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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자부(改嫁子婦)
며느리를 다시 시집보내다
改 : 고칠 개(攵/3)
嫁 : 시집갈 가(女/10)
子 : 아들 자(子/0)
婦 : 며느리 부(女/8)
부녀자의 도리를 능히 잘 행한다는 능집부도(能執婦道)의 글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학덕 형성에 도움을 준 어머니와 큰 며느리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을 이야기하면 꼭 거론되는 여인이 있으니, 바로 둘째 며느리이다. 퇴계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둘째 며느리를 개가시킨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해 온다.
1980년 퇴계학연구원(退溪學硏究院)에서 낸 소설가 정비석(鄭飛石)이 지은 ‘퇴계일화선(退溪逸話選)’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 ‘퇴계가 둘째 며느리를 개가시켰다’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줄거리는 이러하다.
둘째 아들이 22세로 요절하고 나서 혼자된 며느리가 퇴계 집에 와서 살았다. 퇴계가 한밤중에 공부하다가 산보를 하는데, 며느리 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며느리가 남편에게 음식과 술을 권하는 말이었다.
퇴계가 진상을 알지 않을 수 없어, 문틈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 며느리가 음식상을 차려놓고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 남편처럼 앉혀놓고 음식이며 술을 다정하게 권하고 있었다.
방에 돌아온 퇴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 좋지만, 자식도 없는 젊은 저 며느리가 한 평생을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겠는가? 애처로운 저 모습을 내가 매일 어떻게 보겠는가?”라고 고민했다. 얼마 뒤 친정으로 보내어 시집가게 했다.
언젠가 서울 가다가 저물어 어떤 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음식이 입맛에 꼭 들어맞았다. 떠날 때 버선을 한 켤레 선물하기에 신어보니, 꼭 맞았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집 젊은 아낙네가 담장에 붙어서 떠나는 퇴계를 바라보며 전송을 하고 있었다. 퇴계는 다시 시집가서 잘 사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이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퇴계문집(退溪文集)’이나 어떤 책에도, 이 일화의 내용과 관계된 기록이 전혀 없다. 둘째 며느리에 대한 기록만은, ‘도산전서(陶山全書)’에 ‘단계(丹溪)의 유씨(柳氏) 집안의 딸’인 것만 나와 있다.
퇴계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이채(李寀)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의령(宜寧)의 외가에 가 살았고, 자라서는 외종조부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어 농장을 관리했다.
15세 때인 1542년에 결혼하였다가 1548년에 요절했다. 묘소가 지금 의령군 의령읍 고망곡(高望谷) 외조부 허찬(許瓚)의 묘소 아래에 있다.
퇴계는 많은 글을 남겼으나, 둘째 아들에 관한 글은, 이상하리 만큼 없다. 둘째 아들에게 주는 편지는 ‘퇴계문집’에 두 아들 공동명의의 편지 한 통 밖에 없다.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퇴계의 제자들이나 후손들의 기록도 없다.
둘째 아들 부부가 6년 동안 같이 살았던 것만은 알 수 있지만, 둘째 아들 내외에 관한 그 밖의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퇴계의 둘째 며느리가 개가한 것은 확실하다. 족보에 둘째 아들의 배필로 올라 있지 않고, 집안에 묘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퇴계가 최종적으로 개가를 허락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때 퇴계의 마음 자세가 복잡했겠지만, 깊이 인간적인 측면을 배려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조처라 할 수 있다.
퇴계의 둘째며느리 류씨
둘째며느리 개가(改嫁) 일화
퇴계가 둘째 며느리를 개가시켰다는 일화가 언제 발생하였는지 알기 어렵지만, 조선시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퇴계와 유관한 문자 가운데서 지금까지 편언척자(片言隻字)라도 관련 기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나 그 이후에 생겨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비석의 '퇴계일화선(退溪逸話選)'에 수록되면서 사실인 것처럼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퇴계에게는 본실(本室) 아들이 형제가 있었는데, 둘째 아들 채(寀)는 장가간 지 3년 만인 21살에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던 48세 때 2월 달의 일이었다. 퇴계는 그 해 10월에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전임되었다가 이듬해 겨 울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집에는 홀로 된 며느리가 있어서 하루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며느리는 후원 별당에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퇴계는 밤이 깊어지면 며느리가 있는 별당을 한 바퀴 돌아보며 무언의 보호를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봄날 밤이었다. 이날 밤도 자정 가까이 되어서 퇴계가 며느리의 방을 보살펴 주려고 후원으로 돌아와 보니, 며느리의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방안에서는 도란도란 정답게 속삭이는 말소리조차 들려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깊은 밤중에 며느리 혼자 있는 방에서 웬 말소리가 들려 나올까?” 퇴계의 머릿속에는 일순간 해괴한 생각이 떠올랐다.
양가출신인 며느리가 비록 청상과부이기로 시부모와 같이 사는 집에서 외간남자와 말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한밤중에 혼자 사는 방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나오니 괴상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퇴계로서는 싫든 좋든 간에 진상을 규명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방에는 창호에 조그만 틈이 있었으므로 그 틈으로 방안의 정경을 엿보니, 과부며느리는 방 한복판에 남자 허수아비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방안에 마주 앉아 마치 살아 있는 남편을 대하듯이 이 음식 저 음식을 권해 가며, “이 음식도 좀 자셔 보세요. 이것도 당신을 위해 제가 손수 만든 음식이니 까 한번 잡숴 보시구요.” 하고 혼잣말로 속삭여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런! 죽은 남편이 얼마나 그리우면 한밤중에 저 애가 저런 망령된 짓을 하고 있을까?” 퇴계는 너무도 처절한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괴로워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랑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 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당시로 말하면 ‘열녀는 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의 봉건 윤리관이 절대적 으로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시대인지라, 여자가 한 번 결혼하면 설사 남편이 세상을 떠나도 개가(改嫁)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퇴계 자신도 며느리가 응당 수절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한밤중에 허수아비와 더불어 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젊은 며느리의 처절한 광경을 보고 나자, 퇴계는 기성 윤리관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를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 고개를 넘은 과부가 죽은 사람을 위해 구 만 리 같은 일생을 깨끗이 희생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거기에는 무엇인가 커다랗게 잘못된 점이 있어 보였다.
인간생활에 규율을 세우기 위해 윤리관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다. 퇴계는 그것까지 부인해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윤리관이라는 것은 인간생활을 질서 있고 행복스럽게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만약 그 윤리관 때문에 사람이 희생을 당한다면 그것은 본(本)과 말(末)이 전도된 소행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버린 여자가 인생을 재출발하기 위해 재혼을 하기로, 누가 그것을 나무랄 수 있으랴!”
마침내 퇴계는 그런 혁명적인 결론을 내렸다. 젊은 과수가 죽은 남편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면 그것은 그대로 좋은 일이다. 그것은 생리적인 욕망을 초월한 정신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처럼 고매한 정신적인 결의도 없이 단순히 기성 윤리관에만 얽매어 마음에도 없는 수절을 강요한다는 것은 죄악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 절개를 지키는 것이 아무리 거룩한 일이기로 시집을 가고 싶어하는 과부에게는 시집을 가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인생의 도리일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사람을 희생시키기 위해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렇게 결심한 퇴계는 며칠 후에 사돈(査頓)을 만나, 과부 며느리를 친정에 데려가도록 종용했다. 재혼을 시키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퇴계는 서울로 올라가다가 날이 저물어, 산 속에 있는 어느 기와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 집 음식이 이상하게도 한결 같이 퇴계가 좋아 하는 반찬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산나물 가지나물 도라지나물이 모두 나온데다가, 양념도 입에 꼭 맞아서, 집에서 먹던 음식과 추호도 다를 것이 없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남의 집 음식이 이렇게도 입에 맞을 수가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려고 하자, 주인집 아낙네가 하인을 시켜서 버선 한 켤레를 선물로 내다 주기에 신어 보니, 그 버선이 신기할 정도로 발에 꼭 맞지 않는가. 그 순간 퇴계의 머릿속에서, “아! 나의 둘째 며느리가 이 집으로 개가를 온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피차간의 체면을 생각해 그것을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옛 날에는 자기 며느리였던 여자가 개가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음을 속으로 기뻐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집을 떠나 얼마를 걸어 나오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 집 주부가 담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배웅을 하고 있었는데, 먼빛으로 보아도 그 여인은 옛날의 자기 며느리였음이 틀림 없었다.
퇴계 이황과 두 며느리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하고 부정적인 면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필터를 끼우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퇴계와 맏며느리 봉화금씨
조선시대의 유학자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의 아내는 봉화금씨(奉化琴氏)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외면과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이어져 명성이 드높은 집안이었다.
퇴계가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금씨 일가 친척들이 몰려와 이렇게 따져 물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느낀 퇴계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다.
그때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두시지요.”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금씨의 묘는 지금도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금씨는 내조의 덕을 쌓고 지극한 효행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 선생의 비문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 집안의 금보(琴輔; 퇴계 선생의 백형 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퇴계와 둘째 며느리 류씨
퇴계 이황 선생은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내를 잃었다. 아들은 경상도 의령의 외가에서 키웠는데 몸이 워낙 약했다. 결국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던 때에 아들은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며느리 류씨는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퇴계 선생은 홀로 된 어린 며느리가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유교적 규범에 얽매여 남은 인생을 쓸쓸히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며느리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고, 둘째 며느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었다.
자신 역시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홀어머니가 평생 7남매를 뒷바라지하느라 당신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것을 보았기에 더욱 측은했는지도 모른다.
애처로운 며느리에 대한 퇴계의 근심은 점점 깊어갔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쌈’이라는 일종의 약탈혼도 종종 있던 시대였다. 홀로 된 여인을 강제로 보(褓)에 싸서 납치해 아내로 삼던 풍습이었는데, 퇴계는 혹시라도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집 양쪽이 다 난처해질 것 같아서 밤이 늦도록 며느리가 기거하는 후원 별당을 돌면서 보살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이었다. 후원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며느리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며느리가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깊은 밤, 홀로 된 어린 며느리 방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야심한 밤에 며느리가 외간 남자를 불러들인 것일까? 우리 며느리가 그럴 아이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퇴계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퇴계는 며느리의 방 안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며느리 방 앞까지 가서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며느리는 짚으로 만든 남편 모양의 허수아비 인형에 옷을 입혀 놓고는 그 앞에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인형과 마주앉아 산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보, 한 잔 드세요.”
며느리는 한참 동안 그 남편 인형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다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밤, 퇴계 선생은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사람이 만든 규범에 갇혀 저 젊은 며느리가 밤마다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며 평생을 수절해야 한단 말인가? 윤리와 도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을 잃은 저 아이를 평생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규범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퇴계 선생은 ‘저 아이를 가두고 있는 윤리라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며칠 뒤 퇴계는 사돈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며느리를 친정에 보냈다. ‘아가, 그 동안 남편 잃고 마음이 많이 어렵고 힘들었을 텐데, 친정에 가서 푹 좀 쉬려무나.’
그것은 사돈에게 좋은 신랑감을 물색해 새 삶을 살게 해주라는 시아버지의 묵시와 배려였다. 물론 양 집안간 사돈의 인연이 끝나는 일이라서 한편 서운하기도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퇴계와 둘째 며느리의 해후(邂逅)
여러 해가 흐른 뒤, 어느 날 퇴계 선생이 한양까지 먼 길을 가게 되었다.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데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다행히 산촌 한 인가의 불빛이 보여 그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룻밤 묵는 신세를 져야 해서 문을 두드렸다. “한양으로 가는 과객過客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 노인께서 이 밤에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아래채 방이 하나 비어 있으니 주무시고 가십시오. 저 아랫방에 이부자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도 못 하셨겠군요.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제 아내를 시켜 저녁상을 차려 드릴 테니 찬은 변변찮지만 식사하시고 주무십시오.”
“고맙소이다.”
인심이 후한 젊은 남정네가 친절하게 하룻밤 묵어가라고 방을 내주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여장을 풀고 잠시 쉬고 있는데, 저녁상이 들어왔다. 시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음식 하나하나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간이 입에 아주 딱 맞아 너무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해서 또 밥상을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전날 저녁처럼 밥상 위의 반찬들이 퇴계가 평소에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로다. 우연히 들른 집 음식이 어찌 이리도 내 입맛에 잘 맞을까?’
밥상을 물리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서려는데, 젊은 남정네는 가시는 길에 신으라며 자기 안사람이 만들었다는 버선 한 켤레를 가져다주었다. “아니, 낯모르는 과객에게 버선까지 지어주다니 너무 고맙소이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하리이다.”
버선을 신어보니 너무 편안하고 발에 꼭 맞았다. ‘꼭 우리 둘째 며느리가 지어주던 버선같이 발에 꼭 맞고 편안하군.’
퇴계가 주인과 작별하고 길을 떠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담 모퉁이에 서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여 공손히 배웅하는 여인이 있었다. 한눈에 둘째 며느리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 선생도 그 자리에 석상처럼 멈추어 서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며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쩐지 음식이 이렇게도 입에 잘 맞을까? 그리고 버선도 어찌 이리 줄로 재어 만든 것처럼 발에 잘 맞더라 했더니 아가, 너였구나. 주인의 사람됨을 보니 이제 내 마음이 다 놓이는구나. 저렇게 착하고 심성 좋은 남편을 만나 오붓하게 사는 걸 보니 앞으로는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아가,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고맙다. 너를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몰랐는데, 하늘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었구나.’
행여 재혼한 며느리의 결혼 생활에 방해가 될까 싶어 모른 체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리며 한양으로 향했다. 퇴계의 마음은 너무나 행복하고 가벼웠다.
며느리 또한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아버님,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한번 뵐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에 이렇게 아버님을 뵙게 되다니 더 이상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종종 아버님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마땅히 평생 모셔야 할 아버님이신데, 자상하게 저를 보살펴 주시고 배려해 주신 아버님께 따뜻한 진지라도 손수 지어드리고 싶었는데,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까지 오시다니 꿈만 같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큰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아버님 덕분에 저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남편은 비록 많이 배우거나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착하고 후덕한 사람입니다. 아버님, 남편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지만 안녕히 가세요. 부디 건강하시고 제 걱정은 마세요.’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때
마음에 어혈처럼 뭉쳐 있는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으면 그것들은 한이 되고 아픔이 된다. 마음을 모를 때, 마음이 막히고 닫혀 있을 때 마음에는 응어리가 생긴다. 마음에 응어리진 한과 슬픔, 마음의 모든 병과 통증은 사랑으로 치료된다.
퇴계의 며느리들이 시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만났을 때 그 사랑에 마음이 눈녹듯이 녹아내리고, 모든 응어리가 풀어지듯이.
가난해도 때때로 슬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를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진심으로 배려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고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어려움을 너끈히 이겨낸다.
마음이 교감(交感)되면 마음의 한이나 슬픔은 눈 녹듯 사라지고, 감사와 행복이 만들어진다.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영약은 바로 사랑이고 진심어린 배려다.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의 상처는 빨리 아물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해진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고, 가슴 뭉클한 감동이나 가슴 저린 그리움을 종종 맛보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행복과 사랑, 감사와 기쁨은 마음에서 느끼는 것인데, 마음을 빼앗기고 마음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음이 메말라가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없고, 마음이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다. 마음의 세계가 무르익어 잘 발효되면 겨우내 땅 속 장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먹는 김치처럼 깊은 맛이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첨단 기기들의 편리함을 선호하면서 이런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이 삭막해지고 까칠해졌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은 테크놀로지 세상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하나하나 되찾고 지켜나가야 한다. 마음이 담긴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이다. 마음이 실린 것들이 의미있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우주를 정복한다고 큰소리치고,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참된 행복은 머나먼 우주에서 찾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싹튼다.
우주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깊은 내면의 세계를 개척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혼의 정원이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 아름답다. 마음은 나누고 흘러야 맑아지고 촉촉해지고 행복해진다.
요즘 학생들을 만나 보면 마음에 없는 인사,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행복은 마음에 고이며,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소중한 마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옛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의 세계를 반추해 봄직하다.
▶️ 改(고칠 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己(기, 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己(기, 개)는 굽은 것이 바로 펴지려고 하는 일의 뜻으로, 후세의 起(기; 일어나다)와 같은 글자이다. 등글월문(攵)部는 손이나 몸으로 동작하는 일, 즉 굽은 것을 바로잡다, 태도를 고치다, 개선하다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改자는 '고치다'나 '바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改자에서 말하는 '바꾸다'라는 것은 '고쳐서 새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改자는 己(자기 기)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改자의 갑골문을 보면 巳(뱀 사)자와 攵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巳자는 사전상으로는 '뱀'이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본래는 태아를 그린 것이다. 다만 갑골문에 쓰인 巳자는 '태아'가 아닌 '어린 아이'로 해석해야 한다. 改자는 회초리로 어린아이를 훈육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고치다'나 '바꾸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改(개)는 ①고치다 ②고쳐지다 ③바꾸다 ④바뀌다 ⑤만들다 ⑥다시 ⑦따로 ⑧새삼스럽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될 화(化), 고칠 전(悛), 바꿀 역(易), 고칠 경(更), 변할 변(變), 가죽 혁(革)이다. 용례로는 새롭게 뜯어 고침을 개혁(改革), 잘못을 고쳐 좋게 함을 개선(改善), 단체의 조직 따위를 고치어 편성함을 개편(改編), 이미 정했던 것을 다시 고치어 정함을 개정(改定), 내각을 고쳐 짬을 개각(改閣), 잘못을 뉘우쳐 개심함을 개전(改悛), 나쁜 점을 고쳐 좋게 함을 개량(改良), 헌법의 내용을 고침을 개헌(改憲), 제도나 기구 등을 고치거나 폐지하는 것을 개폐(改廢), 원고를 고치어 씀을 개고(改稿),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침을 개정(改正), 고쳐서 오히려 나빠짐을 개악(改惡), 두 번째 고침으로 다시 고침을 재개(再改),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을 회개(悔改), 고치는 것을 꺼림을 탄개(憚改), 새롭게 뜯어 고침을 혁개(革改), 바꾸어 고침을 변개(變改), 글자를 지우고 고침을 말개(抹改), 써 놓은 글자를 문질러 지우고서 고침을 찰개(擦改),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어 착하게 됨을 일컫는 말을 개과천선(改過遷善),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 짐을 일컫는 말을 개과자신(改過自新), 허물을 고침에 인색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개과불린(改過不吝), 일의 근본은 고치지 않고 단지 그 겉만을 고침을 일컫는 말을 개두환면(改頭換面), 새롭게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음을 일컫는 말을 개선광정(改善匡正), 차고 다닐 옥의 종류를 바꾸면 걸음 걸이도 바꾸어야 한다는 뜻으로 법을 변경하면 일도 고쳐야 한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개옥개행(改玉改行),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법령의 개정이 너무 빈번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법령의 개정이 너무 빈번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조령석개(朝令夕改), 아침 저녁으로 뜯어 고친다는 뜻으로 계획이나 결정 따위를 자주 바꾸는 것을 이르는 말을 조변석개(朝變夕改),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또 바꾼다는 뜻으로 일정한 방침이 없이 항상 변하여 정하여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조개모변(朝改暮變), 아침 저녁으로 뜯어고친다는 뜻으로 계획이나 결정 따위를 자주 바꾸는 것을 이르는 말을 조석변개(朝夕變改),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이라는 뜻으로 그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을 과이불개(過而不改), 잘못을 하면 즉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만 가지로 깨닫게 가르치다는 뜻으로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만단개유(萬端改諭) 등에 쓰인다.
▶️ 嫁(시집갈 가)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거두어 '들이다'의 뜻(稼; 가)을 나타내기 위한 家(가)를 더한 글자이다. 시집온 여자(女子), '시집가다'의 뜻이다. 또 '떠넘기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嫁(가)는 ①시집가다 ②시집보내다 ③떠넘기다 ④가다, 향하여 가다 ⑤시집,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장가들 취(娶)이다. 용례로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가취(嫁娶), 시집가게 된 나이나 시집갈 만한 나이를 가기(嫁期), 여자가 혼인할 때에 쓰는 비용을 가자(嫁資), 화를 남에게 넘겨 씌움이나 재앙을 남에게 전가 시킴을 가화(嫁禍), 개가한 어머니를 가모(嫁母), 딸을 시집보냄 또는 출가한 여자를 가녀(嫁女), 시집을 간 여자가 친가로 되돌아오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을 가반(嫁反), 죄를 남에게 덮어 씌움을 가죄(嫁罪), 상은 19세 이하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미혼자의 죽음을 가상(嫁殤), 허물이나 책임 따위를 남에게 넘겨 씌움을 전가(轉嫁), 결혼하였던 여자가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함을 개가(改嫁), 처녀가 시집을 감을 출가(出嫁), 지체가 높은 왕족의 딸이 자기 집보다 지체가 낮은 신하의 집으로 시집감을 강가(降嫁), 출가시킴 또는 출가함을 교가(交嫁), 법으로 금하는 혼인을 함을 범가(犯嫁), 딸을 시집 보냄을 여가(女嫁), 여자가 다시 시집가서 사는 일을 후가(後嫁), 시집 간 것이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새로운 변화를 구하여 보았지만 그전보다 못하다는 뜻의 속담을 가불여재가(嫁不如在家), 아들은 장가 들이고 딸은 시집 보낸다는 뜻으로 자녀의 혼인을 이르는 말을 남혼여가(男婚女嫁), 시집갈 때 등창이 난다는 뜻으로 일이 임박해서 공교롭게 난데없는 장애가 생김을 이르는 말을 임가환종(臨嫁患腫), 여자의 개가를 금지하던 일을 개가금색(改嫁禁塞), 출가한 딸은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출가외인(出嫁外人)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 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자손의 여러 대나 자손의 끝까지 또는 대대 손손을 일컫는 말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자자손손의 썩 많은 세대를 자손만대(子孫萬代),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뜻으로 부자지간의 천륜을 이르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도 남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을 공자천주(孔子穿珠), 묵자가 실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사람은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품이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망자계치(亡子計齒),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등에 쓰인다.
▶️ 婦(며느리 부)는 ❶회의문자로 妇(부)의 본자(本字), 妇(부)는 간자(簡字)이다. 시집와서 빗자루(帚)를 들고 집안을 청소하는 여자(女)로 아내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婦자는 '며느리'나 '아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婦자는 女(여자 여)자와 帚(비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帚자는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帚자에 女자가 결합한 婦자는 집 안을 청소하는 여자를 표현한 것으로 '며느리'나 '아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시집온 여자들의 삶이 엿보이는 글자이다. 그래서 婦(부)는 ①며느리 ②지어미 ③아내 ④여자 ⑤암컷 ⑥예쁘다 ⑦정숙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내 처(妻),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시어머니 고(姑)이다. 용례로는 결혼한 여자를 부인(婦人),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부녀(婦女), 여자가 지켜야 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를 부덕(婦德), 주로 부녀들이 짓고 부르는 민요를 부요(婦謠), 부인의 공덕이나 공적을 부공(婦功), 여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부도(婦道), 여자의 권리를 부권(婦權), 여자의 말씨를 부언(婦言), 여자의 몸 맵시를 부용(婦容), 아내와 동성동본인 겨레붙이를 부당(婦黨), 길쌈이나 바느질 따위의 부녀자들의 일을 부직(婦職), 고모부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을 부질(婦姪), 아내의 아버지를 부공(婦公), 처남인 자기자신으로 주로 편지에서 매부에게 자기를 가리킬 때 쓰는 부제(婦弟), 장인인 나로 편지나 글 따위에서 사위에 대하여 스스로를 가리킬 때 쓰는 부옹(婦翁), 남편과 아내를 부부(夫婦), 한 집안의 주인의 아내를 주부(主婦), 간악한 여자를 간부(奸婦), 요사스러운 여자를 요부(妖婦), 갓 결혼한 색시를 신부(新婦),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고부(姑婦), 남편이 죽어서 혼자 사는 여자를 과부(寡婦), 범절이 얌전하고 용모와 재질이 뛰어난 신부를 가부(佳婦), 잔치나 술집에서 손님에게 술을 따라 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여자를 작부(酌婦), 여자의 말을 무조건 옳게 쓴다라는 뜻으로 줏대 없이 여자의 말을 잘 듣다는 의미의 말을 부언시용(婦言是用),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는 뜻의 말을 부로위고(婦老爲姑), 남자로서 여자처럼 편벽되고 좁은 성질을 일컫는 말을 부인지성(婦人之成), 여자의 소견이 좁은 어진 마음을 일컫는 말을 부인지인(婦人之仁),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를 일컫는 말을 필부필부(匹夫匹婦), 땔나무를 하는 아이와 물을 긷는 여자라는 뜻으로 보통 사람을 뜻하는 말을 초동급부(樵童汲婦), 남편이 주장하고 아내가 이에 따름으로 가정에서의 부부 화합의 도리를 이르는 말을 부창부수(夫唱婦隨), 오륜의 하나로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부부 사이에는 인륜상 각각 직분이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할 구별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부유별(夫婦有別), 정혼하고 배우자가 죽어서 시집도 가보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거나 혼례는 했으나 첫날밤을 치루지 못해 처녀로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을 망문과부(望門寡婦), 악처는 남편의 일생을 망칠 뿐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고 자손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침을 일컫는 말을 악부파가(惡婦破家)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