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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와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중원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後漢<東漢>, 25∼220)이 멸망하고 220∼589까지 16국 시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북조(北朝)를 통일하였고 분열된 중원을 양견(楊堅)이 581년 북주(北周)의 왕실을 폐하고 나라를 개창하고 수를 건국한다. 이어 589년에는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서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원을 평정한다. 이로써 고구려와 수나라는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명분아래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국제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북쪽의 돌궐과 고구려를 압박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수는 상호 사신을 보내 각국의 정세와 지리를 염탐하였다. 수가 비밀리에 3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 陽王)은 침략야욕에 맞서 598년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게된다. 그리하여 수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지만 강이식 장군에게 수나라 30만 대군은 불귀의 객(不歸의 客)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수나라의 1차 침입이다. 2차 침입 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수의 30만 대군을 전멸시켰다면 1차 침입에서는 또 다른 영웅 강이식 장군이 있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에 가려 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며 이에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수(隋)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597년(영양왕 8)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의 영양왕을 자신의 신하처럼 묘사했습니다. "고구려의 요수(遼水, 遼河)보다 수의 장강(長江, 揚子江)이 길고 한 명의 장군으로 고구려쯤은 능히 정벌할 수 있으니(후일 당태종도 당군의 군세(軍勢)만 믿다가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참패한다) 수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오만 무례한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隋文帝 開皇十七年 高麗王湯聞陳亡 大懼 治兵 積穀 爲拒守之策是 歲常賜湯 爾書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挾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酒心易行 卒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方彦也…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麗之人多少 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隋志>
개황 17년 수 문제는 고구려가 진(陳)이 수나라에 패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음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사를 징모하는 한편 군량을 비축하여 국방에 대비한다는 첩보를 보고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책망하노니, "고구려가 번국(蕃國)이라 하나 성의가 없으니 중원 변경의 작은 지방으로서 인구가 적고 땅이 좁다고 하여도 그 왕을 한 번 내치면 공석으로 둘 수 없고 새로 통치자를 정해야 하는데 있는 왕을 위무하니 왕이 말하는 요하가 크다고 하나 장강과 같지 못하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하나 진나라(陳) 인구만 못하니 마음을 돌려 신복하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니 짐이 없다면 누가 (고구려를) 보전케 하랴! 그대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고자 한다면 큰 힘을 들일 것도 없이 한 장수를 보내 문책할 것이나 은근히 이르나니 왕호(王號)를 허락하는 바 그간 생각을 새로이 하기 바라오." 라고 국서를 보냈다.
천하를 호령하고 사해를 평정한 태왕(太王)의 나라 고구려에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애송이 수나라가 병력만 믿고 모욕적인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대책에 들어간다. 강이식이 무력으로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영양왕은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였다.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은 수성전을 벌이자 고구려군은 임유관(현 山海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그 해 6월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삼아 30만 대군을 임유관(山海關)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아 해로를 통하여 평양을 치고자 하였다. 강이식은 5만의 정병을 이끌고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요서(遼西)로 나아갔다. 그는 주나후의 수군(水軍)이 평양으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양(諒)을 지원하는 보급선단임을 간파하고 수군(水軍)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급습하여 섬멸시키고 많은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여 수나라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군중(軍中)에게는 벽루(壁壘, 성채<城砦>)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았다.
수군(隋軍)은 군량이 떨어지고 후속 보급이 끊기게 되자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수나라 장수들은 회군의 불가피 함을 수문제에게 알려 회군을 시작하여 패수(浿水)를 건너니 임유관(山海關)은 이미 고구려군이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용맹과 강이식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술 앞에서 30만 수군은 거의 섬멸되고 싸우지 않고 달아난 자는 굶어죽고 과거 조선(BC 2,333∼BC 108)과 한나라(BC 202∼AD 8, 前漢)의 국경지대였던 패수(浿水)변의 임유관 일대는 시체로 뒤덮였다. 전투병은 30만이었지만 운량병(運粮兵)까지 합하면 약 100만의 시체가 널려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시황(재위 BC 246∼BC 210)과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 재위 BC 202∼BC 195)이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이후 수나라에서 고구려 요동출정군(遼東出征軍)이라 하면 결사도피(決死逃避)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의 강력함은 민간에 널리 전해져 공포를 심어줬습니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 -- 9월 기축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10중 8, 9였다.
수 문제(隋 文帝)는 애써 "군사들은 운량관의 잘못으로 군량미가 떨어져 죽고 수군은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 고 공포하여 혼란한 민심을 달래고 정치적 모면키 위해 고구려와의 휴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화친의 국서(國書)를 영양왕에게 보내왔다.
수부총관(征隋副摠管)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계속 추격하여 수문제가 머무는 동도(東都:東京, 현 낙양<洛陽>)를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겠다고 表를 올려 명령을 받았지만 고구려 역시 손해가 적지 않았고 백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전쟁을 종결짓기로 하고 수나라 왕에게 답서를 보낸다.
大高句麗皇帝致書于隋文王麾下耳往時天道不順以天下大亂群雄厥起於四方而萬民陷墜塗炭之際貴王門?義伐凶終乃鎭壓海內一統乎此非但貴王室家之譽誠天下萬民之大幸焉朕亦如此蓋世之盛遠爲慶幸不己之念焉雖然今此不想侵功我彊境不法無謀之擧乎遼西之土本不隋地也我皇朝累世宗社絶不侵他邦往時魏妖將母丘儉犯境來侵以後連年兵擾于今矣昔旣漢高祖劉邦和朝鮮約定于浿水爲界詳悉故事之明然依考爲之如促王之察焉今番大戰於兩後而隋國軍兵橫死於遼西浿水之?者無數而朕亦憐憫不己是今接王表至此果見認前過之悔是幸則今擧者王之傍側妄臣之誤乎以慰朕慮兼且由望願後好以不咎先愆以垂深慮也留不具比平陽九年冬至大高句麗國皇帝 戒書. 漏錄補記
(대고구려 황제는 대 수문 왕에게 글월을 보내노니 지난날 천도가 불순함으로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뭇 호걸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만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그대 왕문에서 대의를 잡고 일어서서 흉악한 무리들을 진압하고 해내를 안정하였는바 이는 비단 그대 왕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천하 만방에 다행한 일이라. 짐 또한 이와 같은 세상을 덮는 대덕을 멀리서 경행한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 뜻밖에 우리 나라를 침공함은 불법무도한 행동이라 요서는 본래 수나라의 땅이 아니며 우리 나라는 열성조 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아니하는데
지난날 위 나라의 요망한 장수 모구검이 우리를 침범한 후부터 지금까지 침략을 계속하였는바 옛날에 한 고조와 조선사이 패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약정을 하였으니 자세히 그 사실을 살펴서 참고하여 주기 바라며, 이번 대전은 이웃나라끼리 싸워서 수나라군병이 요서와 패수에서 다수 죽어 짐이 또한 연민하는 바이고 왕의 표를 접하여 보니 과연 전과를 뉘우침이라. 지난 일은 필연코 측신에 망령된 자가 있어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로써 위로하는 짐의 뜻을 전하는 바이요. 또한 이웃끼리의 친선을 위하여 지난날을 허물치 아니하며 앞날의 선린을 원하는 바이오.)
강이식장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
고구려 영양왕(?陽王)때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장군이 진주강씨의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강이식장군은 수나라 예부랑(禮部郞) 강문성(姜文星)의 아드님으로 수(隋)나라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있다가 정적들의 모함을 받자 동족을 찾아 고구려에 귀화하셨다는 설(조선상고사, 국어사전)도 있고, 金光鎭(1982), 宋永奉(1994)과 曺治根(1996)도 영양왕 18년 (607년)에 고구려에 귀화했다 하고, 宋明煥(1986)이나 朴永根(1994)도 강이식장군이 수나라 병마사로 있다가 장차 수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고 해로로 고구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고 소개하고 쓰고 있으나 臨溪亭(1986)이라는 책에는 강이식장군이 수나라에서 귀화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고, 민속학자이며 사학가이며 소설가인 강무학(姜舞鶴)의 저서 성장(聖將)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하면 강이식장군은 고구려 서해변점선현(西海邊?蟬縣 : 현(現)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군(龍岡郡) 귀성면(貴城面))이 고향(故鄕)이고, 부친은 강철상(姜哲尙)으로 이 어른은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 서기 545년-558년)때 상서원(尙書院)에서 시랑(侍郞) 벼슬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돌궐(突厥) 나라에서 수나라의 사주(使嗾)를 받고 고구려에 침입(侵入)하므로 공이 자원(自願)하여 군인으로 출정(出征), 공(功)을 세운 분이이라고 금석문(金石文)에 의거(依據) 고증하였다. 현재 이 설이 다수설이라 하겠다.
강철상 시랑은 문무(文武)가 겸전(兼全)한 분으로 아들 이식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나이 열 살이 되매 능히 말을 타고 달리며 총명(聰明)하여 일취월장(日就月將) 자라났다.
강이식장군의 나이 15세 때는 구십척짜리 철퇴(鐵槌)를 능히 마상(馬上)에서 구사(驅使)하고 진법(陳法)을 이루었다.
강이식장군은 점점 자라나면서 풍채(風采)도 좋고 체격이 웅대(雄大)하며, 기력(氣力)이 장대하였다. 서기 573년(평안왕 15년) 나이 24세 때에 동명대회(東明大會)에서 장원한 준재(俊才)이다. 따라서 강이식장군은 서기 550년에 태어났다고 추리(推理)된다.
그 후 강이식장군은 부친의 뜻을 받아 서부(西部) 총관부(摠管府)에서 벼슬하며 돌궐(突厥)과 계단(契丹 : 거란), 또 말갈(靺鞨)에 여러 차례 사신(使臣)으로 갔었다.
그 뒤 동명대회(東明大會)에서 장원(壯元)한 후 아직 보직(補職)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 장군이 서기 592년(고구려 영양왕 3년)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摠管) 강이식 장군을 찾아와 [장군님 휘하에서 일하고 싶어 왔습니다] 라고 하여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功)으로 강이식 장군은 병마 도원수, 을지문덕 장군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昇進)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진주강씨교리공파 인터넷족보에도 기록되어 있다.
597년 수 문제는 중국을 통일한지 17년이 지나 양식도 풍부하고, 병력도 많아 천하제국이 모두 두려워하고, 수 문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고구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영양왕(陽王)이 즉위(卽位)하여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미리 내다본 나머지 성곽을 수축(修築)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군량을 비축하기에 모든 힘을 다하던 중, 수 문제는 고구려침략의 구실을 찾기 위하여 영양왕(?陽王) 8년(597년)에 ?고구려왕이 직접 입조(入朝)하라?는 내용의 극히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국서를 보내왔는데 고구려 조정에서는 모두 대노하였지만 수나라 병력이 두려워 갑론을박하며 대책 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는데
대장군 강이식장군은 ?이 같은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글이라?며 분연히 일어나 국서를 찢어버리고, 영양왕을 안심시키자 영양왕께서는 강이식장군에게 병마강이식장군을 명하고, 먼저 수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강이식장군은 예(濊)병(수나라 자료에는 말갈(靺鞨)이라고 함) 1만으로 요서(遼西, 만리장성 서쪽 영평부)를 공격하여 수병(隋兵)을 유인하고, 스스로 정병 5만을 지휘하여 전략요충지인 임유관(臨留關, 지금의 산해관)을 점령하였고, 다음해는 글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산동(山東)을 치게 하고, 강이식장군께서는 다시 요서를 공격하던 중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 장충이라고도 함)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하니 수 문제는 계략에 빠진 줄도 모르고,
이 때를 놓칠세라 한왕(韓王) 양량(楊諒. 수 문제의 넷째 아들)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官)으로 삼아 정병 30만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처 들어오고, 주라후(周羅?)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평양으로 향하는 척 하면서 양선(糧船) 을 요해로 들어가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려고 하였으나 강이식장군 은 이를 미리 알고, 수군(水軍)을 시켜 양선(糧船)을 파하고, 성벽을 높이 쌓아 지키기만 하니 수나라 군사는 요서의 유성(柳城)까지 나왔다가 군량미는 떨어지고, 6월 장마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니 견딜 수 없어 철수할 때 강이식장군이 이를 추격하니 수나라 군사는 전멸하다시피 하고, 수 문제만 겨우 도망갔으며 그 뒤로는 수 문제가 10여 년 동안이나 얼씬도 하지 못하여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강이식장군의 임유관 대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쾌거이며 최대의 전과다. 나라를 구하고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그 후 수 문제가 죽은 후 양제(煬帝)가 즉위한 후 문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영양왕 23년(612년) 7월에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도 강이식장군은 여전히 병마도원수로서(대동운해(大同韻海)에 기록) 왕제(王弟) 건무(建武)에게 해안을 지키게 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에게 육지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요동성을 고구려군의 본거지로 하여 수양제의 113만 대군과 맞서 수 개월간 완강히 버티니 수양제는 요동성이 견고하여 함락이 어려우니 별동대 30만이 평양을 향하게 하였는데 별동대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하여 겨우 2700여명만이 살아가니 수 양제가 거느린 본 군도 먼 길에 피로하고, 식량에 주리고 별동대의 참패에 간담이 서늘하여 고구려 군에 대한 두려움과 사기의 저하로 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나 분을 참지 못하고, 재차 요동성을 침공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또 퇴각하였으며 영양왕 25년(614년)과 그 뒤에도 수차 침공하였으나 거듭 실패하고, 이로 인하여 국력이 쇠잔하고 민심이 이반 하여 결국 고구려를 정벌하려다가 나라까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빼앗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임유관대첩에 대하여 수서(隋書)에는 [양양(楊諒)의 군은 임우중(霖雨中)에 역질(疫疾)을 만나고 주나후(周羅?)의 군은 풍랑(風浪)을 만나 수군이 퇴각(退却)할 때 사자(死者)가 십의 구가 되니] 라고 기재하여 천연(天然) 불가항력(不可抗力)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高句麗)에게 패한 것이 아닌 것처럼 수록(收錄)되어 있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體面)을 위하여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 :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사필의 준엄한 논법)이라 하겠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와 기타 문헌(文獻)과 사서(史書)도 강이식장군의 성명(姓名) 삼자(三字)조차 밝히지 않았음은 물론 저 임유관(臨楡關)[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된 요하일대의 큰 전역(戰役)을 소개하되, 수서(隋書)를 그대로 초록이식(抄錄移植)하여 수군의 패전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에 불리(不利)한 때문인 것처럼 기술(記述)해 놓았다. 당시 용감한 고구려의 항전과 기습(奇襲) 반격(反擊) 같은 사실은 전연(全然) 불문(不問)에 붙이고, 수군의 삼십만 대군이 염천(炎天)과 장마와 전염병(傳染病) 같은 역질(疫疾)과 기아(飢餓) 등의 자연발생적(自然發生的)인 저해(沮害) 요소(要素) 때문에 불공자멸(不攻自滅)하고, 철수(撤收) 귀국(歸國)한 것처럼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다행하게도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저(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그 아류(亞流)의 문헌(文獻)들이 적성(敵性)인 수서(隋書)의 초록(抄錄)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指摘)하는 동시에 대동운해(大東韻海)와 서곽잡록(西郭雜錄) 같은 별도(別途)의 사료(史料)를 열람(閱覽)?인용(引用)?고증(考證)하여 비로소 사실의 진상이 밝혀졌고, 육군본부군사감실 편찬전사(編纂戰史), 국방부 정훈지에 이선근(李瑄根)박사의 연구논문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2003년 1월 25일 오후 8시 KBS방송국에서 방영된 ?추적 고구려-수나라 전쟁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역사스페셜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채호도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 장군이 살수전쟁(薩水戰爭)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고 기록(記錄)되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임유관(臨楡關) 전쟁의 병마원수(兵馬元帥)로 되어 있으나 살수전쟁(薩水戰爭)에는 왕제건무(王弟建武 : 영유왕[榮留王])가 해안(海岸)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將軍)이 육지(陸地)를 맡았으므로 서곽잡록(西郭雜錄)의 병마원수(兵馬元帥)가 옳다고 하였는데 임유관 대첩 때는 강이식장군이 병마원수라는 서곽잡록의 기록도 맞고, 강이식장군이 살수전쟁의 병마도원수라는 대동운해도 맞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임유관대첩보다 15년 후인 살수대첩 때는 수양제가 113만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하여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위기이기 때문에 강이식장군은 요동성에서 직접 수양제의 113만 대군과 맞서서 전투를 하였고, 을지문덕에게는 수도인 평양을 지키게 하여 지금으로 말하면 2군사령관이라고 할까 수도경비사령관이라고 할까 하는 직책으로 평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나라 별동대가 기습공격을 가하자 살수에서 수군을 수공의 묘계를 써서 대공을 거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만약에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다면 수양제의 113만 대군과 맞서서 요동성에서 싸울 일일이지 어째서 평양에 있다가 살수에서 적을 맞이하여 전투를 하여 대첩을 거두었겠는가? 또 을지문덕이 수양제의 113만 대군과 맞서서 전투를 지휘하였다면 수 천리 뒤에 있는 살수에서 수나라 별동대를 맞아 싸울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韓國文化硏究所(1994)나 崔實光(1989)의 진양 강씨 편에도 강이식장군을 살수대첩의 병마도원수이라 소개한다. 이와 같은 혼란은 수서만 정사로 인정하는 춘추필법의 부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병마 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묘소(墓所)는 옛 고구려(황해?평안?함경삼도와 봉천?길림?흑룡강 삼성)땅이던 현 만주 봉천성(奉天省) 청원현(淸原縣) 원수림서록(元帥林西麓) 즉(卽) 봉길선(奉吉線) 철도(鐵道) 원구림역(元帥林驛) 동편(東便) 700미터 지점(地點)에 있어 1942년에 후손 정태(正泰), 학수(鶴秀), 명수(明洙) 등 세 분이 참배했는데 돌보는 이 없이 황폐되어 있었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유민 수십만을 화남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켜 강이식장군의 후손들도 상당수는 화를 당하고 일부는 신라로 넘어와 진주강씨가 되었으니 강이식장군의 산소는 돌보는 이가 없었고, 더구나 문화혁명 때 장작림(張作霖)의 묘를 성역화 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고총 들을 모두 매몰하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도 없고, 비석 구대만 남아 있고, 원수림(元帥林)이라는 지명과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대비(大碑)가 건립되어 있을 뿐이다.
경남 진양군 진성면 중촌리 월정부락 은열공파(殷烈公派) 강유식리안계소장(姜有湜里案契所藏)지하 석함에 소장(所藏)된 강이식장군 고증 자료의 작성연대는 미상(未詳)이나 서기 1592년 임진왜란 때 훼손(毁損)되어 그 후 1602년 즉 만력(萬曆) 30년 陰 10월에 보수(保囚)하였다는 기록이 같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 고증 자료로 강이식장군의 묘소(墓所)도 그 소재가 분명해졌다.
공의 유허비(遺墟碑)는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 상봉서동(上鳳西洞) 봉란대(鳳卵臺)에 건립(建立)되어 있으며 공을 모신 사우(祠宇)는 봉산사(鳳山祠)라 칭(稱)하여 진주시(晉州市) 봉동동(鳳東洞) 498의 1에 있다. 향사(享祀)는 매년 음(陰) 3월10일에 거행(擧行)한다.
봉산사(鳳山祀)는 고려 광종 때인 950년경 건립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선조(宣祖) 3년(1570년)에 봉산사를 건립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숙종(肅宗) 40년(1714년)에 중건하고, 순조(純祖) 2년(1802년)에 또 다시 소실되었으나 융희(隆熙) 5년(1911년)에 중건하고, 1975년에 문화재로 지정되고, 1983년에 현재와 같이 확장되었다.
첫댓글 한심한 후기신라의 역사를 부풀려서 배운 시간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