판결해달라고 하려고 보니까, 자신들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하는 국가는 위원회 3국이 아니라 알바니아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이탈리아의 주장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법원은 우선 알바니아의 동의 없이 그러한 분쟁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알바니아가 이 경우 명시적 또는 함축적으로 동의했다고 주장한 당사자는 없었던 바, 알바니아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국제적 책임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것은 법원의 동의가 있어야만 국가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헌장에도 명시되어있는 개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리자 영국은 알바니아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개입에 관한 법원헌장 62조를, 제3국이 개입할 수 있는 법적 특성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건에도 법적 절차는 계속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설령 알바니아가 법정에 개입하기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법원이 당사자들 사이에서 권리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알바니아는 법원에 개입 허용 요청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판결을 받아서, 이탈리아에 그것을 행사하려는 생각이었죠.
법원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하나는 알바니아가 이 사건에서 갖는 영향력을 보았습니다. 현재의 경우, 알바니아의 법적 이익은 판결의 영향을 받는 것을 넘어, 판결의 주제 그 자체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헌장 62조를 알바니아의 부재 시에도 재판을 계속 진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헌장 59조의 내용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소장은 자신과 위원회 국가들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갖게 될 텐데,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제3국인 알바니아가 이 사건과 갖는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법원은 알바니아 또는 그 이전의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결과적으로-법원은 이탈리아와 3개 위원국들이 관할권을 부여했지만, 이 관할권을 행사하여 이탈리아가 제출한 첫 청구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법원은 이탈리아 측 소장의 두 번째 청구를 판결할 수 있을지 여부를 봅니다. 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법원의 관할권을 수락한 이탈리아와 영국만 다루는 문제로 보이지만, 워싱턴 성명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영국의 주장 사이 우선순위 문제는 금괴가 이탈리아로 가야한다고 결정되었을 때만 발생한다고 명시되어있었습니다. 이미 둘째 청구는 첫 청구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탈리아 측의 소장과 진술에 의해서 강화되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 측 변호인단이 첫 청구와는 별개의 것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법원이 판단한다면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두 주장은 불가분의 명제이며 그것을 분리했을 때는 이미 워싱턴 성명에서 제한하는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걸 판단하려면 첫 청구에 대해서 판결을 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안 된다고 위에서 이미 결론이 났기 때문에 법원은 판결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법정은...
만장일치로 프랑스, 영국, 미국 및 이탈리아의 공동 합의에 의해 부여된 관할권으로는 알바니아의 동의 없이 이탈리아의 소장 그 첫 번째 청구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1대 13으로, 두 번째 청구에 대해서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후의 이야기
법원 판결이 이렇게 나자, 2톤이 넘는 금괴를 거의 가질 뻔했던 영국은 코앞에서 그것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 냉전의 격화로 인해서 영국 정부가 신경 쓸 일이 많아져 못 받은 돈으로 묻어둔 것인지, 한참 적은 돈을 배상금으로 지불하려던 시도가 무산된 이후로 대놓고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알바니아 정부가 해결의지를 싹 잊고 쌩깐건지, 왜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건은 정말로 오랜 기간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뜨린 이탈리아는 후일-1958년 쯤이 아닐까 싶습니다-에 위원회로부터 자신들의 몫에 알맞은 금괴를 반환받는데 성공합니다. 전쟁 말기에 독일이 이탈리아의 금괴를 빼돌린 것은 이번 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전쟁 중에 이탈리아 국립은행이 잃은 금괴의 양이 25톤쯤 하기도 해서 전 글에서 밝혔다시피 이탈리아는 엄연히 반환받을 국가들 중 하나에 속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위원회는 이후로도 간간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에서 언급한 건 외에도,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에 대한 금괴 반환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 작업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바니아에 대한 반환은 그 시점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죠. 아마 호자 특유의 쇄국정책과, 그로인해 불편했던 서구와의 관계가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코르푸 해협 사건 배상과 알바니아의 금괴 반환은 1993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집니다. 언제쯤이냐면... 코르푸 해협 사건이 터진 지 47년이 지난 뒤이자,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무너지고 알바니아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입니다.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토치카좌호자는 한참 전에 죽었고, 코르푸 해협에서 전우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던 수병들도 많이들 세상을 등진 이후에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된 겁니다. 양국은, 영국이 1574kg의 금괴를 돌려주는 대신 알바니아가 당시 금액으로 200만 달러를 주는 것으로 사건의 배상과 금괴의 반환 요구를 종료하기로 합의했고, 이에 따라 사건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끝으로, 1996년 알바니아의 마지막 회수를 끝낸 3국위원회는 1998년 9월 9일 정식 해산하게 됩니다.
금괴 사건에 대한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두 글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생긴 사건으로서 개인을 두고 두 나라가 붙은 사건 그리고 기업을 두고 붙은 사건 이렇게 두 개의 사건을 다뤄보겠습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당. 빠스타 시키들 이런 거 보면 예리하고 능력있고 발목잡기 잘 하는데... 왜들 그리 살고 있는가...
결론은 토치카좌의 승리인 건가요ㅋㅋㅋ 사고쳐놓고는 배상은 없었고, 알바니아 공화국이 들어선 시기에는 이미 죽고 없었으니 지가 머리 싸맬 일도 없었겠죠ㅋㅋ
파스타가 이 건만 보면 진짜 예리하게 잘 찔렀는데, 평소에도 그렇다는 보장이 없...
알바니아는 몰라도 토치카좌는 승리 맞다고 생각합니다. 코르푸 해협 건은 미필적 고의로 사고가 났다고 쳐도, 계속 뻐팅기면서 배상 ㅈ까 하며 쇄국정책 펴서 사실상 무마시켰으니... 덕분에 동구 서구 할 것 없이 관계가 하나같이 나빴지만 국가를 사유화한 입장에서 그게 대수였을까요 ㅋㅋ
이탈리아가 쳐발릴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런 반전이!
본안 갔으면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전에 이탈리아가 선언 내의 허점을 잘 파고들어 선수를 쳤습니다. 이번만큼은 파스타가 아니라 로마의 후예, 로마법의 원조라고 불러주고 싶습니다. ㄲ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