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30여 년 전인 1994년 겨울, 동학 답사차 찾아갔던 입압면의 보천교 본부를 전북 시인협회와 다시 찾았다. 세월 속에 차천자라고 불리던 차경석의 큰 아들 차용남 선생은 돌아가신 지 오래고, 그래도 역사로 남아 쓸쓸한 추억이 된 건물 몇 채들과 현재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으로 그 이름이 바뀐 십일전에 얹혀져 있던 황색과 푸른 기와는 그때 그대로였다.
1920년대 보천교 신도수가 조선총독부 집계로 무려 백칠십만 명을 웃돌았고, 보천교의 집계로는 7백에서 8백만을 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 걸 보면 그 무렵의 보천교의 교세가 어떠했는가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증산의 제자였고 보천교를 일으킨 차경석은 자기가 거처하던 입암면 대흥리를 오선위기五星歸垣의 名穴이라고 했다. 즉 내장산은 오행五行의 화성火星에 속하고, 입암산은 토성土星으로 화생수火生土가 되고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한쪽자리에 자리 잡은 방장산은 금성金星이니 토생금土生金이 되며, 순창 쌍치의 회문산은 수성水星이라 금생수金生水가 되고, 두승산은 목성木星으로 수생목水生木이 되니 완전한 오행상생五行相生의 형국을 이룬다고 풀이한 바 있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선생에 의하면 그러한 땅은 원래 풍수가에서 지고지귀한 땅으로 하늘이 내려주어야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하는 천하대지天下大地라고 했다. 보천교 중앙본부라고 쓰여진 낡은 소슬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선 그 집은 눈이 내려도 쓸쓸했다. 마당에는 금새 내린 눈이 소복하고 인기척에 문을 열고 주인장께서 나오셨다. 차용남옹 올해 나이 74세인 그 노인이 동학의 십대접주 차치구의 손자였고, 차경석의 큰 아들이었다. 차용남옹은 듬직한 풍채답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린 시절 유복했던 환경 덕분에 한학을 공부했던 덕에 주역과 한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주역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가라고 한다. 대전에 있는 과학기술원에서 주역을 특강한다는 차용남옹의 집에는 눈이 내리는 겨울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새배를 오는 사람, 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나서 온 사람들 그리고 보천교도들 속에서 우리 일행 몇 사람만 딴 뜻을 가지고 온듯 했다.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지요.” 그러면서 차용남옹은 “상 한 상 봐오게.” 젊은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정갈하게 한 상 내오신 그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들은 잔잔하지만 가슴 떨리는 그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지. 보천교 간부들을 총독부 관리들이 이간질시켰고, 조만식 선생이 이곳에서 체포되었어. 그때 이 곳에 ‘대성전’이라는 십일전 건물을 지었는데 십일전의 대들보를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에서 가져온 재목을 썼었다네. 이 나라 반 만년 역사상 어느 왕조도 쓴 일이 없는 누른 기와를 올린 것은 중국의 천자궁을 그대로 본 뜬 존대의식이었다네. 그 십일전 건물이 얼마나 컸었는지 2층까지 합하면 백 86간이 되었다니 지금 경복궁 근정전의 두배쯤이 되었을 것이네. 저 남쪽에 있는 입암산을 바라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운 오좌지형이었다고 하니 이러한 좌향은 현세는 선천시대와 달리 운수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나중에야 들었네. 삼국시대이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십일전이 아버님(차경석) 선화하신 1936년 5월 이후 일본 사람들에 의해 500원에 경매 당하여, 서울에 있는 조계사의 대웅전이 되고 말았지.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전주 역사가 이곳에서 뜯어다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니, 그 교세가 어떠 했겠는가. 신도들이 수저 하나씩을 모아 1만 팔천근의 대종을 만을었는데 직경이 8척에 높이가 십이척이었다네. 그 대종을 동정각에 걸어 놓고 아침, 점심, 저녁에 세번 각기 72번씩 타종을 하면 먼 지평선 너머 이리 시내까지 들렸다고도 전해지는데, 그 커다란 종은 해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지. 아버님은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으셨고, 신출귀몰하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아버님을 못잡으니까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어 도망갔다고 총독부 관리들이 거짓보고를 했다지.” 조만식과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그들이 한방에서 며칠씩 쉬어가곤 했다는 그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 날 그 방에서 들었던 가슴 아픈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기록하랴. 훗날 밤을 새워 그 이야기를 들으리라. 우리가 그 방을 나오자, “저 방에서 전봉준이 조부님과 그 마지막 밤을 지냈지”하고 쓸쓸한 뒷말을 남긴다.
조만식 선생이 묵어갔다는 방은 곧 쓰러질 듯 쓰레기만 가득하고, 그 방을 바라보는 허망한 눈길들, 언제나 그 역사의 아픈 실마리들을 다시 풀어놓을 수 있을지, 돌아오는 발길을 무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