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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김제 모악산 금산사(2/3)
현림 추천 1 조회 234 17.08.01 23:09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김제 모악산 금산사(2/3)


김제는 해남지역 및 전남지역으로 여행을 할 때 어련히 그쳐가야 하는 지역이었지만

 여태끗 금산사를 들린 기회는 한 번도 잡지 못하다가 다행히도 이번 운주사와 쌍봉사에 이어

송광사 코스를 잡으면서 마지막으로 연이 닿았다.

그러나 23일도 아닌, 그렇다고 12일도 아닌 당일 코스인 여정이라

들리는 매 사찰마다 시간도 타이트 했지만 그래도 금산사 경내를 주마간산 격이나마 둘러볼 수 있었고

또 미륵전에 참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불연(佛緣)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기술한 1부에이어 23부에서는 전각 위주로 포스팅 한다.

아울러 여기에 기술된 자료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편집하였음을 밝혀둔다.

 


금산사 주차장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사찰에 어울리지 않는

 돌로 쌓은 석문(석성문) 하나가 눈길을 끈다. 편액을 보니 개화문(開化門)이다.

남한산성이나 덕주사와 같이 왜군이나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석문(石門)도 아닌데

석문도 그렇고 편액의 내용도 궁금해서 돌아와서 조사해보니

옛적에 속칭 <견훤석문>이라고 불리던 석성문을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적의 석성문은 홍예문(虹霓門)만 남고 모두 퇴락하여 붕괴 할 위험이 있어

옛 홍예문의 형태만 살려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적 석정문


<견훤석문>이라 불리는 것은 견훤이 후백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백제유민들의 저항의식을 민중종교의식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당시 백제의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던 금산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후계자 문제로 아들 신검에 의해 유페 되었던 곳도 바로 금산사였기에

그때 지어진 것이 이 석문이고 또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후백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견훤의 작은 흔적을 통해서

새롭게 기리고자 개화문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편액은 월주스님의 작()이라고 한다.




금산사 일주문

현재 입구에 세워져있는 일주문은

지난 1975년에 세워진 일주문의 두 기둥이 부식이 심해 붕괴의 위험이 있어 철거하고

구 일주문보다 100m 전방에 새롭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새로 지어진 일주문은 목조 맞배지붕 양식의 건물로

20039월에 상량식과 함께 완공되었으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높이 5.28m, 너비 6.6m로 새롭게 마련된 일주문은 기둥 둘레가 1.6m

전국사찰의 일주문 중 가장 큰 기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해탈교

이 다리를 건너가면 경내로 들어 간다.


금강문

금강문은 199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는 조선시대로부터 금강문이 있었는데 절 입구를 바꾸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의 금강문은 지금의 금강문 옆의 모악산 금산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건물이다.

편액은 호남출신 서예가 담헌(湛軒) 전명옥(全明玉)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금강문 안에는 밀적금강과 나라현금강 그리고 문수와 보현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나라연금강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


밀적금강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


천왕문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994년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좌로부터 남방 수호신 증장천왕,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좌로부터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동방 수호신 지국천왕



보제루

금산사 보제루는 조선시대 누각인 만세루(萬歲樓)를 계승한 건물이라고 전한다.

 원래의 만세루는 12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나,

지금의 보제루는 1976년 건립되어 1998년 증축된 것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의 정면에 있는 보제루는 정면 9,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 건물이다.

이 건물은 2층의 누각으로 1층의 기둥은 8각형의 화강암 석재의 누하주(樓下柱)로 되어 있고

2층은 목재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1층의 어칸과 협칸은 통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어칸이 더 크다.

 

1층 누하주의 초석은 둥근 초석으로 하였고,

초석 위의 기둥은 화강석을 8각형으로 거칠게 마무리하였다.

기둥 위의 공포는 이익공 짜임으로 되어 있고

초익공과 이익공의 끝은 매우 날카롭게 조각되었다.

주간에 위치하고 있는 화반은 매우 크고 화려한 편이다.

누마루 끝의 난간은 높은 계자각을 세우고 착고널에 안상을 조각했으며,

계자각 끝에 하엽을 놓고 난간두겁대를 두른 전형적인 계자각(鷄子脚) 난간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양 끝의 반전이 뚜렷하여 긴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보제루(普濟樓)’ 편액은 송성용(宋成鏞)이 썼는데,

단아하면서 강건한 선비풍의 모범적인 서체로 보기 드문 명작이다.



금산사미륵전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금산사의 상징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으며

금산사에 있는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이다.



미륵전은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봉안한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이다.

 신라 경덕왕 21(762)부터 혜공왕 2(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초창(初創)된 시기나 당시의 건물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표율사가 중창시에 미륵장육불상(彌勒丈六佛像)을 조성해 3층전인 금당에 봉안했음이

삼국유사5층석탑중수기(1971년 발견)를 비롯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1705금산사지 金山寺誌(1921) 등에 기재되어 있다.

또 현재도 소조불상(塑造佛像)의 대좌 아래에 커다란 철제 수미좌(須彌座)가 남아 있어

과거의 장육상대좌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27(인조 5) 소조삼존상을 조성하였다.


 

현 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지만

지금의 미륵전은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이 앞면 5, 옆면 4칸으로 약 79,

 2층은 앞면 5, 옆면 4칸으로 약 50,

3층은 앞면 3,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된다.


 

건물은 총높이가 20m 가량 되는 3층인데 내부는 통층으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당초부터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방식은 1층에 고주 4개와 20개의 변주(邊柱)를 세워 이들 사이에는 굵직한 퇴보를 걸고,

그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이를 다시 고주와 퇴보로 결구하였다.

3층은 고주가 그대로 우주(隅柱)가 되고 그위에 지붕을 올렸다.

이와 같은 가구방식은 문루나 목조탑파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으로 외부첨차는 쇠서[牛舌], 내부는 운궁(雲宮)을 기본으로

여러 차례 중수됨에 따라 초가지형태나 공포짜임새에 변화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1층에서는 평방 위에 공포를 올렸으나 2층 이상에는 창방(昌枋) 위에 바로 공포를 배열했다.


(좌로부터 대묘상보살, 미륵보살, 법화림보살)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적멸보궁 좌측이 방등계단이다.



적멸보궁

이 법당은 방등계단(方等戒壇)에 참배하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된 방등계단 예배전(禮拜殿)이다.

원래는 나한전으로 석가모니불, 제화가라보살, 미륵보살과

석가모니불의 제자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었으니

1998년 방등계단을 성역화 할 때 다시 개축한 것이다.

법당 뒤에 있는 방등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음으로

그 기능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배소(拜掃)하기 때문에 적멸보궁이라 했다.









적멸보궁에서 내려다 본 미륵전




방등계단은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방등계단 앞에는 5층석탑이 있는데 지금은 보수 중이라 사진을 담을 수 없었다.

위의 사진은 펌한 것이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招提,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나한전

나한전 법당안에는 소조 석가삼존불(석가모니불 제화가라보살 미륵보살)

가섭과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그 좌우에 16나한상을 배치하고

계단형식으로 소형의 5백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7칸 정도 규모의 나한전이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방등계단 옆에 있었든 것을 1995년 적멸보궁을 지을 때 옮겨서 새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제화가라보살,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산신, 독성(獨聖: 那般尊者)

칠성(七星: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가리킴을 봉안한 곳)을 봉안하고 있다.

성각은 앞면과 옆면 각 2칸씩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1946년에 조성한 칠성탱 · 산신탱 ·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한편 암자의 북쪽 산기슭에는 보물 제29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심원암(深遠庵) 북강삼층석탑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을 둘러보지 못했다.

나한전과 조사전 뒤쪽 가람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1940년대 경에 건립되어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적멸보궁과 나란히 위치해 있었으나

최근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내부에는 소조독성상과 함께 칠성독성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세 점의 불화 모두 1945년에 퇴운일섭(退耘日燮) 스님이 조성한 것이며

독성상은 여늬 사찰에서 보는 것과는 형상이 특이하다.




조사전


노주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제3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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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08.02 05:13

    첫댓글 감사합니다.
    잠시 머물다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행복하소서

  • 17.08.02 06:26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17.08.02 06:45

    _()_
    나무 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 17.08.02 14:53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 17.08.03 13:07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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