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있긴 하지만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영조에게는 어느 정도 정신병이 있었다. 현대 학자들은 영조의 이런 정신병을 편집증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 이런 영조의 증세는 실록 등 정식 기록물에서도 간접적으로 추리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료가 상당한 편이지만 아무래도 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은 한중록이라고 볼 수 있다. 한중록은 영조의 편집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상략) 말씀을 가려 쓰셨는데 '죽을 사(死)자', '돌아갈 귀(歸)자'는 모두 꺼려 쓰지 아니하시니라. 또한 정무회의 때나 밖에 나가서 일을 보시며 입으셨던 옷은 갈아입으신 후에야 안으로 드셨고, 불길한 말씀을 나누시거나 들으시면 드실 제 양치질하고 귀를 씻으시고1) 먼저 사람을 부르셔서 한마디라도 말씀을 건넨 다음에야 안으로 드셨느니라.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을 하실 제는 출입하는 문이 다르고,2) 사랑하는 사람 있는 집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함께 있지 못하게 하시고,3) 사랑하시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하시니라. 이처럼 사랑과 미움을 드러내심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하시니라.(하략)"
-한중록 중에서-
한중록의 묘사대로 한다면 영조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구분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불행히도 사도세자는 어릴 때는 사랑을 받는 축이었던 것 같지만 그 이후에는 미움을 받는 축에 속했다고 봐야 될 것이다. 특히나 미움을 받게 되면서 영조는 세자가 안 좋은 일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는지 날이 가물때마다 "이는 소조가 덕이 없어 이러하노라." 이런 말을 자주 내뱉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질책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이다. 물론 세자의 결정등에 대한 칭찬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질책도 상당했고, 그 강도가 엄청났다. 이는 세자 자신 뿐만 아니라 대소신료들도 질책의 강도가 문제가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대리청정을 한 지 2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영의정 김재로(노론)가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가 어린 나이에 대리를 잘 하고 있는데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한다며 걱정하는 뜻을 아뢸 정도였다. 영의정 이렇게 말할 정도로 영조의 책망이 지나쳤던 것이다. 실제로도 책망, 꾸중의 수위가 대리 이전과 비교하여 그 이후가 상당히 상승한 편이었다.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일반적인 대리청정의 경우 왕이 이 정도로 강하고 빈번하게 세자를 꾸중하거나 책망하지는 않았다. 아니 안 그러는게 본래는 정상이었다. 숙종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때 한 번 세자의 처사에 '진실로 지나쳤다'는 식의 비망기로 책망 한 번 했다가 되레 신하들의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 만큼 세자의 자율권이 보장되야 하는게 대리청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애초에 뭔가 이상했던 대리청정이라서 그랬는지, 영조의 카리스마때문이었는지 영조가 세자를 자주 책망하고 꾸중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김재로의 상소 정도를 제외한다면 이에 대해 문제 삼는 상소나 발언도 별로 없었다.
- 사극 이산의 한 장면. 영조가 세손을 질책하는 대목이라고 한다. 실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도 비슷한 식으로 진행된 듯 하다.-
유교 사회가 가부장적이고 나이, 서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상호 존중 역시 강조되는 편이다. 특히나 유교 문화권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꾸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 정도가 지나친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편이었다. 삼강 오륜의 하나인
부자유친의 뜻 중 일부가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자해야 한다' 라는 점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인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하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에 감히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점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게 된다.
- 사도세자는 점점 심해지는 영조의 질책, 꾸중 속에 점점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세손의 탄생>
대리를 시작한 지 1년 후인 1750년. 혜경궁이 회임을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합례를 치룬 지 불과 1년. 금슬이 좋았던지
4) 아직 16세밖에 안 됬는데 벌써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부모가 된 것이다. 물론 지금 시각에서야 이건 엄청 일찍 부모가 된 셈이지만 당시는 조혼이 성행했던 만큼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 사도세자를 제외하면 영조에게는 남자 혈육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첫 손주가 아들이니 새 후계자가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일단 실록 상으로 영조는 이 일에 대해 기뻐하였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손이 태어난 지 2일 후에 반포한 교서에서는 훌룡한 손자를 보았으며 이 손자가 효종과 같은 달에 태어났다는 점을 들어 세자를 칭찬하고 하늘에 감사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한중록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하필 영조가 아끼고 사랑하던 화평옹주의 상사 기간에 태어난 아이인지라 영조가 처음에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한중록은 그 이유를 영조가 아무리 자신의 딸들을 아낀 까닭에(화협옹주는 논외) 화평옹주의 상사 기간에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영조는 금슬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 혜경궁을 임신시킨 것때문에 세자를 안 좋게 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물론 이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곧 영조는 태도를 바꾸게 된다. 같은 해 9월 영조는 온양 온천으로 거둥하게 되는데 한중록에 의하면 온양으로 떠나기 전 날 영조와 선희궁이 갑자기 와서는 원손의 몸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어깨의 푸른 점과 배의 붉은 점을 보고는 갑자기 원손을 귀여워하기 시작했다고 서술되어있다. 혜경궁은 그 이유를 영조와 선희궁이 원손을 화평옹주의 환생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5) 하여튼 이후 영조는 세손을 귀여워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듬해 5월. 아직 돌도 안 된 원손을 전례
6)와는 달리 아주 빨리 세손으로 정한 데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1752년 3월. 즉 영조 28년 3월에 세손이 병을 앓더니 곧 죽고 말았다. 혜경궁과 세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상심에 빠졌다. 죽은 세손의 시호는 얼마 안 가 의소로 정해졌고 5월에 양주 안현 남록 산향원에 장사지냈다.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소세손예장도감 의궤의 한 장면. 출처는 연합뉴스-
그러나 의소 세손이 죽을 당시 임신했던 혜경궁이 같은 해 9월 다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후세에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고 본 시리즈의 2부인 '임오화변 그 이후'의 주인공이 될
정조였다.
1): 이렇게 귀를 씻은 물은 보통 화협옹주의 처소나 집 쪽으로 버렸다고 한다. 화협옹주는 영조의 딸들 중 유일하게 사랑받지 않았는데 이는 효장세자가 죽은 이후 한창 아들을 바라고 있을 때 태어난 딸이기 때문이었다.
2): 훗날 뒤주의 참극이 벌어질 때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으로 들어갔는지만 듣고도 오늘 나쁜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3): 나중에 다루겠지만 세자는 이로 인한 영조의 분노때문에 담을 넘어야 했다.
4): 전반적으로 혜경궁과 세자의 금슬은 좋았던 편인듯 하다. 영조가 자신의 아내 정성왕후를 쌀쌀맞게 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5): 한중록에 의하면 의소세손을 임신했을 때 꿈에 자주 화평옹주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간접적인 묘사지만 한중록에는 영조와 선희궁 역시 화평옹주와 원손을 연관시킬만한 꿈을 꾼게 아닌가 혜경궁이 추측하는 듯한 서술이 있다.
6): 보통 전례대로라면 원자든 원손이든 8살이 되어서야 정식 후계자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