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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AQmZvxVffY?si=BlH3f-rlOw2zaRx8
아비뇽 출생. 파리음악원에서 M.뒤프레, P.뒤카에게 사사하고 1936년 ‘젊은 프랑스’를 결성, 당시 성행하던 신고전주의적인 추상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현대에 ‘살아 있는 음악’을 창조하고, 음악을 인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하는 공통된 목적에 따라 작곡활동을 하였다. 1942년 모교의 교수가 되고, 1944년에는 자신의 작곡법을 종합하여 《나의 음악어법》을 펴내 작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현대 음악어법에의 귀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1949년에는 피아노곡 《음가(音價)와 강도(强度)의 모드》 《뇜 리트미크》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중요한 작법인 ‘뮈지크 세리에르’의 출발점이 되어 브레즈 ·쉬토크하우젠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52년에는 파리방송국에서 뮈지크 콩크레트에도 손을 대어 《음색=지속(持續)》을 제작, 전위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창작의 근원은 가톨리즘에 있는데, 오르간곡 《주의 강탄(降誕)》(1935)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1941), 피아노곡 《아멘의 환영》(1943)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20개의 눈매》(1943) 등에 그 경향이 뚜렷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교적 엑조티시즘을 소재로 한 가곡집 《아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12곡, 1945) 《튀랑갈리라교향곡》(1948), 합창곡 《5개의 르샹》(1948) 등 실험적인 작품을 작곡하고, 새소리를 악보에 채택한 피아노의 오케스트라 《새들의 눈뜸》(1952), 관현악곡 《이국의 새들》(1955∼1956), 피아노곡 《새의 카탈로그》(1956∼1958) 등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실내악 《7개의 하이카이》(1963), 합창과 오케스트라 《주의 변용》(1969) 등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영문학 교수로서 셰익스피어의 뛰어난 번역가이고, 어머니는 시인 세실 소바주 Cécile Sauvage인 교양이 풍부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를 가졌을 때 싹트는 영혼 l'Ame en bourgeon이라는 제목의, 아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한 모성애가 가득 찬 훌륭한 시를 썼는데, 이 시가 그의 사람 됨됨이를 여실히 나타내게 된다.
https://youtu.be/uiYhHupPPFg?si=54mx2jl1vaVT-sdv
(메시앙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올리비에 메시앙의 양친은 1914년 도피네 지방의 그르노블에 거처를 정했는데, 메시앙은 그곳을 좋아하여 거의 모든 작품을 이곳에 틀어박혀 썼다. 그는 1914년부터 1918년의 전쟁 동안 모친과 조모 밑에서 자랐고(부친은 소집되어 있었다), 샤르동 Chardon양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유명한 고전작품의 공부에 일찍부터 흥미를 보이게 된다(이미 1914년에 피아노를 위한 소곡을 작곡했다). 10세의 생일축하로 그의 최초의 화성법 교사 장 드 지봉 Jehan de Gibon이 보내준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관현악 스코어는 메시앙에게 하나의 계시가 되었다. 이후 일가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고, 메시앙은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이후 11년간 노엘 갈롱 및 장 갈롱(화성), 모리스 엠마뉘엘(그는 메시앙에게 풍부한 선법과 그리스의 음율법을 가르쳤다), 폴 뒤카스, A. 에스틸, 마르셀 뒤프레(오르간), 그리고 팔캉베르 Falkenberg(피아노)에게 배웠다. 1928년에 출판된 오르간을 위한 제1작(미출판은 포함하지 않음) 천상의 잔치는 관현악곡의 편곡으로써 메시앙이 좋아하는 몇 개의 선법, 특히 나중에 조옮김이 한정된 선법 제2번이 될 선법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옮김의 한정된 선법이란, 다른 음도로 조옮김하면 음정간의 어떤 규칙성에 의하여 당장 원형과 같은 음이 되어 버리도록 음정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앙이 불가능성의 매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격렬하고 관능적인 화성법, 꾸불꾸불한 선율선의 잡아늘이기, 종교적인 것에 직결한 주제(메시앙은 열광적인 가톨릭 신자이다) 등은 바로 메시앙풍의 특징으로, 이 첫 출판작품에서도 바로 찾아볼 수 있다.
메시앙이 작곡 클래스에서 2등상을 획득한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집(1929)은 후기 드뷔시풍의 타이틀(고뇌의 종과 고별의 눈물, 꿈 속의 느낄 수 없는 음)이 붙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뚜렷이 드러난 골조를 통하여 메시앙 자신의 서법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는 모티브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는 반대로, 서로 얽힘이 없이 수직으로 혹은 시간에 따라 병치되어 있으며, 또 화음이 색채의 터치로써 사용되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같은 빛나는 색채를 가진 음의 색청(色聽)은, 메시앙에 있어서는 시적 이미지나 확산과의 조응(照應)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음을 색채로써 본다고 언명한 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 있어서이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공감각적 색청이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의학에서도 그 존재가 인정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작곡된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노래, 소프라노, 테너, 바이올린,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주의 죽음, 오르간곡 두 장으로 접은 그림(1930)으로 그는 1등상을 받았다. 로마 대상 콩쿠르에서의 실패 후, 그는 1930년 22세의 나이로 파리의 성 트리니티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메시앙이 오르간의 즉흥연주라는 장을 통하여 착상의 대부분을 잇달아 전개시켜간 것은, 그가 이후 30년 이상 동안이나 유지하게 되는 이 지위에서이다. 병치된 색채, 음군(音群)의 다양한 대립, 음역의 급격한 변화, 선적(線的)인 울림의 풍부함 등을 갖춘 대오르간은 그의 관현악의 서법에 있어서의 잠재적인 모델이다. 또한 이 악기는 작곡가 겸 즉흥연주자라는 전통을 영속시키는 진지한 서양 음악에 있어서의 최후의 악기이며 그의 표현상, 선법상, 화성법상, 리듬상의 탐구를 위한 실험대를 제공하고 있다.
1931년 잊혀진 제물이라는 교향적 3부작은 메시앙에게 어느 정도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연구심에 넘친 그는 파리 음악원을 졸업한 후에도 모든 음악을 계속 배웠다. 이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서 악센트 붙이는 법을, 드뷔시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현대 음악가들에게서는 리듬을 배웠다(그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리듬의 각도에서 분석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계시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는 스위스의 화가 블랑 가티 BlancGatti와 함께 색채와 음과의 사이의 엄밀한 관계를 연구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리스 음악의 운율법, 그레고리오 성가 네우마, 그리고 힌두 음악의 리듬 체계(그가 서양 음악에 처음으로 도입한 데시 타라라고 불리는 복잡한 리듬 주기)를 연구한 일이다. 이 연구에서 그는 매우 독특한 관심사, 즉 새로운 지속에 관하여 깊이 탐구했다. 그의 화성법과 선법의 체계는 그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즉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역시 프랑스의 전통(포레, 프랑크, 드뷔시)에서 직접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리듬에 관한 그의 특수한 감각은 규칙적인 박자와는 정반대이며 완전히 그의 독자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착수되어 1981년이 되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저 위대한 리듬 개론에서 그는 자기의 탐구의 총결산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스타일은 오르간곡 영원한 교회의 출현(1932)이나 1933년에 오르간곡으로 편곡된 4개의 명상으로 이루어진 교향적 모음곡 그리스도의 승천(1932) 같은 작품에서 매우 급속하게 명확한 형태를 취해 갔다. 올리비에 메시앙은 한두 개의 예를 제외하면 종교적 착상을 전통적인 전례의 장르, 즉 가창 미사, 레퀴엠, 칸타타, 모테트 등의 주형에 흘려 넣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해 왔다. 마찬가지로, 그는 어떤 장르(콘체르토, 심포니, 소나타)에서 착상을 빌리는 경우에도 결코 그러한 장르의 기성의 틀에 박히는 것을 채용하지 않는다. 각 작품이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는 악기편성(4중주, 3중주 등)을 끊임없이 새롭게 함으로써 본능적으로 모든 연작을 피하고 있다. 그는 1935년에 주의 성탄이라는 제목의 오르간을 위한 최초의 중요한 연작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조옮김의 한정된 선법(그는 그것을 곧 망라하고 분류했다), 힌두의 타라에서 착상을 얻은 리듬, 그리고 알랭 페리에 Alain Périer가 화음에 부가된 공간음고(音高)라고 한다을 넓히도록 시간을 넓힌다고 말한, 리듬적으로 부가된 음가(音價)를 체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혁신적인 요소에 의해 이들 작품의 듣는 재미가 저해되는 일은 없다.
더욱이 형식의 탐구와 음악의 쾌락주의를 병존시키는 일, 즉 당시 프랑스에서 작곡가를 관능주의자와 사변주의자로 양분하고 있던 이율배반을 초월함으로써 모든 청중을 매료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메시앙의 독자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6년 메시앙은 자기 자신의 음악적 요구와 더불어 앙드레 졸리베, 다니엘 르쉬르, 그리고 이브 보드리에(이 그룹의 주모자)와 함께 죈느 프랑스라는 그룹을 형성하기에 알맞은 위치에 있었다. 이 그룹은 느림보의 간편주의, 빈혈기 있는 신고전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이기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프랑스 음악을 정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재생시키는 일에 공헌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룹의 멤버는 전쟁에 의해 각기 헤어지게 되지만, 그 전에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몇 번의 합동 콘서트를 통하여 그룹 자체의 메시지는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이 해에 그는 음악사범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 동시에 바이올린 주자인 클레르 델보스 Claire Delbos와 결혼했고, 이듬해인 1937년에 파스칼 Pascal이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미라는 애칭을 가진 아내 클레르는 그에게 몇 개의 작품의 착상을 주게 되며, 그러한 작품 중에는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미를 위한 시(1936)가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종교적 감정을 인간애와 일체화시키려 했다나중에 그는 트리스탄풍 연작(하라위, 투랑갈릴라 교향곡, 5개의 르샹)에서 저주로부터 이 인간애를 구출하려 하고 있다.
1937년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위촉받은 옹드 마르트노를 위한 아름다운 물의 제전 Fete des belles eaux은 그가 이 악기를 실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옹드 마르트노를 일부러 장식적으로 기능시킴으로써 이 악기가 가진 음색의 거의 비속하리만큼의 아름다움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 파스칼의 탄생은 그에게 또 하나의 연작 가곡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하늘과 땅의 노래(1938)의 착상을 주었다. 그 자신이 쓴 이 작품의 가사는 마치 태내에 있을 때 어머니 세실이 그를 위해 썼던 시에 대답하기 위해 쓴 것 같은 내용이다. 이 연작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의 눈여겨 보는 일이 없는 메시앙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회의라는 일면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신념에 대하여 엄한 태도를 취한다면, 유년시절을 심각하게 파악하지 않고 인간애를 끝까지 지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미를 위한 시나 이후 시대의 작품인 5개의 르샹, 신의 강림을 위한 3개의 작은 전례, 하라위 때에도 그러했듯이, 메시앙은 하늘과 땅의 노래의 경우에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텍스트를 쓰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텍스트에 있어서도 이질적인 제요소의 병치(竝置)라는, 그의 음악의 경우와 똑같은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오노마토페(어린이가 지껄이는 말을 참조하고 있다), 종교적 질문,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흥미로운 것은 비평가 클로드 로스탕과 같은 사려 깊은 사람들을 처음에는 대단히 기분을 상하게 해버린 푸르름을 마시는 새들과 같은 이미지)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텍스트는 노래에 소재를 주는 이외에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노래는 메시앙에 있어서는 언제나, 혹은 거의 모든 경우에 여성(女聲)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메시앙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오르간의 연작의 하나인 영광의 몸(전후에 초연되었다)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에는 모노디풍의 서법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전쟁에 동원된 그는 독일군에 붙잡혀 슐레지엔 지방의 괴를리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극히 엄한 생활 조건 아래 그는 색청(色聽)의 공감각적인 환각을 일으키는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3인의 포로 동료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클라리넷을 위한 경이적인 작품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1941)을 썼다. 이 불가사의한 매력을 가진 작품의 발상원이 된 요한계시록이 고하는 세상의 끝 fin du temps이 여기서는 시간을 공간과 동일화하고 역행 불가능한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표현된다. 왜냐하면 이들 리듬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역으로 읽어도 앞에서 읽은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악장 수정의 전례는 각기 독립적으로 각 영역 속에서 용솟음치는 기악 파트의 중첩으로 인해 참다운 의미에서의 시간의 매달림을 그야말로 천재적으로 그려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저마다 독자적으로 하모니,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대상으로 하는 오스티나토의 조합으로서 구상된, 영원으로 도달할 수 있는 복잡한 선회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주기성이 지각(知覺)되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는 없다. 또 이 작품에는 장차 그의 작품의 일부를 지배하게 되는 새의 노래가 나타난다. 이것은 최초로 나타난 것의 하나지만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이 작품은 1941년 1월 15일 독일의 포로수용소라는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하에 초연되었다. 메시앙은 1942년에 파리로 송환되어 클로드 델뱅쿠르에 의해서 파리 음악원의 화성법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 이본느 로리오와 메시앙 자신에 의하여 초연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아멘의 환영은 그가 평소의 음악생활로 복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1944년에 그는 지금까지 일찌기 어떤 작곡가도 출판하지 않았던 지극히 기묘한 저서의 하나인 나의 음악어법을 공표할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을 자신의 어법에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자유자재로 사용한 모든 기법의 목록 같은 것이며, 실제 작품의 예가 많이 들어 있다. 조옮김이 한정된 선법, 부가화음, 음가가 부가된 리듬이나 역행 불가능한 리듬의 용법, 고대 그리스 음악이나 인도 음악뿐만 아니라 메시앙의 음악적 발상의 가장 중요한 원천의 하나인 칸투스 플라누스의 네우마에서 취해진 리듬구조의 기법도 포함되어 있다. 기 베르나르 들라피에르 GuyBernard Delapierre 저택에서 그는 사적인 형태로 작곡법을 강의했는데, 그 최초의 학생들(그는 이 그룹을 화살 Fleches이라고 명명했다)로는 피에르 불레즈, 세르주 니그, 이본느 로리오, 장 루이 마르티네, 모리스 르 루 등이 있었다.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두 개가 잇달아 탄생되었다. 여성합창, 피아노, 옹드 마르트노,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의 강림을 위한 3개의 작은 전례(1944)와 피아노 독주를 위한 거대한 연작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길(1944)이다. 이것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여 빈번히 연주되고 있다. 이들 2개의 작품의 스타일은 그의 나중의 작품보다도 급속히 고전적이고 매우 알기 쉬운 것으로 되어 갔다. 20개의 눈길은 다이내믹하고 중량감이 있으며 색채감이 넘쳐 관현악적이고 특징적인 몇 개의 짧은 라이트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놀라운 아이에 언급하게 된다. 이 놀라운 아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있어서의 메시앙 자신의 일이며, 그 어머니는 그의 출생 이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저편의 미지의 음악적인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메시앙 자신이 그 끓어오르는 듯한 기쁨에 찬 텍스트를 쓴 신의 강림을 위한 3개의 작은 전례는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바로 그 사람인 것 같은 순순한 메시앙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1945년 4월 21일 파리의 플레이야드 연주회에서 위엄을 갖춘 관객 앞에서 행해진 초연 뒤에는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논쟁과 얼마나 큰 분노를 일으켰던가?
다른 많은 음악상의 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항의는 음악 그 자체의 정면에서 쏟아진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2차적인 요소, 이를테면 텍스트와 그 종교적 관능성, 텍스트의 소위 뭐가 뭔지 알 수 없음 등에 돌려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몇 가지의 공격이 보여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격렬함에 직면해 보면 음악도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음악은 일반적인 범주에 도전이라도 하듯이, 관능성과 신비주의 혹은 쾌락주의와 추상작용 등 엉뚱한 짜임을 갖는 것, 즉 독특하고 폭력적인 기질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것(폭력은 메시앙의 예술 속에서는 거의 간과되어 버리는데, 가장 명백하게 느껴지는 양상의 하나이다)에 의해 관객을 당혹하게 했기 때문이다.
메시앙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를 통하여 반사회적인 혼인 관계를 맺지 않은 인간애의 테마를 직접 다루게 되는 것은 이 격렬한 항의가 가라앉은 후 시인되고 그의 작품이 모든 차원에서 재인식된 이후부터의 일이다. 거기서의 과제는 트리스탄을 구하는 것, 신앙의 힘을 최대한으로 피력하여 최대의 사랑의 이야기의 중심에 각인된 죽음의 본능이 나타나는 것을 치워버리는 것, 즉 표면적으로는 욕망으로부터의 숙명적인 출구인 죽음이 실제로는 보다 높여진 사랑으로 재생하는 입구라고 선언하는 일이다. 이 테마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장대한 수단을 썼다. 그것은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의 장대한 연작 하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1945), 피아노 독주와 옹드 마르트노 및 대오케스트라를 위한 10악장으로 된 거대한 교향곡으로써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촉으로 작곡된 투랑갈릴라 교향곡(1946~48), 그리고 12인의 목소리에 의한 혼성 앙상블을 위한 5개의 르샹(1948)이다. 5개의 르샹은 프랑스의 폴리포니의 전통(특히 클로드 르 죈느)에 의하고 있고, 실제 프랑스의 폴리포니가 지닌 신선함과 생명력을 잘 바로잡고 있다.
이들 세 작품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하라위와 5개의 르샹에서 케추아어에 의하고 있다는 것, 풍부함과 절대적인 간소함과의 기묘한 혼합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크기가 매우 다르다. 이 3대 연작 후에 메시앙이, 말하자면 죽음과 재생을 맞이했으며 몇 겹이나 되는 표피의 하나를 자기의 배후에 뱀처럼 벗어던진 것, 그리고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그 최후의 불로써 불태운 뒤 어떤 종류의 극단적인 직접적 표현을 파묻어 버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이래, 즉 40세를 넘어서 그는 기법적 탐구의 시기로 들어가는데, 이 시기를 그의 작곡활동 중에서는 가장 불모의 시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훨씬 뒤에 그는 자연과 새들, 즉 비물질적인 기쁨의 조그만 하인들이 그에게 영감을 주어 그를 예술적 불모에서 구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것을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평온하게 확신을 가지고 작곡할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중요한 해 1947년
메시앙은 관련 관청의 거부로 파리 음악원의 작곡법 교수로 임명되지 못하였으나, 그 대신 클로드 델뱅쿠르의 주선으로 그를 위해 창설된 분석 클래스 혹은 미학 클래스라고 이름지어진 특별 클래스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국제적인 젊은 세대의 위대한 대음악가들이 출석하게 되는데 피에르 불레즈, 야니스 크세나키스, 장 피에르 게제크, 자크 샤르팡티에, 피에르 앙리,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그리고 나중에는 트리스탕 뮈라이유, 느구엔 티엔 다오, 폴 메파노, 미셸르베르디 등이 있었다. 메시앙의 제자들이 그에게 바친 최대의 찬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메시앙은 정열과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모짜르트, 스트라빈스키, 베를리오즈, 베베른 등을 분석하면서 각자에게 그 개성을 개화시키고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메시앙풍인 것을 만드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리듬 개론을 쓰기 시작한 것과 외국다름슈타트, 자르브뤼크, 탱글우드 등지에 초빙되어 전후의 음악의 탐구와 격렬한 개혁의 한 시기를 긋게 되는 강의를 시작한 것은 같은 1947년이었다. 음악의 추상화 작업에 매진하는 남은 새로운 작곡법과의 만남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리듬 연습곡(1949~50)과 같은 작품의 탄생에 공헌했던 것이다(그 중 매우 유명한 음가와 강도의 모드는 음의 갖가지 패러미터를 모두 미리 결정해버린다는 실험을 통하여 젊은 제자들에게 작곡에 있어서의 완전한 제어를 꿈꾸게 했다). 오르간을 위한 성령 강림제의 미사(1950)와 오르간의 서(書)(1951)는 그의 초기 작품 특유의 오르간에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전의 매우 관능적인 연작 이후 하나의 단계를 이미 뛰어넘고 있다. 즉 리듬 단계는 긴장하고 절박한 것이 되고, 선율선은 보다 추상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조금 뒤인 1952년에 메시앙은 구체음악의 영역에 있어서의 그의 단 하나의 시도인 리듬의 조그만 연구라고 칭한 음색지속 TimbresDurées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자신은 이것을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 메시앙이 추상적 및 기법적 탐구의 충분한 개화 속에서 새로운 일련의 작품을 자신에게 착상시키게 되는 모델 혹은 원천으로서 새들의 노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는 5선지와 연필을 손에 쥐고 자연 속에 앉아 새롤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조류학의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그 이전의 음악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양식화되고 단순화된 방법으로 그것을 투사한 데 지나지 않았던 이 거대한 세계 속에 파고든 것이다. 그 이전의 음악과는 반대로, 그는 새의 지저귐을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객관적으로 옮겨 쓰려고 노력하고, 거기서 자연의 소리의 모방에 의한 환기만을 갖춘 묘사적 작품 소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메시스의 미학을 그만큼 깊이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지극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되며, 또 표현의 주인인 작곡가가 음세계의 어떤 현실의 복사의 배후로 모습을 감추려 하는 열의에는 무언가 감동적인 것이 있다.
자연을 그린 작품군, 예를 들면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검은 티티새(1951),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새의 눈뜸(1953, 부제로써 교향시라 했다), 피아노, 2개의 클라리넷, 타악기, 관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국의 새들(1955~56), 그리고 피아노 독주를 위한 거대한 모음곡 새의 카탈로그(1956~58) 등이 그것이다. 연주가 매우 곤란하고 날카로우며 정확한 울림을 가진 이들 작품을 연주할 때 피아노를 담당한 것은 물론 이본느 로리오였다. 자연의 환기는 예술적인 선영 속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같은 작품군은 거기에서 될 수 있는 한 멀어지려 하고 있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1인칭의 음악을 만들 수 있고, 우리들이 그 방법에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한 메시앙은 새들이 자기에게 잃어버린 길을 되찾게 하고 음악가인 권리를 다시 주었다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이것은 혼란에 찬 공허한 과도기를 진지하고 과감하게 고백한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크로노크로미(1960, 시간의 색채라는 뜻)와 같은 작품조차 지속의 추상화 작업을 극단까지 추진하고는 있으나, 그 음악의 텍스추어 속에 수많은 새의 노래를 도입하고 있다. 거기에서 젊은 음열 음악 세대의 일과 경쟁하려는 불안한 시도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1960년 그의 첫부인 클레르 델보스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62년 일본에 초빙된 메시앙은 막 결혼한 이본느 로리오와 함께 방문한 그곳에서 기악 앙상블과 피아노 독주를 위한 일본의 스케치 7개의 하이카이의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1963년이 되자 하인리히 슈트로벨의 위촉을 받은 것을 기회로 한때 포기한 신학적인 작품의 계열에 다시 착수했다. 그것이 하늘의 도시의 색채이다. 그 이후 자연적 영감과 종교적 영감이 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은 보다 대규모적이고 보다 순화된, 그리고 보다 단순한 것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의 기념식전을 위한 새로운 의뢰로 작곡하여 1965년에 초연된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한다에서 그러한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직접적이고 명확하며, 군더더기를 제거한 후의 베를리오즈를 상기시키고 있다.
동시에, 다종다양한 영예가 잇달아 메시앙에게 주어졌다. 음악제, 상, 루아이앙 음악제에서의 그의 이름을 붙인 피아노 콩쿠르의 창설, 그리고 마침내 주어진 파리 음악원의 작곡법 교수의 지위, 1967년의 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의 임명 등이 그것이다. 굴벤키안 재단의 의뢰로 오케스트라와 합창에 의한 거대한 앙상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1965~69)이 작곡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커다란 양탄자와 같은 것으로서 당시의 그의 작곡 방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르간을 위한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명상(1969, 초연 1972 워싱턴)은 몇 개 부분에서 알파벳의 문자와 문법적 여러 범주를 음표와 지속적으로 전사(轉寫)하는 시스템을 통하여 음악언어라는 태고로부터의 꿈과 관련을 갖게 된다. 그것은 메시앙에게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신학을 주재로 한 작품의 하나이며, 가톨릭교의 최대의 비의(秘義)의 하나인 주제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새의 카탈로그의 부록으로 정원의 꾀꼬리(1970)가 작곡된 후 일본에서 영감을 얻어 소중하고 꼼꼼하게 만든 7개의 하이파이와 짝을 이룬 기념비적 작품을 새로운 위촉을 받아 작곡했다. 이번 경우에는 미국의 풍경이 메시앙의 영감을 우주적 규모의 대교향곡의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이 교향곡은 지금까지 없던 베를리오즈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교적 감정에 일관되어 있다. 협곡에서 별들에게로(1970~74)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멋있는 풍경을 보았을 때의 정밀함을 가진 작품이다.
메시앙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자주 작곡가 자신의 말(신학적 무지개, 음색채의 음악)을 들어 그의 음악을 조그만 단층조차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반대이다. 이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채는 회의, 선택, 단념 등의 총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중심을 정하는 것이 지속의 문제이다. 그의 탐구는 작곡활동의 맨 처음부터 벌써 화성법과 선법성의 영역을 포화상태로 해버렸다-그것은, 서양음악은 분명히 그 이전에 이미 이러한 영역을 상당히 탐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지속의 측면(그에게는 리듬의 반대인 맥박적이고 규칙적인 박자의 리듬이 아니다)에서 탐구와 실험을 끈질기게 계속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색채에 관해서는, 다른 많은 작곡가와는 달리, 세련된 요점이 없는 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명한 있는 그대로의 색이며, 악기의 생(生)의 음색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화음에 의해서도 창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속과 색채는 서양음악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미학의 특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기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개념을 거론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가된 음가 valeur ajoutée라는 개념이다. 도처에서 자신의 재산을 발견하는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모든 기법을 하나의 도가니 속에서 서로 섞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 도가니 속에서 그러한 기법은 완벽하게 모여 융해되고, 서로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로 거기서 다시 나와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곳, 즉 다른 작곡가들이 서로 섞어서 하나로 만들고 있는 곳에서 그는 공공연히 부가해 버리고 있다. 즉 부가하기 위한 기법으로서의 장식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미적 원리이며, 그 원리는 구조적인 것과는 대립하지 않는 것이다. 메시앙은 성 쉴피스 교회에 있는 꽃장식무늬를 연상케 하는 옹드 마르트노의 장식음을, 피아노의 고음의 빛나는 금속조각과 같은 번쩍임을, 악기의 명기교적인 요소의 가장 유효한 사용법을, 그리고 화성법에 있어서의 부가음의 중첩된 풍성함의 효과를 충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거기에서 그의 미학과, 가령 거쉰의 미학과의 접근이라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약간 심술궂은 견해도 있을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가 여기서 자기의 기호에 따르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는 일이다-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는 적합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멸되어 버릴 갖가지 수단을 써서 항상 자기를 진정한 위대한 음악가로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처럼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음악가가 되기까지 비꼼이나 경멸 또는 거절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곡가에 대하여
금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메시앙은 단지 음악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오르가니스트, 이론가이며 교육자, 조류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아버지와 신비주의 여류시인인 어머니를 둔 메시앙은 그러한 가정적 배경과 대자연 속에서 맑은 심성과 大우주관을 키워갔고 실제로 알프스 산 중턱의 조그만 목장이 그의 작업장이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하나님으로 향하는 일관성이 바로 그의 음악표현의 바탕이라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그가 음악적으로 조명한 <새소리>를 짚고 넘어갈 수 있다. 하늘의 뭇 새들은 천주의 영광 속에 무지개를 타고 날며 모든 세계가 하나의 화합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저귀며 찬양한다.
각 나라와 고대의 소리를 찾기도 했던 메시앙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늘 새소리를 수집하고 하늘의 무지개를 연상케하기 위해 무지개의 색채를 음악 소리로 나타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므로 그의 음악철학의 양대 특징은 바로 <자연>과 <색채>라고 하겠다.
메시앙 음악세계로의 접근
20세기의 배경
20세기 초 10년여 간에 걸친 시대적 음악의 사조는 역시 <전통적 기능 중심의 음조 타파>이다. 화성들간의 구태의연한 결합으로부터 음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 Debussy음악의 특징이고 아예 조를 없애 무조음악을 이룬 사람은 Schoenberg이다.
기능적 음조가 약해진 것처럼 정확한 박자(regular meter)에 대한 필요성도 줄게 되었다. 마디세로줄(bar line)까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모니는 자유로와지고 박자에 대한 제약이 사라져가기 때문에 Stravinsky같은 작곡자는,
3/16, 2/16, 3/16, 2/8, 2/16
..와 같은 패시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Sacrificial Dance)
메시앙 음악의 특징
①음향색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지극히 아름답고 찬란히 빛을 발하는 화성이 어우러져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악의 악보를 처음 읽는 순간에는 혼돈 속에 파묻힌 듯 협화음이라고는 도저히 볼수없는 화음들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앙 음악의 첫 매력인 <음향색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한 괴상한 불협화음들이 곡에 익숙해 갈수록 不協이라는 느낌이 거의 없어지고 그 화성들이 조화를 이루며 찬란한 색채를 뿜어낸다.
②선법체계
또한 메시앙의 음악은 상당한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 빛나는 다양한 음향색채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항상 내면적 긴장과 음악으로의 전이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매우 어렵다.
음악표현의 수단으로 건반악기를 주로 사용했으며 색채와 음을 연관시켜 독특한 선법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종래의 조성개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불협화음으로 들렸다가 그의 선법체계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협화음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③정신적인 시간의 표현
<정신적시간의 표현>은 메시앙 음악세계의 특징 중 가장 환상적인 면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삶은 천주교회에 대한 경외심으로 점철되는데 Danbury의 음악이 Ives에게 또는 헝가리 민속음악이 Bartok에게 영향을 주었듯 메시앙에게는 교회의 정선율과 <새들의 노랫소리>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정신적인 명상의 정수를 표현하려 애썼다. 겨우 17세에 쓴 오르간 작품 <천상의 잔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느린 템포로 움직인다. 청중은 간격개념이나 박자, 흘러간 시간마저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한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나아가기 보다는 단지 음색을 바꾸기만 하고 움직이지는 않는, 조화로운 언어(Harmonic language)의 느낌이다.
1944년에 쓰여진 피아노 솔로를 위한 2시간 분량의 걸작인 <아기예수를 향한 20개의 시선>에서 그는 훨씬 대담하게 연장된 느린 템포를 표현했다. 많은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게 느리다. 물론 이것은 명상의 속성이다.
그러나 다른 전통적인 느린 음악들과는 달리 메시앙의 음악은 하모니 진행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화음코드가 등장을 하지만 그의 하모니란 단지 장식적인 기능일 뿐 협화음(Consonant)이나 불협화음(Dissonant)이란 단어는 그의 사전엔 없다. 다양한 음표들이 모여서 색다른 음색과 질감을 만드는 것이다.
④리듬의 특이성
메시앙은 자기 자신을 '작곡가인 동시에 리듬가'라고 일컫는다. 그의 음악언어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리듬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선법들을 연구한 것처럼 고대 인도의 리듬이나 고대 그리이스의 운율학, 중세와 힌두의 리듬을 연구했다.
여러 가지 싯가를 가진 리듬의 반복은 중세의 아이소리듬 기법에 기인한 것이며,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같게 되는 회문을 음악의 리듬에 도입한 것도 그 예이다. 그러한 메시앙의 리듬을 연주할 때는 마음속으로 가장 작은 단위를 세어서 정확히 연주해야 하는데 연주자가 어색하고 서툴게 느끼기 쉽다.
만약 그가 단순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오랜기간에 걸쳐 연장할 정도로 대담하며, 그의 느린 명상곡들이 리듬의 아주 작은 변화만 있을 뿐 끝없이 회전하는 것으로 보인다해도 그는 또다른 악장에서는 천국을 뒤흔드는 폭풍을 치게 할 능력이 있다.
<아기예수를 향한 20개의 시선>에서는 피아노의 모든 건반을 다 이용하는 굉장히 시끄럽고도 매우 어려운 구절이 나온다.
https://youtu.be/QAQmZvxVffY?si=YVMdz8ixiRyWxLKp
( Messiaen: Quatuor pour la fin du temps / Weithaas, Gabetta, Meyer, Chamayou)
메시앙의 작품
통상 그의 작품은 네가지로 분류되는데 그 첫째는 역시 성경의 근거에 따른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작품들이며 두번째는 리듬의 연구에 따른 작품들, 셋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에 의한 작품들, 새 소리에 의한 작품들이 그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눈다해도 그의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색>이다. 메시앙의 음악을 감상하거나 연주할 때는 내면적으로 색을 느껴야 한다. 예를들어 그의 오케스트레이션 기법등에서 색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작품들 중 피아노 곡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Preludes pour Piano
*Vision de l'amen
*Vingt regards sur l'enfant-J`esus(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길)
*4 Etudes de Rythme pour Piano
*Catalogue d'oiseaux
특히 2차 세계대전 포로수용소 생활 중 작곡된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4중주곡은 너무나 유명하다. 실내악에 관심있는 분들은 꼭 들어보시기 바란다.
https://youtu.be/b1ANOcLhuXM?si=IIeKM5-cajUfYIm4
( Messiaen: Catalogue d'Oiseaux 새의 카탈로그)
글 마지막에
톤 칼라, 음악의 라인, 다이내믹 컨트롤(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것으로 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까지), 프레이징 등은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있어 종종 요구되는 어려움이다. 어려움이면서 끊이지 않는 연구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악보가 요구하는 기교는 물론 곡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그의 작품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음악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런 것들에 비하면 조금은 쉬울 지도 모른다. 종교적이고 경건하며 자연과 색채로 정제된 음악을 대하려면 각 개인적으로 평화와 안식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