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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고픈, 하고픈,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권영관(정외 65)
1.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1965년 3월 재수 끝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내가 고대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독특한 케이스였다.
입학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에 당시 고대에 재학중이며 역도부원이었던 용산 고교 시절 나와 함께 비모범생들로 구성된 서클 멤버였던 이경철(임학 64)군이 찾아와 반드시 고대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반드시 서울대 정치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원서교부 첫날 원서를 사는 등 결의를 다진 터였다.
나를 찾은 경철군은 “너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 않느냐?” 면서 정치하기 위해서는 서울대 보다는 고대가 좋다면서 당시 총학생회장도 용고선배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용고와 학풍이나 기질이 비슷하여 고대가 더 좋으니 고대로 오라고 강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고대에 와서 학생회 활동을 하거나 또는 다른 학생운동을 통하여 경력을 쌓은 후 정계에 입문하는 것이 좋을 거라며 자기가 직접 고대원서를 벌써 사왔다면서 내미는 게 아닌가.
이러한 연유로 고대에 원서를 제출하고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다행히 합격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합격후 주위의 많은 친구 선배들의 축하를 받았는데 특이한 것은 당시 학기 전 그러니까 나로서는 입학식도 하기 전인 2월부터 이미 6-7년 선배들을 위시하여 당시 고대에서 내노라하는 거의 모든 형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사연은 이때에 역우회 선배인 고 최선홍(59 사학)형님께서 총학생회, 서클대표 그리고 운동부 대표들을 망라한 단체로서 “무궁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는데 새까만 후배인 나를 재학생 자격으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었다.
선배들이 한번 인물로 만들어 보려고 점지한 나는 입학도 하기 전에 이미 고대내의 거물들을 모두 알게 된 탓에 마음속으로 동급생들은 우습게 보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로 변해 가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생회장을 꿈꾸고 입학했기 때문에 점잔을 빼며 그때까지의 하던 짓과는 딴판인 범생이 노릇을 억지로 하면서 겸손한 행동거지를 하며 말씨도 부드럽게 고치는 이중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교양학부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2-3학년까지 개입하며 “칠사”가 밀던 후보를 나와 우리 역도부원들이 지지한 후보가 이기는 등 처음의 대학생활 첫 학기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듯하였으나 전혀 엉뚱한 일로 인하여 대학생활은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밝히기 곤란한 모종의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1학기 중간에 무기정학 처분이라는 내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1학년 1학기는 무효 처리되고 앞으로 학생회 간부는 물론 장학금도 받을 수없는 처지가 된 나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지면서 자포자기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나는 대낮부터 학교 앞에서 술이 만취가 되어 공연히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비걸고 수위실 앞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등 학생으로 보기 어려운 망나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학생회 간부들에게 술값을 뜯고 남들 미팅하는 장소에 가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도서관에서 착실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데모않는다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내모는 등 못된 짓만 일삼으며 학교내외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면서 보내었던 부끄러운 시기였다.
이런 행동을 혼자서 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함께 어울려 다니며 개판친 친구들이 얼마 전 타계한 역우회원 송경석(법학 65) 투병중인 오정일(수학 65)군 등인데 현재 명단에는 없으나 당시에는 역도부원이었던 박효남 등 몇몇 악동 친구들이 있다.
우리 65학번 역도부에는 다른 학번도 비슷하지만 유독 범생이 기질을 가진 친구들이 많아 우리 역도부를 타 운동부나 기타 외부에서 시비를 걸지 못하게 막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진 주요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은 우리 팀 고작 7명(고대 역도부 출신 63학번 2명, 64학번 1명, 그리고 65의 나 기타다른 친구 3명)으로 모대학 교정 깊숙이 까지 쳐들어가 그 대학 수백 명과 패싸움을 벌리고 이 바람에 친구 한명이 중상을 입으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일 을 포함하여 술집에서 시비 중에 어떤 자가 내 등 뒷쪽에서 깨진 맥주 조끼로 머리를 내리치는 바람에 피를 팬티까지 적셔가며 거리를 행보한 다음 스물 몇 바늘 꿰매는 치기를 벌인 일은 망각의 늪으로 떠내려 버리고 싶은 짓들이다.
이런 모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기피하며 자리를 함께하는 것조차 꺼리는 일을 겪다 보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리 철없이 망가지고 학생답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해 댔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다.
2. 하고픈 이야기
내가 입학한 65년도는 그 전해인 64년도의 63사태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때까지 체결되지 않은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여론으로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제2대 교양학부생이었던 우리는 본교의 데모대에도 가담했지만 애기능 Campus에서 별도로 독자적인 모임을 만들어 궐기하기도 하였다.
65년 1학기 때에는 법과대학 이항녕 교수께서 교양학부장이셨는데 1학년생들이 무모하게 학생운동에 끼어들어 몸을 상하거나 신분상 불이익을 입을까 걱정하여 매우 강경하게 집회자체를 못 열도록 하였으나 나는 이런 만류를 뿌리치고 학생을 동원하고 연단에 올라 선동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 역도부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때에 한일회담 반대 데모 중 역도부원 몇 명이 같이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유유길(상학 62)형의 보디가드 비슷하게 쫓아다니다 성북서에 연행되었는데 유 선배는 나의 고교선배이며 내 친구의 매형이 된 분으로서 당시에는 두 분이 연애중이셨다. 이 일로 나는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함께 연행된 같은 1학년생은 구속 기소되었는데 돌을 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이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경찰서 안에서 구타 등의 부당한 처우는 극히 드물었으나 놀라운 사실은 이때부터 학생들의 데모상황을 세밀하게 촬영하여 이를 증거로 삼아 기소하거나 훈방 하였으며 물론 구속 또는 불구속의 증거로도 삼았던 기억이 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매년 계속되는 반정부 데모로 60년대의 대학은 한번도 정상적인 수업은 물론 학사일정이 있은 적이 없었으며 학교는 계엄, 위수령 등으로 수시로 문을닫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나름대로 졸업후 해병장교를 지망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안사정등과 앞에서 얘기한 불상사 등으로 인하여 67년 4월 육군에 입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계획도 그 자체가 무모하였던 것이 당시에는 신원연좌제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선친께서 소위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여서 장교 임관 자체가 불가능 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2006년 건국훈장 추서 받으셨음)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KATUSA로 가게 되어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하였지만 또 한편1.21사태로 군 생활을 예상보다 6개월 이상 더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제대 무렵이 되자 종전의 방탕한 생활을 복학 후에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우선 나쁜술 버릇부터 고치겠다고 마음먹어 지금까지도 술 매너는 좋은 편이다. 물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도 굳게 하였다. 복학은 1학년 1학기 부터였으므로 어려운 교양과목 공부를 하기 위해 미처 제대특명을 받지도 않은 채 중대장의 배려로 군복입고 신입생들과 학창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때 Class Mate로 만난 후배가 고교 6년 후배이며 정외과 70학번인 역우회원 정판식 군이며 이들과 한 학기를 함께 다녔다.
그러나 착실하게 공부만 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주위사정으로 인하여 무참히 부서져 버리고다시금 학생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고 말았다. 1.21사태 이후 생긴 교련이 나 같은 예비군에게는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 별 상관없었으나 고교부터 받아 오던 재학생들은 불만이 많았는데도 이를 참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교련 교육을 강화하고 교관을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교체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자 전국에 반 교련의 여론이 일어났고 학생데모가 일기 시작했다.
현역과 예비역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나 일반인들은 이를 잘 이해 못하여 학생들이 단순히 교련교육이 싫기 때문에 하는 단순한 행동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사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어쨌든 당시 주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는 주동자로 앞장서서 나서기는 어려웠고 다만 5개부나 기타 장애요소가 있을 때에는 방패막이를 해 주기로 하고 심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우리 역도부 후배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하기를 원하는 부원들이 있었으나 가급적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정작 강당에서 첫 모임이 있던 날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던 사람 중 핵심 두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주도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아있던 지도부는 난감해 하며 구심점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선언문을 낭독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역도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어찌하는 것이 좋겠는지 상의한 후 과감하게 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나는 어쩔 수없이 다시 운동권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민주수호투쟁위원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감투를 얻는 대신 그토록 아끼고 애착을 가지고 있던 역도부 주장에서는 물러나게 되었다. 나와 뜻을 함께 하고 나를 앞뒤에서 음양으로 도와주던 몇몇 후배들은 주장을 그냥 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운동부의 순수성을 위해 그만두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하여 사퇴하였다 당시의 역도부원중 나를 돕던 대표적인 부원이 강대승(법학 70), 김승기(축산 71), 장건상(법학 71)군 등이었다. 나는 이들이 학생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본인들의 뜻에 상관없이 말리는 입장이었다. 선배의 입장에서는 후배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체포를 피해 도망다니던 이야기는 운동권이라면 누구나 겪은 일이고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가지 꼭 하고픈 말은 주동하던 다섯명이 자기들끼리만 몰래 나눈 말이 새어 나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월 모시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미행을 따돌리려 빙빙돌아 목적지에 도착하면 벌써 기관원이 와 있는 아연실색할 일이 자주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은 상호불신을 야기하고 마침내는 내부붕괴를 초래하며 사회적으로는 불신풍조를 만연시키는 좋지 않은 작태였다고 생각한다.
복학생인 처지에 위원장에 앉은 나는 후배들과 의견차이도 있었고 재학생들은 자기들 나름의 별도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이 조직이 유신이후 전국적 조직의 모태가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문리대 학생이 우리 학교에 찾아 와 자기들 유인물의 등사를 부탁해 와 내용을 검토해 보니 지나치게 과격하여 반정부라기보다는 반국가적 성격에 가깝다고 느껴 거절했던 일도 있었다.
계속되는 학생들의 반정부데모에 당시의 박정희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특히 미운 털이 박힌 고대에 대하여는 이참에 아주 문을 닫아 버리겠다며 우리 대학에 노골적으로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직면한 김상협 총장께서는 며칠간 잠도 못자고 고심한 끝에 학생들과 직접 대화를 통하여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고육책을 들고 나오셨다.
총장의 특별성명 발표가 있다고 하자 대강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으며 미처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옥외확성기 주위에도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총장께서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특유의 달변으로 호소력있게 설명하시며 학교가 문을 닫는 즉 폐교는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시면서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하시면서 연설을 마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방관자로 있으면서 데모현장에는 모습도 보이지 않던 몇몇 서클 소속의 학생들이 무슨 속셈이었는지 총장의 말씀을 따를 수 없다면서 반항적인 언사를 써가며 지속적인 데모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장내는 소란해 지기 시작했고 일부 학생들은 동요의 기미까지 보이는 듯하여 연단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더 이상 방관하면 존경하는 총장님의 권위는 추락하고 고대의 명성에도 커다란 피해가 오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그 때까지 마이크를 쥐고 있던 반대파 연사를 밀쳐내고 마이크를 빼앗은 후 총장님의 말씀에 따르고자 하는 학우들은 이 자리에서 퇴장하라고 사실상의 해산을 요청하자 분위기는 진정되었고 학생들도 흩어져 무사히 사태를 무마한 적도 있다. 이 때에도 나의 주위에는 믿음직한 우리 역도부 후배들이 나를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매일 도망다니는 것도 너무 힘들며 자금이 없어 밥값 조달도 어려운데다가 학생들 모으는 데도 한계에 부닥친 느낌이 들어 더 이상의 활동은 어렵다고 보고 자폭하는 심정으로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마지막 궐기대회를 하자고 결의하였다. 이미 포진해 있던 경찰로 인하여 집회는 열지도 못하고 나는 종로경찰서에 연행당했고 저녁이 되자 성북서에 인계되어 소위 조서를 작성하였는데 물어보는 것마다 모두 내가 했다고 하자 겁을 주려고 대공계로 이첩했던 일도 있었다. 결국 보호자가 각서를 쓰고 별 문제없이 석방되었고 이후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와 운동권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이들과 멀리 하게 되었다. 나를 믿고 따르던 역도부 후배들은 무척 안타까워했으나 후배들을 더 이상 고생시키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에 과감히 정리해 버린 것이다.
내 소신은 그때의 우리나라에는 지금과 같은 시민단체가 없었고 따라서 비판세력이 없으므로 학생들이 이들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서의 학생운동이 한계이며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을 위하는 학생운동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을 빙자하여 사회적 또는 정치적으로 출세를 위한 발판을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순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쪽에서는 온건타협주의라고 비판당하면서 오히려 사꾸라 운운하는 얘기도 들려 이 때가 내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 갈 기회라 여기며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손을 뗀 측면도 있다. 역시 운동부 출신은 순진한 가 보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동안 당시 국방장관이던 사람이 작금의 학원소요사태는 대다수 학생들의 의견이 아니며 극소수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는 덜 떨어진 발언을 하는 바람에 분노한 학생들이 대운동장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 기세가 너무도 험악하게 진전되자 당황한 정부는 헬기로 최루탄을 쏘는 초유의 진압책을 구사한 기억도 생생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또 다시 위수령을 불러왔고 이 위수령으로 고대에 진주한 지휘관이 당시 수경사 대대장이었던 전두환 중령이었다는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 제일 큰 장애가 되는 유신이라는 독재체제가 등장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3. 남기고 싶은 이야기
위의 두 이야기와는 좀 다른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우석대학 인수를 위해 만들었던 비공식조직원으로서의 활동과 짧은 주장직 수행중 역우회를 만들어 보자고 발의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첫째. 우석대학 인수팀 이야기
71년 1학기동안 참여했던 학생운동을 앞에서 말한 대로 찝찝하게 끝마치고 나서 여름방학 때는 학교에 나와 공부도 하면서 착실히 2학기를 준비하였다. 개학하고 얼마 지나지않은 어느 날 총장실에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와서 비서실에 갔더니 김상협 총장 비서실장인 이세기(정외 58)선배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당시 우리 고대는 의과대학이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였는데 때마침 우석대학교 (전 수도의대와 국학대학이 통합한 학교)가 재단이 부실하여 관선이사가 관리하고 있었는바 건실한 인수자를 물색중이라는 것이다. 경쟁자는 중앙대학교와 영동고등학교의 재단 그리고 고려중앙학원이었는데 우석대학교에서는 교수, 교직원, 동창회, 총학생회 그리고 일반학생조직 등 모두가 다른 학교에 통합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반대집회와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우리 학교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를 안 우석대학교측은 같은 민족대학으로서 또 다른 민족대학을 말살할 수 있는 냐는 논리를 내세우며 교내외 시위를 계속하자 관선이사회의 관리감독을 맡고 있는 문교부는 어느 누가 인수하던 당시의 집권층이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시위등 소란행위가 없도록 하여야 인수를 허가하겠다며 조용한 분위기 조성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이에 우리학교 측에서는 공식적인 조직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비공식조직으로 이들에게 일종의 특공대역할을 맡겨 해결하기로 하였는데 이 멤버중 하나로 나를 발탁한 것이었다. 이를 맡을 것인가 한동안 고심한 끝에 나는 고대의 발전을 위하여 이 일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할 일이며 이런 보람있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참여키로 결정하였다. 잠시라도 고심한 이유는 운동권 동료들의 평판을 의식한 까닭이다.
여기에 관여한 인사는 전 단국대학 교수 안오남(경제 58) 선배, 전 통일부 차관을 지낸 양영식(정외 59)선배, 가스공사 근무하던 송영준(정외 64), 연합통신 기자였던 김병수(심리 68)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는데 각자의 위치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였다.
즉 안선배는 교수 및 교직원 담당, 양선배는 동창회, 김병수는 학생회, 송영준은 기타 조직 그리고 나는 운동부 내지 어깨들 담당이었다.
재학생도 아니고 복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연령차가 있어 그 학교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이를 맡게 되어 황당했으나 주위 친지들을 통하여 모 고교출신들이 힘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쪽에 선을 대고 약간의 정보를 입수하고는 무작정 학교로 찾아갔다. 수소문 끝에 모 고교출신으로서 이 학교에서 제일 힘을 쓴다는 학생을 찾아내어 무조건 대폿집으로 데리고 갔다. 찾아 온 사유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처음에는 완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협조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별로 개의치 않고 그러면 그런 복잡한 얘기는 차차하기로 하고 술이나 마시자며 그들과 친분을 쌓아가는 순서를 밟았다.
그렇게 안면을 튼 다음 나는 아침에는 학교에 들러 진척상황을 보고하고 오후에는 매일 정릉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였다. 그들 조직원들과 함께 놀아주고 당구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서로의 간격을 좁혀갔다. 고려대학교 졸업장이라는 달콤한 유혹은 결코 쉽게 뿌리칠 수없는 것이었으나 일부 학생들은 결연한 반대의사를 나타냈으며 나는 이들을 설득해 가면서 차츰내 속내를 들어내어 데모대를 저지하도록 꼬득였다.
잘 진행되어 나가던 우리 편 만들기 작업에 마음을 놓고 있던 어느 날 리더가 급히 연락을 하여 만났더니 복학생 선배들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미리 예상했던 일이라 만나서 한잔하며 설득하여 본격적으로 통합찬성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더 이상의 가두시위를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그들에 대한 통합 후 대우도 언질을 주었는데 문제는 나와함께 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청강생이라는 것이 골치였다. 거짓으로 그들을 대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학위는 안되나 수료증은 발급이 된다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반대여론을 무마하고 나름대로 우리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 들러 진척 사항등에 관한 보고 및 회의를 마치고 본관을 나서자 군 장갑차가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위수령이 발동된 것이었다. 이미 여러차례 이러한 상황을 겪어 본 나는 인촌묘소 뒤쪽 철조망을 넘어 중앙산업 방향으로 도주하여 우리 팀 연락장소 쪽에 갔더니 이미 이상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 이때부터 약 두달간 본격적인 도주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여서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서빙고에서 곤욕을 치를 때 나는 멀리 안전한 곳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에게 졸업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일단 체포를 피하면 중벌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대피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위수령이 해제되고 주동학생들에 대한 처벌도 끝난 후 방학에 들어 간 시기로 기억한다.
조선호텔에서 우석재단 민병도 관선이사장과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간에 합병조인식이 있으니 현장에 와서 만약에 일어날 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출동함으로써 역사적인 양교통합의 현장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게 되었고 이 결과 마침내 고대에도 의대, 간호대와 사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나는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아직도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로써 1972년 2월 25일 정릉 Campus출신이 처음으로 고려대학 이름으로 졸업장을 받았으며 의대, 간호대 및 가정교육과등 사대생이 첫 번째로 72학번으로 입학하여 3개 대학에 순수 고대생이 탄생하는 경사를 맞게 된다.
고려대학 백년사에 반드시 이 일을 넣어 기리겠다는 학교당국의 약속이 있었으나 통합작업이 완전한 매듭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외적인 요인으로 우리의 활동이 중단됨으로써 우리가별 기여를 못했다고 판단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둘째. 역우회 이야기
위에 얘기한 우석대 통합과 이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선후가 바뀌었으나 이 부분이 내가 가장 남기고 싶은 이야기이므로 마지막에 하려고 한다.
1970년 3월에 복학한 나는 교양학부 공부를 하는 바람에 학점따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수 없는 착실한 복학생이었다. 또한 제대말엽 작심한 바도 있어서 공부 이외에는 한눈팔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 터였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힘의 미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하지 않고 역도부 행사에도 적극적이지 않은 게으른 부원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기에 주장이라는 직책은 언감생심 내가 넘볼 수없는 자리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장인 임승혁(경제 64)형이 나를 후임 주장으로 지명하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주장을 맡기는 했는데 나 혼자 꾸려가기에는 자신이 없어 충실한 역도부원이었던 전임 주무 윤명섭(불문 68)군에게 한 번 더 주무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중책을 맡은 후 곰곰이 생각하니 주장이라는 직책이 운동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과연 어떤 주장으로 남을 것이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참 주장일까 고심하게 되었다. 그러자 평소부터 생각해 오던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대한민국의 역도는 고려대학교 역도부의 역사인데도 불구하고 황호동 선배 이후 우리 학교에는 제대로 된 선수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차제에 어떤 방법이든지 다시 한번 고대 역도부의 위상을 드높여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결심이 선 후 나는 윤명섭 주무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물으니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행동에 나서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우선은 선수를 Scout하여 양성을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장학금을 만들어 분위기 조성을 하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경섭 선배를 통하여 학교 측의 의견을 타진해 보니 선수 Scout는 경량이나 가운데 중자 中量보다 무거울 중자 重量급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학교측 뜻이며 더우기 장학금 문제는 5개부에 주는 장학금도 부족하다며 5개부 중심 체제라 어렵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해방직후 이철승 대선배께서 하셨던 일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그 당시 어느 운동부에서도 하지 않았던 어쩌면 엄두를 내지도 못했던 전 졸업생을 망라한 조직을 결성하여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장학금을 주면서 선수를 육성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곧 취지문을 만들고 졸업생 명단을 정리하여 방문할 선배님들의 순서를 정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하였다.
시기적으로 이미 겨울방학이라 동원할 부원도 없었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도 탐탁치않아 나와 윤명섭 주무 둘이서 모든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당시의 통신 특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성격상 가장중요한 전화는 극히 일부만 보급된 상태여서 서로 약속을 정하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신용으로 나는 옆집 전화를 빌려서 써야만 했고 윤명섭주무는 집에 전화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으나 우리를 가장 맥 빠지게 하였던 것은 이런 실무적인 일의 어려움이 아니라 선배들의 패배주의적이라 할 정도의 자신없는 태도였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망가셨던 어떤 선배분은 말씀하시기를 지금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지경인데 누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겠는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비관적인 말씀만 하시어 우리를 실망시켰던 기억도 난다. 그렇다고 이 분들을 비난코자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무언가 보람찬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선배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열의를 가지고 이일을 위해 여러 선배님들을 방문하였고 당시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계셨던 차지철 의원실의 허정남 선배같은 분은 많은 격려를 보내 주셨다. 물론 차의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나는 이에 고무되어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초, 학교 교수식당으로 선배님들을 초청하여 발기인 대회를 치르는 등 본격적인 출발을 계획하였으나 이 계획은 내 혼자만의 생각으로 끝나고 모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의 성격상 선배들이 주체가 되고 나는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끝내고 선배들이 스스로 추진하도록 심부름만 하여야 하는 것을 선배들을 번거롭지 않게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뜻이 좋으니 잘 도와주시겠지 하는 자의적 판단하에 혼자 마무리까지 하려 하였으니 일이 잘 성사될 리가 있었을까 하는 점을 나중에 철이 든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이 일은 내 일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석탑축제 이전에 주장직을 윤명섭군에게 물려주고 시위꾼이 되는 바람에 이후의 역우회 진척상황은 잘 모르나 우리 역우회가 지금과 같이 왕성한 조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남몰래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다. 위에 얘기한 나의 작은 몸짓이 이런 좋은 결실을 맺는데 하나의 밑거름이 된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흐뭇한 마음을 가져 보는 사치를 누린다고 누가 손가락질은 않으리라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