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트성 전체를 맑은 날 한꺼번에 렌즈에 넣어서 촬영
▲ 볼트성 안내서가 있는 반대쪽에서 잔디밭 가운데 보도블록으로 접근하는 길
▲ 성을 쌓아올리는데, 잔디밭과 높이 및 구도에 세밀한 계산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볼트성을 바라보는 위치나 각도가 조금만 달라도 그 맛이 다르다.
▲ 볼트성 안내서가 있는 언덕받이쪽에서 쳐다보는 성의 모습
볼트(George C. Boldt)에게 찾아온 운명은 1912년 타이타닉 참사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여 너무나 유명한 존 제이컵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Ⅳ : 1864 ~1912)가
언젠가 벨뷔 호텔(Bellevue hotel)의 경영내역을 조사하여, 볼트의 기술과 비즈니스에
관한 통찰력을 직접 배웠었다. 그러던 애스터가(家)에서 볼트의 사업성공에 크게 도움
을 주었다. 애스터(Astor)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인 월돌프 애스토리아(Waldorf
Astoria)에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볼트와의 관계를 맺은 후 애스터는 볼트를 그 호텔의
소유관리자로 임명하였고, 이 비즈니스가 성공하여 수백만 달러를 벌어 들였으며, 얼마
후에는 볼트는 이 호텔의 명실상부한 소유주가 되었다.
▲ 볼트성을 성 바깥으로 한바퀴 돌면서 성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촬영
▲ 볼트성을 성 바깥으로 돌면서 성 측면에서 잔디밭을 넣어서 촬영
▲ 볼트성의 성 측면으로 돌아서 가까이 가는 길
▲ 볼트성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섬세하면서도 디자인에 심혈을 기우렸다.
▲ 볼트성을 돌아보면서 주위의 디자인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 볼트성의 앞면과 옆면의 모서리 측면을 주안점으로 촬영한 사진
우리가 흔히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세계의 부호들은 어떻게 돈을 모아서, 부(富)의 축
적에 성공하였는지를 알아보게 된다. 미국에서 최초의 억만장자는 독일계 이민자로 비
지니스맨, 상인, 투자자로 성공하고, 미국에서 첫 신탁의 창립자였던 존 제이컵 애스터
(John Jacob Astor : 1763~1848)였다. 그가 바로 미국 애스터가문의 창시자로, 그의
독일이름은 요한 야코브 아스토르(Johann Jakob Astor)이었다. 신성로마제국(神聖羅
馬帝國 /라틴어 : Sacrum Romanum Imperium/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 800 혹은 962~1806)의 발도르프(Walldorf : 현재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 Baden-
Württemberg주에 속함)에서 태어나 미국독립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오대호를 중
심한 모피무역에 성공하고, 점차 캐나다와 미국 서부와 태평양연안까지 그 영역을 넓혀
돈을 모은 후 뉴욕 부동산을 사들여 대부자가 되었다.
▲ 미국의 클레이턴 섬 투어 안내지 - 그린스톤섬、웰즐리섬、힐섬이 보이고
알렉산드리아베이 및 클레이턴의 항구도 표시되어 있고, 볼트성도 표시해 두었다.
▲ 볼트성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돌면서 멀리서 가까이서 촬영
▲ 볼트성의 외곽을 완전히 한바퀴 돌고 섬 가운데로 난 숲길과 하트가든을 촬영
애스터가(家)의 부(富)를 이어받아 뉴욕의 최대부호로 꼽히던 제이컵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Ⅳ : 1864~1912)는 아바 로울 윌링(Ava Lowle Willing : 결혼생활 1891~
1910/생애 1868~1958)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여 결국 이혼하고 만다. 그런데 재혼
한 여인은 겨우 18살의 매들랜 애스터(Madeleine Talmage Force Fiermonte : 결혼생
활 1911~1912/생애 1893~1940)였다. 그녀는 당시 애스터 4세의 외아들인 빈센트 애
스터(Vincent Astor :1891~ 1959)보다 한살이 어렸다. 뉴욕 사교계의 구설에 오른 애
스터 4세는 아름다운 새 신부와 유럽 장기여행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부인 마들랜이 임
신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는 미국에서 낳고 싶다' 는 부인의 희망에 따라 미국으로 귀국
하면서 부부가 함께 타이타닉호에 승선한다.
▲ 볼트성의 내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이다.
▲ 볼트성의 1층 테라스에는 돌로 만든 큰 의자가 놓여있다.
▲ 볼트성 안으로 들어간 1층 입구 홀 로비 모습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1>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2>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3>
▲ 조지 볼트와 루이스 볼트 부부 사진
▲ 루이스 볼트가 두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두었다.
▲ 볼트성 안에 들어서면 실제로 관광객이 몹시 붐비는 계단이 로비에 있다.
결국 타이타닉호의 승객 중 가장 부자였던 애스터 4세는 배가 침몰하자, 여자와 아이만
구명보트에 탈 수 있다는 규칙에 따라 임신한 마들랜과 간병인들만 구명보트에 먼저 태
웠다. 그리고 자신도 보트에 타기위하여 2등 항해사 라이톨러(Charles Herbert Lightoller :
1874~1952)를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원리원칙을 지켜 거절하자 무리수를 두지 않
고 타이타닉과 함께 바다 속에 잠겼다. 서른살이 넘는 나이 차이로 눈총을 받았었지만 마
들랜은 남편 애스터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는다. 물론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빈센트 애
스터가 최대 상속자였지만, 그 유산의 일부라고 해도 엄청난 재산이었다. 그녀는 자신만
의 방식으로 남편을 기리면서, 그 당시 건립하고 있던 뉴욕 맨해튼의 최대 성공회 성당에
어마어마한 건립자금을 기부하였다.
▲ 볼트성 안의 위층에서 내려다 본 1층 로비 모습
▲ 1층 로비 중앙의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볼트 아내 루이스의 사진
▲ 아내 루이스와 딸 클로버를 위한 방: The Room for Mrs.Boldt & Miss Boldt.
▲ 루이스 볼트와 딸 클로버 볼트를 위한 모녀를 위한 방
▲ 아늑한 1층 침대방 모습
볼트(George C. Boldt Sr.)는 루이스와 26년간 결혼 생활을 하였다. 이들 사이에 태어
난 자녀는 아들인 조지 볼트 주니어(George Charles Boldt Jr. : 1879~1958)와 딸 루
이스 클로버 볼트(Louise Clover Boldt : 1883~1963)가 있었다. 아내 루이스(Louise)
가 죽고 나서, 볼트(Boldt)는 뉴욕으로 돌아와 호텔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
나 그는 항상 허전한 가슴으로 마음의 안식처가 없이 지내면서 1916년12월5일 죽을 때
까지 그의 아내 루이스(Louise)를 한 번도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아내
를 사랑하던 그 자신도 끝내는 슬프게도 자신이 소유 경영하는 월도프·애스토리아 호텔
(Waldorf-Astoria Hotel)의 자기 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그때 조지 볼
트의 나이는 65세였다.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1>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2>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3>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4>
▲ 볼트성 안에 있는 당구장
▲ 볼트성 안에 있는 무도실(舞蹈室 : Ballroom)이다.
이 무도실 바깥으로 이태리정원이 보이고, 앞 사진에 있는 터널 윗쪽과 같은 높이다.
▲ 무도실(舞蹈室 : Ballroom)이 사진 한장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아 이렇게도 촬영.
- 무도실이라면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함께 춤을 추는 어릴적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첫댓글 2세를 미국에서 낳고싶어하는 아내를 위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결국 혼자라는것.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