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학번으로 서울 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다. 당시 ‘금속학’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을 텐데, 어떻게 가게 됐나?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은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물려 죽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Youth For Christ (YFC)’라는 보수적인 종교반에서 활동을 열심히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목사가 주도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신론(依信論)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교생 써클이었다. 지금은 의신론이 우리 사회를 질곡(桎梏)시키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을 믿었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도 일주일에 세네 번씩 새벽기도를 나갔다. 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전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던 소년이었다. - [유병언의 구원파와 유사함.]
신학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의 삶도 한 편으로는 시대상황에, 다른 한 편으로는 6남매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가정상황에 종교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원칙적이고 타협하지 않다는 것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나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교리논쟁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돼서 ‘형제감독’ 즉, 여호와 천국의 왕국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신학을 해서 개신교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신학대 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평소 존경하던 고1 담임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선 소재산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포항제철이 완공돼 쇳물을 쏟아내던 시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금속·철강 소재가 산업 입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장을 독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이었다(웃음).
첫댓글 ㅎㅎ
어머니가 증인인데 어릴때부터 세뇌되지 않은 특이한 경우군요. 암튼 참고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