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의 고비 / 최승호
고비에서는 고비를 넘어야 한다
뼈를 넘고 돌을 넘고 모래를 넘고
고개 드는 두려움을 넘어야 한다
고비에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땅의 고요 하늘의 고요 지평선의 고요를 넘고
텅 빈 말대가리가 내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고비에는 해골이 많다
그것은 방황하던 업덩어리들의 잔해
고비에서는 없는 길을 넘어야 하고
있는 길을 의심해야 한다
사막에서 펼치는 지도란
때로 모래가 흐르는 텅 빈 종이에 불과하다
길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 최승호 시집 <고비 Gobi>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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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뜻의 고비.
고비사막을 건너는 법은 고비를 잘 넘는 데 있다. 고비사막에서
가장 힘든 것은 곳곳에 널려 있는 뼈와 해골, 돌과 모래뿐인
척박한 땅이 아니다. 동서로 1천6백 킬로미터 남북으로
8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하늘과 땅과 자연이 펼쳐
놓은 황량한 고요, 고비에서 방황하고 주저앉은 업덩어리들의
잔해, 그리고 고개 드는 두려움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있는 길을 의심하고 없는 길을 만들고 넘어야
한다. 용기와 도전정신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껏 걸어온 길은, 과거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한바탕 모래바람이 쓸고 지나간 뒤 사막에서 펼치는 과거라는
지도는 텅 빈 종이조각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삶에 고비를 맞았다면, 길을 잃었다면 고비의 한복판에서
고비를 넘어야 한다. 여러 해 전 제법 긴 시간 동안 고비사막에
머물렀던 최승호 시인이 이렇게 고비의 고비를 넘었을 것이다.
/ 곽효환 시인
나를 찾아 텅 빈 사막을 걷다, 최승호 시집 <고비 Gobi>
“고비 사막에 가면, 아침에는 봄, 한낮에는 여름,
해질 무렵이면 가을, 한밤중에는 겨울입니다.”
최승호 시인은 지난해 5월 고비 사막에서 열흘을 지냈다.
하루에 사계가 진행되는 그곳에서 그는 사실 10년을 보낸 셈이다.
시간의 압축 체험 때문인지, 그의 신작 시집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마치 바람에 날리는 사막의 모래처럼 모든 것은
부드럽게 허망하게 떠돌아다니다가, 어딘가로 사라진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사실 지평선은 직선이 아니고, 활처럼
휘어있는데,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였다”고 말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사막이
보인다.
‘어느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 지평선, 부분
앞으로 간다고 하지만, 결국 제자리 걸음에 불과한 단순한
인생이 복잡하게 여겨지는 것은 온갖 욕망과 환상 때문이 아닐까.
거대한 원의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시선이 있기에
지향점이 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처럼 바닥을 모르는
욕망의 심연이 우리를 헤매게 한다. 최승호 시인은 거대한
사막에서 모래알처럼 작은 인간의 헛됨을 깨닫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헛됨의 끝에 있을 공허에서 역설적으로 존재를
깨닫는다. 그것은 모든 만물에 神이 깃들어 있다는 物活論적
상상력의 펼침이다. ‘꽃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피어날
수 있으며/ 새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무들을 믿고
물고기들을 믿는다’ (- 입적, 부분)라는 시인의 노래는
‘무신론자의 神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막은 황폐하다고
하지만, 시인에게 사막은 새로운 시의 샘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입증한다. 폐허는 새로운 창조의 공간인 것과 같다.
창조는 기존의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지갑이 없다/ 휴대폰이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모래알 몇 개/ 그게 내 전 재산이다/ 나는 지금 가난하다/
카드가 없다/ 현금이 없다/ 주머니엔 모래알 몇 개/
알몸에 옷을 걸쳤지만/ 나는 지금 거지다/ 고비 사막에
나타난 거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때때로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는/ 인생을 모르는 거지/ 사막을 모르는
거지’
- 거지, 부분
/ 2007.01 박해현 기자
최승호 시인 - EBS 초대석
[출처] 최승호 시인 19|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