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인구가 4000만 명을 넘어선 1983년. 그해 5~6월에는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23일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전두환 정권은 맛있는 음식상을 차려와 내 앞에 갖다 놓고 냄새를 풍기도록 했다. 나는 '그 따위 비열한 짓 말라!'고 고함쳤다."―김영삼 회고록). 6월부터 11월까지는 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으로 1만189명이 상봉했고, 전 국민이 눈물바다에 잠겼다.
대한민국 역사상 큰 비극으로 남은 두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해였다. 9월 1일, 미국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편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고, 탑승자 269명(한국인 110명) 전원이 사망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정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KAL기는 0시15분(한국시각) 소련군 레이더망에 잡혔고, 3시25분 소련군 수호이 15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았다. 군대가 비무장 민간항공기를 공격해 승객들을 살해한 만행이었으나 진상은 여전히 베일 속에 있다. KAL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200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종 명령은 모스크바에서 하달됐으며, 추락 지점에서 발견된 시신은 6~7구뿐이었다"고 말했다.
▲ 1983년 10월 9일 테러 참사를 몇 초 앞둔 순간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에 도열한 수행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이 사진기 테스트를 위해 촬영한 사진으로 폭발사고 당시 촬영자의 피와 화약흔 때문에 사진 일부가 하얗게 바랬다.
38일 뒤인 10월 9일, 6개국 순방길에 올랐던 대통령 전두환은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에서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날 아침 행사장 안내를 맡은 버마 외무장관이 차 고장으로 5분 늦게 영빈관에 도착했다. 기분이 상한 듯 대통령은 3분을 늑장부렸다. 대통령의 차가 행사장을 향해 가고 있던 오전 10시28분(현지시각),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테러 폭탄이 터졌다. 미리 와 있던 부총리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 등 정부 고위 인사를 포함한 17명이 순직했다.
폭탄을 설치한 범인들은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 정찰국 특공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작원 3명 중 신기철은 사살됐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됐으며,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민철은 2008년 5월 미얀마 감옥에서 죽었다. 전두환은 훗날 "격분한 군 지휘관들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전방을 돌면서 말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버마는 이후 북한과 24년 동안 단교했고, 대한민국은 제3세계와의 외교관계에서 북한을 앞지를 수 있었다.
▲ 1983년 9월 1일의 KAL 007기 피격 사건과 10월 9일의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다룬 국립영화제작소의 '돌이켜 본 83년'의 일부분.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