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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산성산( 583.7m, 598m : 순창/담양)
*일 시 : 2005. 3. 6(일), 제17차rtnah 산행(16명), 날씨(맑다)
*코 스 : 매표소-금강교-극락교-강천사-현수교-삼선대-소목골재-광덕산-적우재고개
-전망암-하성고개-큰바위-시루봉-동문-산성산-송낙바위-강천제2호수-현수교
-강천사-매표소-주차장으로 원점회귀
*산행시간 : 오전 10시 25분~오후 3시 40분 → 총 5시간 15분간 소요
사상최초의 세계시민이자 ‘개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한 자연인으로서 생활했던 犬儒學者 디오게네스(다이오지니스). 독설과 인습, 그리고 편견을 거부했던 ‘미친 개’였고, ’미친 소크라테스‘였다. 어느 따스한 봄날 햇볕을 쬐고 잇던 디오게네스에게 고견도 듣기위해 그의 통나무 집(?)을 찾아 알렉산더가 방문했다. 대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대왕은 당대 철학자를 찾아 가르침을 받는 것을 즐겼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바라던 모든 것을 들어 줄테니 말씀하십시오.”
“햇볕을 가리지 마시오!”
호기롭던 알렉산더 대왕은 디오게네스의 이 한마디에 실색한다.
그런 그에게 디오게네스가 물었다.
“대왕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대왕은 대답했다.
“그리스를 정복하고, 뒤이어 세계를 정복하렵니다.”
“세계를 정복한 후에는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디오게네스가 재차 물었다.
“아마도 좀 쉬어가면서 생을 즐겨야하겠지.”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되받았다.
“그럼 대왕은 왜 당장 쉬면서 즐기지 못하오?”
호남정맥은 내장산 국립공원에서부터 심하게 요동치며 남쪽으로 ∽자로 똬리를 틀듯 백암산-추월산을 틀어 올리곤 여전한 기세로 담양호를 사이에 두고 커다란 U자를 그리면서 강천산-산성산-광덕산을 빚어놓고 계속 남쪽으로 달아난다. 추월산과 강천산은 위도가 비슷하지만 두 山 사이에는 담양호가 에워싸 담양호 서쪽의 추월산과 동쪽에 강천산이 마주한다. 하지만 강천산에서 시작된 능선은 U턴하면서 광덕산에서 강천계곡을 완성하기까지 기암괴석, 아름다운 암릉으로 점철된 빼어난 산세와 경관을 자랑한다.
강천산(해발 583.7m)은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번지 일대에 위용을 자랑하고 광덕산(해발565m)을 비롯하여, 해발 603m의 산성산과 함께 ‘연대봉-선녀봉-장군봉-왕자봉-형제봉-신선봉-옥호봉-수령봉-깃대봉-천지봉’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랑스런 산이다.
이곳을 예전에는 ‘용천산’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 비롯된 이름이다. 만학천봉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우거진 천연수림은 태고를 연상케하고, 두 산록은 높이에 비해 수 십리 깊은 계곡이 허다하게 품고 있다. 가난한 흥부네 자손만은 영글지게 열리듯 말이다. 유명계곡으로는 저분제골(선녀계곡)-원등골-분통골-지적골-소목골-황우제골-기우제골-세낭골-물통골-우작골-동막골-탑상골(금강계곡)-승방골-변두골 등 부지기수다. 각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강천호가 모두 흡수한다.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 계절마다 산의 경관이 변하고 그 경관이 한결같이 수려하여 가히 호남의 소금강이란 이름이 결코 허명은 아니다.
산성산은 금성산성의 성벽을 이루는 곳으로 호남정맥의 한 부분이다. 산성산(603m)은 추월산(729m), 병풍산(685.2m)과 함께 호남정맥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담양의 진산이다. 강천산-광덕산 능선이 호남정맥임을 확증하는 것은 능선의 서쪽 계곡으로는 담양호가 영산강이 되어 목포로 흘러내려가고, 동쪽의 물은 강천제-순창읍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순창읍에서 10km 지근거리의 강천산은 아기단풍나무와 벗꽃이 유난히 많은데 매년 4월 초순께가 절정이다. 특히 강천산만의 자랑인 곱게 물든 아기단풍의 장관은 황홀의 극치다. 아울러 강천산은 최근에 벚꽃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개 4월초 피기 시작해 10일 께 만개한다. 자연생 「산벚꽃」으로 꽃이 잘고 빛깔이 희고 맑다. 벚나무는 강천산 입구 강천호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며 등산로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산세가 가파르거나 위험하지 않는 여러 갈래의 소로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들이 즐겨 찾는 강천산-산성산이다.
강천계곡 6㎞구간을 지나 강천산-산성산 정상에 이르면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산 아래 흰빛 벚꽃물결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유서깊은 강천사와 삼인대, 강천산 5층석탑, 금성산성 등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도처에 비경이 숨어있다.
강천사 입구인 도선교에서 강천천을 따라 이어진 계곡은 천인단애를 이룬 병풍바위 아래 벽계수가 흐르고 군데군데 폭포와 그 아래 소를 이룬 곳이 10여 군데다. 청정옥수가 고여 있는 용소는 명경지수 그 자체다. 이러한 관광자원에 힘입어 1981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며, 자연보호를 위해 매표소 입구와 주차장 등에서 음식물 반입은 물론 취사와 야영을 금지한다.
토요일 오후에 걸려오는 전화는 10중 8~9는 심상찮다는 느낌은 오랜 경험에서 얻은 육감이다. P-T-K씨 들 7명이 내일 계획에서 자의든 타의든 아웃이다. 보름만의 산행인 3월 첫 주 산행은 다소 동공현상이다. 임원회의 결정대로 3월부터는 4주째를 포함한 매 주 일요일을 산행하기로 작정하니 한결 개운하다. ‘한솔’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강호섭씨와, H씨의 소개로 강서구청직원인 K씨로부터 각각 산행계획서를 요청하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 주 김천행이 연기된 양경태 대장이 참여한다는 김총무님의 전갈이다. 이리저리 토요일 오후와 밤은 그냥 싱숭생숭한 시간이 어줍잖게 흐른다.
경부-천안~논산-호남고속도로 전주IC-27번 도로를 통해 순창소읍에 진입한 시각은 오전 10시 12분이다. 순창읍에서 담양방면으로 2Km떨어진 백산삼거리에서 우회전, 강천사로 가는 793번 도로를 타고 북향이다. 중간에 운치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로 잠시 착각한 삼나무 가로수 거리가 황홀하다. 제철이라면 佳景이리라. 삼나무 가로를 지나면 아기단풍 가로수길에 이어 왼쪽으로 작은 저수지가 나온다. 강천산 군립공원 입구는 이 저수지가 끝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 자연석을 입석으로 만든 <군립공원 剛천산>이란 표지석을 안고 돌아 조금 들어가면 광덕교 앞 주차장에 이른다.
오전 10시 25분.
한가한 겨울 주차장에 들어섰다. 광덕교를 건너 강천산 상가가 즐비한 좌측 공중화장실은 예상 밖에 정결한 관리다. 따뜻한 봄 기온으로 미뤄 한가한 상점의 간판보다 오늘이 더 화려하리란 생각이다.
10시 31분.
신선교를 건너면 매표소다.
그렇게 자랑하던 강천천 계류는 탁주 색깔처럼 짙은 탁류다. 제2강천호 아래 테마공원조성공사로 탁류가 됐다며 공사기간 중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는 직원의 얘기다. 강천천을 따라 평탄한 소로를 올라가면 마지막 소형 자동차 주차장이 나오고, 우측에 보이는 병풍바위 위로 거대한 병풍폭포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진다. 낙수지점엔 ∧자 형상의 얼음이 수호신인양 기립한 자세다. 높은 절벽에서 수직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장관이다. 큰 폭포와 그 옆 작은 폭포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인공으로 물을 끌어다 만든 폭포지만 시원한 물줄기는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입구부터 다소 환상적인 분위기다. 큰 폭포는 높이가 40m, 작은 폭포는 30m다. 전설에 죄지은 사람이 이 병풍암 아래로 지나면 깨끗해진다고 한다. 병풍바위는 호랑이가 새끼를 낳으면 절벽 위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키웠다는 이야기와, 절벽 아래 널찍한 암반에서 신선이 노닐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하는 곳으로 절벽 밑에 커다란 바위는 신선이 깜박 놓아둔 갓이 바위로 변했다 하여 갓바위, 또는 선관(仙冠)이라 불린다.
봄이면 활짝 핀 복사꽃, 살구꽃이 강물에 비쳐 아름답다는 들머리의 얼어붙은 강천천은 아침 햇살을 받아 수면이 은빛을 반사한다. 계곡을 왼쪽에 두고 올라가는 길이다. 암반으로 된 계곡엔 수정같이 청정계류 대신 흐르는 탁류를 보기가 못해 고개를 돌렸다.
10시 35분.
금강교다. 비포장이지만 얼마 후면 곧 포장이 될 것이란 걸 누구나 알아챌 수 있도록 바닥이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상태다. 평탄한 오솔길 양 옆으로 벚나무 가로수가 즐비하다. 좌측 금강계곡에서 짙은 봄 냄새를 흘린다.
김용택 시인의 <그리운 꽃반지>를 소개한 朝刊의 잉크냄새처럼 봄은 신선하게 다가든다.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데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 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잎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피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세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계곡 한 가운데서 소형포크레인이 계곡의 바위를 고르는 작업을 하느라 오전부터 굉음이다. 남도의 산록답게 우측에는 산죽이 무성하다. 작은 수직 암벽마다 2~5m 짜리 고드름이 매달려있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다던가? 고드름이 달린 아래로 지나가던 사람이 떨어진 고드름에 사망했다며 일부회원들이 짐짓 멀찌감치 비켜가는 자세다.
10시 42분.
삼인대계곡 탐방로는 계곡을 바로 옆에 끼고 600여m 지점인 松陰橋를 건넜다.
우측에 樹高 10m가량의 삼나무 나목이 겁도 없이 곧게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옆 산자락엔 송음암, 어미바위 등 거대한 바위들이 높이 솟아 하늘을 가리며 계곡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금강교를 건너 계곡 건너편 산 위를 쳐다보면 기묘한 형상으로 삐죽 튀어나온 바위가 눈길을 끈다. 투구봉, 혹은 장군바위라 부르는 기암이다. 이 바위 오른쪽에 뻥 뚫린 곳을 금강문이라 부르고, 금강문 오른쪽에 따로 솟아 있는 기암은 범바위라 부른다. 길을 따라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며 길게 이어졌다. 계곡 건너편 산자락에 부도전이 보인다.
10시 48분.
용소가 있다는 극락교에 이르면 탁한 계류소리가 들리는 우측을 물통골이라 한다.
송음교 이후 약 500m 구간은 옆으로 숲이 들어차고 맑은 개울이 이어져 산책로로서의 분위기가 일품이다. 산길 왼쪽으로 움푹 파인 절벽은 어미바위라 불리는 명소다. 그리고 계곡 건너 깃대봉 사면의 암벽은 송음암이라 불린다. 노송들이 항상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송음암이라 부르는 이 기암절벽 아래에는 5개의 부도가 모셔진 부도전이 있다.
극락교를 건너기 전 계곡의 암반과 소를 아랫용소라 부르는데, 암용이 살던 곳으로 세상이 어지러우면 예언을 하듯이 용이 울어댔다는 전설이다. 아랫용소 건너편의 물통골을 따라 200m를 올라가면 약수폭포가 나온다. 지압효과가 높고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높아 예로부터 아낙네들이 많이 찾았다는 이 폭포 아래에는 약수암이라는 암자가, 위로는 천우사라는 대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10시 50분.
극락교에서 100m 지점에 '강천문' 이라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다.
좌측에 패인 황무재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내린다. 강천사에서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삼인대 비각 오른쪽 황우제골에는 신선대 전망대나 광덕산 또는 고개 너머 장안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 있다. 지근거리에 돌담이 둘러쳐진 비구니들의 도량 강천사가 저만치 있다. 독경소리라도 들릴 법한 계곡은 이미 佛界에 안착한 느낌이다. 일주문에서 150여m 앞이 강천사다.
강천사 경내에서 계곡 입구 쪽 왼쪽 산사면에 삐죽 튀어나온 바위는 바랑을 맨 채 합장하고 있는 부처와 닮았다. 하여 ‘부처바위’라 부르는 기암이다. 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 강천사는 오랜 세월에 비해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다. 세 칸의 대웅전 본당보다 양 옆 요사채가 더 크다. 작다고 하여 깔볼 곳은 못된다. 본디 작은 게 위대한 법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이지 않게 쌓인 품격과 적조한 분위기를 품은 평화스러운 본당이 덩치가 큰 요사채보다 더 은근한 중압감 준다. 경내의 은행나무 나목 사이 정 중앙에 대웅전이 앉아있고, 대여섯 채의 요사채 가람배치가 나름대로 운치가 넘친다.
강천사
강천산에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 강천사가 있다. 절 뒤로 치솟은 암벽과 강천산 암봉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강천사(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 887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통사찰이다.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풍수지리설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도선국사가 보광전, 첨성각 등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년)에 덕현선사가 오층석탑을 세우고 중창하여 사찰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임진왜란(1596년) 때에 사찰건물과 연대암 등 12암자가 소실되었다. 선조 37년(1604년)에 소요대사가 다시 사찰을 재건하였으나 그 뒤 6.25 동란으로 1950년 12월 완전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1959년 김장엽 스님이 대웅전-관음전을 복원하였고 1978년 이경모 스님이 선방과 보광전을 건축하였으며 현재 김재덕 스님이 요사채와 객사를 복원하였다.」
임란 당시 도량 모두가 소실했지만 오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제92호)만은 무사했었는데, 민족상잔의 한국전쟁당시 총탄에 옥개석 4개가 파손당한 아이러니를 목격한다.
※추후 등재
강천사의 원명은 복천사(福川寺, 福泉寺)라 하였으며 또한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강천사라는 이름은 선조 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 강천사(宿 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강천사로 불렀다고 한다. 1760년(영조 36년) 경진판 옥천군지에 의하면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 명적암-용대암-왕주암-지적암 등 강천사에 속한 암자가 12개를 거느렸는데 1000여 수도승이 살았다는 대 거찰이었다고 한다.
강천사 앞 계류 건너 삼인대(지방 유형문화재 제27호)가 있다. 선조 중종반정 공신인 박원종의 횡포와 중종의 폐비 신씨의 복위상소로 죽임을 당한 세 충신(담양부사 박상-순창군수 김정-무안현감 유옥)이 모여 허리에 차고 있던 직인 끈을 풀어 소나무 가지에 걸었다고 해서 <삼인대(三印臺)>란 이름이 비롯됐다.
강천사 정문에서 몇 발자국 옮기면 높이 3m 가량의 원뿔형 돌탑 머리에 <節義塔><절의탑>이란 한자와 한글로 된 표지가 각각 상투처럼 올려있다. 그 옆구리엔 절의탑에 대한 안내간판이 서있다.
※추후 등재
10시 54분.
강천사 울타리에서 50m 지점에 홍화정이라는 육각정자가 나오는 삼거리다.
조금 더 가면 '공원 내엔 야생 멧돼지가 집단 서식하니 혼자서 산행하는 일은 삼가 달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몇 걸음 떼자 오른쪽 사면으로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길옆으론 아래쪽과 마찬가지로 단풍나무가 잘 가꿔져 있다.
<현수교 400km-전망대1,000m-강천댐(1.3km)-산성(2.3km)>
우측으로 올라가는 본격적인 등로다.
이미 이마에서 주체하기 힘든 땀이 흐를 정도로 오늘의 기온은 완연한 봄 등산이다. 시누대밭과 금강송 숲을 바라보며 오른 우측의 작은 공터에 <김장엽묘소>가 있다. 묘비와 수많은 칭송비가 세워있다. 본인의 시신을 의대에 기증한 의인의 높은 뜻에 대한 기념묘소다.
11시 정각. 갈림길 삼거리다.
<현수교 ← (강천산 왕자봉↑) →강천사>
우측은 강천산으로 곧장 올라가는 코스다. 수평으로 된 작은 행로 좌우로 비단같은 산죽밭이 깔려있다. 늘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만은 하산 전에 새 잎을 골라 조릿대 차를 만들 작정이다. 차츰 높아져가는 혈압이 최근 심상하지 않아 조심스럽다.
<용소 70m ↓강천호 800m ← 현수교 30m → 강천사 600m>
1분 후 구름다리(현수교) 앞에 섰다. 일행들이 모여 현수교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이원분 선생님이 참여하여 조심스런 행보를 보인다.
현수교는 강천산 골짜기 오른쪽 능선(북쪽능선)에서 뻗어 나온 단애와 왼쪽(남쪽) 신선봉쪽에서 뻗어 나온 단애가 마주 보는 곳에 놓인 다리인데, 현수교 위에 오르면 강천산 협곡주변의 경관과 주위의 봉우리들이 키재기를 하고 스릴이 넘치는 아찔한 높이로 강천산을 찾는 사람들이면 으레 찾는 필수코스다. 월출산 구름다리처럼 그 경관이 기막히다. 기암절벽이 줄지어 선 삼인대 계곡과 비룡계곡 끄트머리에 장벽처럼 솟구친 산성산을 바라보는 맛도 가히 일품이다. 출렁거리는 현수교위에서 내려다보면 다리가 걸린 단애아래에는 깊은 담과 소가 오늘만은 에메랄드빛 대신 탁류다. 수량이 많을 때 단애아래를 내려다보이는 수정처럼 청정한 깊은 소가 절경이다. 제2강천호에서 중장기가 뿜어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1980년 8월 완공된 현수교는 높이 50m, 길이 76m의 까마득한 이곳의 명물 현수교를 건너 800m 가면 신선봉(425m)에 세워진 전망대가 기다린다. 현수교를 건너면 바로 경사도 높은 철계단에 이어 암릉지대다. 죽순처럼 예리하고 뾰죽하게 박힌 돌과, 절리현상을 암석끝이 신경을 건드린다. 폭이 좁은 암릉 좌우는 절벽을 이루고 쇠난간이 둘러쳐 있다. 요란한 발파소리가 들린다. 자연의 변형과 변태를 위한 폭팔음이 범죄처럼 안타깝게 들린다. 신선봉을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 능선이다.
11시 26분.
신선봉 팔각정 쉼터다.
지붕과 처마까지 콘크리트로 만든 2층 팔각정은 자연을 우습게 아는 인간들의 희화다.
삼선대는 강천산에서 산성산을 거쳐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세 개의 산이 빚어놓은 기암절벽과 계곡들, 그리고 원등계곡 안에 들어선 제2강천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삼선대(=신선대)
신선봉은 강천산 계곡 중간지점의 높이 400여m 정도이므로 전망이 무척 좋다. 입구쪽으로 보든 산성산(강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쪽으로 보든 시야에 들어오는 사방은 시원한 경관이다. 양 산의 주능선이 일목요연하다. 지능선 사이 협곡을 따라 형성된 단애 부근과 능선을 따라 송림이 형성되어 있는 갈색나목 숲과 함께 고즈넉한 조화다. 산성산쪽으로 협곡을 따라 하얗게 빛나는 길이 단애 뒤로 가려지는 곳 위쪽에 강천호 일부가 보인다. 저수지가 만수일 경우와 수량이 적은 현재의 풍광을 대비해봤다. 강천사 경내가 한 줌이지만 장난감처럼 앙증맞다. 강천사 너머 주차장으로 뻗은 V자 계곡은 흔한 정경이다.
신선봉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100m 이동하면 광덕산으로 내려가는 능선 삼거리다.
<광덕산 1200m, 산성산 3500m>
삼거리 내리막에서 오영삼 이사님이 우측손마디 안쪽에 부상을 입었다. 임시처방을 해주는 정감사님의 빠른 손놀림과 표정이 숙연하다.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며 예리하게 박힌 뾰죽돌을 짚은 우측 손의 부상은 장갑을 끼었더라면 다소 경미했을 것이다.
11시 47분.
4거리 안부다.
<광덕산 1000m, 현수교800m, 강천사 1100m>
오르막 능선은 2~30년생 소나무가 꽉 들어찬 능선이다.
대체로 얕은 능선을 오를 때면 콧노래와 함께 여유가 넘친다.
3cm 내외의 눈이 쌓인 송림지대에 이어 활엽수 나목 숲이다.
11시 50분.
491봉에 올라섰다. 서쪽에 떨어져 신선봉이 다가선다. 잠시 호흡을 조절한 후 지그자그 솔밭 내리막이다. 광덕산으로 가는 능선은 울창한 송림으로 여름철엔 상당히 시원한 그늘을 지을 것이다. 얕은 안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에 펼쳐진 순창일대의 들판을 훑었다. 팔덕면 산동리와 장안리 일대 산골속의 들판치고는 꽤 넓다는 낌이다. 산죽이 질펀한 능선을 양경태-홍기오 두 리더와 함께 올라가는 능선이다. 무슨 덕담이라도 일궈야 하는데 얼른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까닭을 모를 아쉬움이다. 가끔 텅 빈 머리일 때면 금방이라도 박살을 내고 싶은 충동이다.
정오가 지난 12시 11분.
광덕산 정상에서 선등한 회원들이 긴 호흡을 뱉고 있다.
<광덕산 578m, 순창군>
<시루봉 ↔ 신선봉, 옥호봉>
대리석 정상석과 이정표다. 산성산 줄기 너머 눈발이 성긴 추월산 줄기가 서성거린다.
광덕산에서 산성산-495봉-강천산으로 연결된 능선줄기는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道界다.
동쪽의 광덕산은 산줄기의 흐름으로 볼 때 주요한 맥을 이은 산이다. 추월산에서 ⊂자 모양을 그리며 강천산 왕자봉(583.7m)에 이른 호남정맥이 다시 ⊂자를 그리며 광덕산에 이른 뒤 해발을 바짝 낮추고 정남으로 흘러 순창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룬 후, 무등산으로 가는 포인트가 이곳 광덕산이다. 그러니까 강천산에서의 호남정맥은 강천산에서 시작하여 광덕산에서 끝나는 셈이다. 이는 강천산 계곡의 물은 섬진강으로 빠지는데 비해 강천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영산강으로 빠지는 분수령이다. 백두대간은 정맥이나 기맥과 달리 강이나 내가 없이 연결된 등줄산맥이다.
정상주란 이름의 작은 巡杯와 행동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시루봉을 향한 가파른 내리막에는 우중이나 겨울설산산행을 위해 로프가 매어있다.
11시 31분.
적우재고개에 내려섰다.
이어 적당한 힘을 쏟아내는 오르막이다.
모처럼 어치소리를 들었다. 문득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닭대가리라고 놀린다.
이는 새의 과학적 두뇌를 모르는 사람들의 편견이다.
이자연기자가 밝힌 지난 2월 1일자 기사새의 뇌구조, 인간과 유사가 흥미있다.
새도 도구를 사용하고 숫자를 센다, 또 의사소통과 거짓말을 한다. 또 새들도 인간처럼 方言이 있다. 새들의 뇌 구조는 생각처럼 원시적이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연구 결과다.
미국 듀크대학의 에릭 자비스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신경학 잡지 네이처 리뷰스 뉴로사이언스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새들이 오히려 일부 포유동물보다도 더 복잡한 인식 능력을 갖고 있다며 새대가리(birdbrain․바보라는 뜻)라는 표현을 앞으로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100년 전 독일의 루트비히 에딩거 박사의 연구 결과에 근거, 새의 뇌 대부분을 차지하는 뇌저신경절이 원시적인 뇌기능과 즉흥적인 행동을 조절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자비스 교수 연구팀은 새의 뇌가 인간의 뇌와 상당히 유사하며, 대부분 뇌저신경절로 돼있다 하더라도 원시적인 구조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새들의 노래와 앵무새의 말 등을 통해 조류의 발성법을 연구해 온 연구팀은 새들의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다며 새를 모델로 학습과 발달, 사회화 등을 연구하는 방안이 신경학계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고 전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새들은 도구를 사용하고, 숫자를 세며, 노랫소리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고, 때론 거짓말(노래)로 남을 속이기도 한다. 자비스 교수는 새의 뇌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뇌 작동 원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만도 못한 인간들이 허다한 오늘 어치소리를 듣고 생각난 횡설수설이다.
정오가 가까운 11시 55분.
헬기장이 있는 너른 공터인 하성고개다. 이어 적당한 힘을 쏟아내는 오르막이다.
<창덕마을 1600m ↔ 선녀마을 1500m>
우측은 선녀마을로 좌측은 담양군 금성면의 창덕마을로 내려가는 사거리 갈림길이다.
이어 적당한 힘을 쏟아내는 오르막에 단애가 보인다. 단애 아래로 보이는 지역은 전남 담양이다. 그 단애야 말로 전라 우도와 전라 좌도의 분계선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군사-행정상 지리적 구분으로 下三道(충청-전라-경상도)를 좌-우도로 구분했다. 그런데 이런 군사-행정상의 구분이 판소리의 서편제와 동편제가 가르는 기준이 됐으니 이는 조선시대 행정상의 경계가 문화적인 경계를 만들었다.
호남정맥을 경계로 판소리의 정통유파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 등 전라좌도에서 발생한 반면, 정통창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기교를 구사하는 서편제는 전라우도에서 발생했다. 비록 낮은 산줄기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문화적 구분을 음미하는 계기를 만난 능선의 행보가 여간 다행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선 오늘의 행운이다. 이어 나타나는 수평능선을 걷는 낭만도 즐거움을 배가한다.
해발 450m 전망암을 지나 하성고개 4거리에 내려섰다.
시루봉을 향한 새로운 오르막이다.
한낮이 흐르는 12시 47분.
큰바위에 올랐다. 멀리 쌀섬을 쌓은 모양의 노적봉과, 그 우측에 시루를 엎어놓은 모양의 시루봉 암봉이 산성의 핵을 이루며 고고한 자태다. 백두대간은 정맥이나 기맥과 달리 강이나 내가 없이 연결된 등줄산맥이다.
송림밭 능선을 지난 가파른 철계단 오르막이다.
시루봉 아래 너른 암반에 선두가 모였다. 암반 서쪽은 단애다.
더 가까이 들어오는 시루봉은 이름 그대로 시루를 뒤집어 놓은 형세의 웅장한 바위 봉우리다. 소나무 줄기마다 매달려있는 ‘가랑이 소나무, 순창군’이란 명찰의 ‘가랑이’란 뜻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사뭇 궁금했다.
오후 1시 27분.
시루봉 우측아래에 올랐다.
시루봉은 산성의 동남쪽 끄트머리 부분이다.
백구두님이 암봉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이지만, 다소 잔설과 얼음으로 오르기가 껄끄러운 시루봉은 피하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그를 만류하고 산성을 따라 동문방향으로 논스톱으로 직행했다. 조금만 더 가면 북바위 암봉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노적봉에서부터 북서로 뻗은 호남정맥을 따라 연대산성(일명 금성산성) 유적이 남아있다. 보수를 거쳐 보존하고 있는 산성은 규모와, 그 위치선정에 감탄이 나온다. 전라 좌우도의 경계선에 이런 견고한 성곽이 구축되었다는 사실은 일견 자연스러운 유적이다. 그 자연적인 험준함을 이용한 강고한 성곽은 북바위봉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노적봉은 광덕산에서 보거나 광덕산에서 접근할 때는 노적가리처럼 둥그렇게 보였지만 정작 능선위에 올라서서 돌아보면 노적봉은 첨봉의 모습이다. 금성산성은 옛것과 최근 복구한 城石이 눈으로 쉽게 구분될 정도로 선명했다. 우리들이 디디고 있는 이곳이 우리들의 수난사 일부가 담겨진 무언의 흔적이며 증거다.
오후 1시 35분.
북쪽에서 산성 길을 따라 동문을 거쳤다. 春色이 도도한 산성의 조춘은 향긋하다는 느낌이다. 3월 4일자 보도에 의하면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하루 30명이 자살을 한다는 통계인데, 이는 48분마다 한명씩으로OECD국 중 증가율 1위다. 정부는 우울증 치료비 지원 등 대책이 마련이 되어야 한다는 언론의 채근이다. 우울증을 앓았던 유명 연예인부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서민들까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2003년도 자살사망자는 1만932명.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주춤하던 자살이 최근 급속히 늘고 있다. 국내 자살 실태는 2003년 인구 10만 명 당 자살사망자는 22.8명이다. 40대, 30대 순으로 자살사망률이 높다. 생산성이 가장 활발한 연령층에서 자살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남·여 모두 봄에 자살 사망이 가장 많다.
자살은 개인의 유전적 소질과 성격, 경기불황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80%는 우울증을 거쳐 자살에 이르고, 20%는 충동적으로 자살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동우(정신과전문의) 연구위원은 “핵가족·이혼·독거(獨居)로 가족의 지지체계가 약화되고 드라마·영화에서 자살을 미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자살이 늘고 있다. 자살의 길목인 우울증을 치료받는 비율이 낮은 것도 큰 요인”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2010년까지 자살사망률을 20% 줄이기 위해 2008년까지 전국 246개 시·군·구에 정신보건센터를 확충하여 자살예방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라는 보도다.
이 즐거운 봄에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만물이 생존을 위해 거친 투쟁을 하는 계절에 말이다. 산을 알면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존의 의욕이 살아날 텐데.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시간과 조건이 맞지 않았는데,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인데......
북바위 아래 삼거리에서 비룡폭포-비룡계곡구름다리로 내려가는 코스가 갈라지는 삼거리다. 좌측 북바위를 옆에 끼고 눈과 얼음이 덮인 오르막엔 가느다란 로프가 매어있다.
오후 1시 45분.
북바위 정상에 올라선다. 월악산 북바위 이름처럼 북처럼 생긴 북바위는 주등산로에서 벗어나 있다. 북바위는 조망이 뛰어나지만, 삼면이 절벽이다. 선등한 강태영 고문께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에는 뒤틀려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다. 사방으로 조망이 훤히 트여 가슴속까지 후련하다.
‘四時之景不同 而樂亦無窮也’
사시사철 경치가 다 다르니, 그것을 보는 즐거움 무궁도 하도다. 歐陽修의 ‘醉翁亭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상을 연령과 계절따라 완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현재가 마냥 행복하다.
강천사 계곡은 지능선에 가려 끝이 없어 보인다. 북쪽으로는 금성산성 성벽을 지나 강천산 왕자봉이 우뚝하고, 그 좌측으로 검푸른 담양호 너머로 담양 시가지가 잡힌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광덕산-덕진봉-서암산(450m)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능선이 육감적인 자태를 흘린다. 북바위 아래 산성길에서 좌측 오르막에 편안한 오름길이 있었음은 연대봉을 향한 행보에서 알아차렸다.
폭 3m내외의 산성길에서 맞는 바람은 비록 찼지만 기분좋은 훈풍에 가깝다.
북바위에서 연대봉까지는 굴곡을 이룬 성길 능선은 리드미컬한 곡선이 퍽 고혹적이다. 북바위에서 볼 때 첫 번째 봉이 운대봉, 맨 뒤에 솟아 있는 봉이 산성산 정상인 연대봉이다. 이 능선을 따라 쌓인 성벽이 금성산성이다. 북바위에서 연대봉까지는 중간에 삼각점(순창 446, 1981재설)이 박혀있다.
오후 2시 02분.
<산성산 603m>
산성 중간지점에 스뎅으로 만든 정상표지판이 돌무지에 꽂혀있다. 산성산 정상인 연대봉(603m)이다. 옛 모습을 고스라니 간직한 금성산성의 성벽길을 밟으며 산행하는 즐거움 또한 기막힌 운치다. 사방으로 트인 시원한 조망은 오늘의 특혜다. 금성산성에서 제일 높은 이곳은 훌륭한 망루다. 발 아래로 깔린 강천사 계곡 쪽은 긴 산성을 따라 이어가고 있다.
연대사의 스님이 축조했다는 산성이라하여 ‘연대산성’이라고도 불린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과 이곳을 지키던 관군사이에 혈전이 펼쳤던 격전지다. 산성산의 이름은 금성산성(전라남도 기념물 52호)에서 비롯된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구축하여 고려 때 본격적으로 축성한 바 있고, 조선 태종 9년인 1409년에 개축한 것으로 전한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터가 있고, 통로 이외에는 절벽 등으로 막혀 통행이 불가능하며, 주변에 높은 산이 둘러싸여 성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군사지리적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요새다. 성의 둘레가 7.3km에 달하고 면적도 약 33만평에 달하는 성으로 원형보전이 그대로 남아있는 석성으로 무주의 적상산성, 장성의 입압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힌다.
2시 6분.
북문에 닿았다. 후미 일행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북문 공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동식을 즐긴다. 커다란 돌이 시커멓게 변해있다. 볼상 사나운 취사흔적이다. 하산은 이 지점에서 송낙바위를 거쳐 제2강천호 쪽이다.
<송낙바위 내려가는 길 → >
겨울색깔이 아닌 진초록색의 강천호와 회색 댐이 내려다보인다.
급경사 철계단 내리막이 한참동안 이어갔다. 표고 대부분을 철계단으로 낮춘 셈이다. 감가상각비처럼 말이다.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 권몽주씨 형수와 약속한 시간이 늦어도 3시인데 어림없게 생겼다. 40여분 늦어지겠다는 연락을 주었다.
2시 35분.
4거리 갈림길에서 직진이다.
<강천제2호 4540m>
2시 44분.
강천호를 가르는 시멘트 다리로 내려서는 철계단이다.
다리 아래로 댐이 저수지를 안고 있다. 축소한 콰이강의 다리로 생각해 두었다.
<산성산 북바위 1.8km, 송락바위 1.6km, 강천사 1.3km>
다리 끝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을 따라 내려섰다.
차량이 통행가능한 평탄한 대로다. 우측 가파른 산록에 포크레인 두 대가 테마공원 조성을 위해 굉음을 쏟아낸다. 공사장트럭들이 오가는 공사현장은 예사 토목공사로 계곡이 요동한다. 도중에 한창 공사현장을 감독하는 젊은 기사들로부터 공사내역을 잠깐 얻어들었다.
하산로를 가로막고 한창 정지작업을 하는 포크레인을 피해 우측 둔덕으로 우회하는 도중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며 좌측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동행하던 백구두님과 강성윤씨가 놀란 듯 부축인다. 좌측 무릎엔 보호대를 차고 있어 시멘트 바닥에 바지가 으깨어 구멍이 난 것에 비하면 찰과상은 심하지 않았으나 관절부위에 미치는 뻐근한 통증이 한참동안 지속됐다.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무릎관절에 큰 손상이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오늘의 운수 탓인가, 나이 탓인가?
뒤틀린 좌측다리가 도통 풀리지 않았다. 제16차 산행에서 얻은 동상에 이어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 와중에 공사 현장과 안내간판을 일별하며 뒤돌아 봤다. 남쪽 산성산과 시루붕이 정면에 걸려있다. 자리 하나는 기막히게 잡았다는 생각이다.
현수교 아래로 내려가는 편안한 길이다.
가끔 오르내리는 공사장트럭과 만나기도 한다. 흙탕물이 된 비룡계곡과 삼인대계곡의 계류수는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는 수난일테다. 그렇더라도 계류수를 삶의 터로 삼았던 수생식물과 어류들의 재생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자연훼손은 머지않은 시간에 부메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생태계는 변화를 지나 변태로 흘러갈 것이다.
3시 4분
구름다리를 정수리 위에 떠받치고 그 아래 비룡교를 지났다.
오전보다 제법 탐방객들의 수가 많아졌다.
3시 10분
강천사 경내로 들어가 샘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비구니 사찰답게 조용한 경내를 디카에 담았다.
발빠른 이동이다. 강천계곡 좌우에 박힌 암벽마다 얼린 山고드름이 지천이다.
오후 3시 40분.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으로의 원점회귀다.
들머리였던 강천사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금강교-극락교-강천사-현수교-삼선대-소목골재-광덕산-적우재고개-전망암-하성고개-큰바위-시루봉-동문-산성산-송낙바위-강천제2호수-현수교입구-강천사를 돌아 매표소주차장으로 원점회귀 10Km 거리에 소요된 시간은 5시간 15분이다. 강천산까지 포함한 산행이라면 6시간 30분~7시간 쯤 소요될 것으로 요량했다.
정재근감사님의 좌측무릎 이상사실도 하산이 완료되면서 알게 됐다. 통증이 심한 것으로 미뤄 예사 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됐다. 그냥 염려로 끝날 일이라면 다행이련만......
걱정했던 이원분 선생님도 무난하게 하산을 마쳤다. 고마운 오늘이다.
3시 42분.
예약 장소로의 이동이다.
스마일 산악회 리더였던 권몽주씨의 고향으로 그의 형 권장주씨가 운영하는 ‘순창내고향전통고추장‘(063-653-3077, 011-677-3077)에 미리 예약을 해둔 상태다.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강천사 입구에서 우회전, 793번 지방도로를 따라 순창읍내로 가다가 만나는 백산삼거리에서 광주방면 24번 도로로 다시 우회전하여 1Km 남짓 서진하면 좌측에 고추장마을이 나온다. 한옥 기와집 50여 가구 전체가 장을 담그는 마을이다. 순창고추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동기는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태조의 등극을 위해 순창 회문산 만일사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다. 이태조가 무학대사를 찾았다가 부근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을 먹어 보고 그 맛을 잊지 못해 현감에게 진상토록 하여 그 후부터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고추가 전래된 것이 임진왜란 이후이고 보면 일부 와전으로 빚은 덧칠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재래식으로 담그는 순창고추장은 검붉은 빛깔과 특유의 향내와 맛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시판매장에서는 마을에서 만든 고추장-된장-간장은 물론 각종 장아찌류도 맛이 담백하여 인기이며 시식하고 구입할 수 있다. 집집마다 자기이름을 내건 상호로 동일한 가격에 장을 팔고 있다.
늦어진 오후 4시 5분.
풍성한 인심이 넘치는 남도의 식탁 앞에 모두가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정성껏 차린 늦은 식사지만 따뜻한 마음이 모든 것을 상쇄해 주었다. 포식자처럼 전투적(?)인 식사시간을 마치고 각기 전통 장의 구매시간을 가졌다. 女高에 입학한 늦동이를 생각해서 도시락 반찬 몇 가지와 좋아하는 청국장을 구입했다. 강서구 M여고는 아직까지 학교급식이 未실시다. 녀석이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나의 늙음도 빠르게 앞질러 간다. 회한이 드는 것은 순창의 오후햇살이 유시(流矢)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순창내고향고추장집> 여인들의 풍요로운 손맛과 덤이 오가는 흐뭇한 시간이었다.
“우리 시동생,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에요.”
권몽주씨의 형수 기능인 양내승씨가 배웅하며 마지막으로 던진 인사말이다.
오후 5시 2분.
마을을 뒤로 떠나는 시간이다. 오전의 그 길대로 답행이다.
오늘 점심식사비를 제공한 최영복씨, 지난 운영위원 결정사항인 제4주 등산 첨가와, 홍보이사 한명을 추가시킨 내용을 회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이사님 우측 손목이 부어오른 상태다. 은근한 통증을 감당하기 힘드나 보다. 그 와중에도 농담을 나누는 여유가 도탑다. 그래서 밝게 웃었다.
경부고속도로 안성휴게소에서 짬을 내어 김성현 기사와 소급한 버스계약서 싸인을 마쳤다.
그가 미흡한 사항에 대한 요구가 있었지만 차츰 해결하기로 했다. 상호 약간씩의 양보가 있었던 원만한 계약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들은 유목민족의 후예인 서양인들처럼 계약문화에 미숙하다. 계약 자체를 자기중심적이거나 힘에 의해 해결하려는 관행과 악습이 여전하다.
밤 8시 50분에 당산역을 지나 9시 13분에 귀가했다.
쌀쌀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하게 저며 오는 밤이다.
*도로안내 :
1)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 나들목)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27번국도로 순창-순창읍내
4거리-우회전하여 담양방면 24번 국도로 2.8km-백산리 삼거리 우회전-793번 지방도로로 6.5km 북상-강천저수지를 끼고 좌회전-강천산 진입로(승용차로 전주에서 1시간 10분,
광주에서는 30분 정도 소요)
2) 전주IC-전주시내-17번국도-임실-30번국도- 덕치-27번국도-순창
3) 백양사IC- 북하면-담양-순창
산성산 입구까지 가는 담양댐행 군내버스도 오전 6시 55분부터 오후 9시 1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담양 읍내에서 산성산 임도 주차장까지 택시 요금은 9,000원쯤 나온다.
*대중교통
-서울~순창 :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에서 1일 6회(09:30~15:50) 운행하는 고속버스 이 용. 또는 5~10분 간격(05:30~21:45)으로 운행하는 광주행 고속버스 이용.
광주행 야간우등고속버스는 13회(22:00~01:00) 운행.
-순창~강천산 :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07:30~20:30)으로 운행하는 군내버스나 1일 9회 운행 광주발 순창 경유 강천사행 직행버스,
터미널 전화 063-653-2186.
*숙박 :
-강천각모텔(652-9920)외에 민박 10여 개소, 순창읍내 여관, 민박 다수
충장로집(653-5388), 늘푸른음식점(653-9284), 연화정(653-4794), 일송정(652-0950),
전주선비집(652-5380), 완도식당(652-5439), 호남식당(652-1209), 순창식당(652-2691),
광주식당(652-5377), 강천매운탕(652-5408), 햇님달님(652-5419)
-산성산 입구에는 숙박시설 미흡, 담양읍내 중앙장, 성림장, 담양여관 2인 1(25,000~30,000)
-청계리 강천사 입구부근(강천각(0674-52-9920), 영빈장(0674-52-6060), 이화(0674-53-8000) 충장로집 652-5388, 늘푸른편의점 652-9284, 연화정 652-4794 등.
-고추장마을(내고향전통고추장, 권장주 063-635-3077, 011-677-3077)
*특 산 물 :
-순창고추장, 장아찌 (무, 더덕, 오이, 깻잎. 감, 굴비 등)
(구입처 : 순창고추장 민속마을 063-653-8101~3 ,4333)
-기타 한과, 자수, 복분자 ,매실
순창자수는 진상품으로 알아주었으며 특히 원앙금침에 땀땀이 놓은 순창 베개 수는 처녀 시집가는데 혼수감으로 필수품이었다. 순창자수가 명성을 떨치게 된 동기는 조선조 중엽 순창현감이 임금을 알현할 때 왕이 관복에 수놓은 자수솜씨에 감탄하자 그 후 부터 진상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문화재와 볼거리:
-구름다리(길이 70미터, 높이 50미터),
강천사(강천사 오층석탑-유형문화재 92호, 삼인대-27호), 금성산성(연대산성)
-추령마을 장승축제
순창에서 정읍쪽으로 20km 지점에 복흥면소재지에서 6km거리에 내장산 갈재를 넘기 전에 추령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 거대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나무장승이 서있고, 그 안에 2천여 평의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샛대로 만든 선사시대의 초가 10동과 그 사이사이에 20여 개의 목장승과 10개의 솟대가 세워져 있다. 장승축제는 내장산 백양사에 관광버스가 몰리는 10월 중순부터 11월초 사이에 개최되어 농악놀이와 각종 민속행사, 토산품쓰기 풍물장터가 열린다.
-둔전리 들독놀이
쌍치면 소재지에서 시산을 거쳐 내장산을 넘어 가는 길목, 영광정 옆에 둔전리가 있다. 이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 아래 계란 모양의 80kg의 들독이 있는데 가끔 마을사람들이 모여 들독놀이를 하며 공동체의식을 되살린다. 돌을 들어 힘을 겨루고 머슴 새경을 정할 때 그 값을 정하는 민속놀이다.
-<天峙人>이란 찻집도 들려 볼만한 명소다.
강천사-정읍쪽-월정초교 삼거리에서 좌회전-전남담양-29번 도로와 다시 만나 정읍쪽으로 우회전 1km 지점인 하늘재(天峙) 마을에 닿으면 ‘천치인찻집’이란 큰 간판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좁은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희한하게 생긴 집을 발견한다. 열린 문 두드리고 차를 마시곤 내고 싶은 만큼 찻값을 내고가라는 이색적인 부부도예가(40대 전후)가 운영하는 찻집이다.
*강천산 군립공원 : 1일 주차료 승용차나 4톤 이하 2,500원, 관광버스나 4톤 이상 4,000원.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400원.
강천산군립공원 관리사무소 전화 063-650-1533.
*전북 순창군 팔덕면 순창군청 063-650-1023(www.suncha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