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인가 '태백산맥’인가
오늘을 사는 그 누구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그래서 항상 기록과 추론에 기대는 역사는 실재인가, 실재를 가장한 허구인가. 정복자와 지배자의 역사속에서
묻혀버린 사실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이번호부터 연재되는 `함께 떠나는 역사산책'은 이같은 의문을 독자들과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연재의 첫
회는 백두대간. 면면히 흐르는 강과 함께 민족의 생활을 규정지었던 백두대간이 날조된 산맥으로 잘려나간
역사의 진실을 짚어본다.
우리선조들의 산악체계
백두대간과 장백정간뿐
초등학교 시절 산맥이름을 열심히
외웠다. 제일 북쪽의 낭림산맥부터 시작해 `적유령산맥-묘향산맥…' 순으로 열심히 외웠다. 그러나 그렇게 외웠던
산맥들의 이름을
지금은 대부분 잊어버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지리부도’를 펼쳐보니 언진산맥, 광주산맥
등 생소한 이름도
꽤 있다. 예전에
다 외웠던 이름들일텐데….
세월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조석필이란 의사이자 산악인이 `태백산맥은 없다-이땅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산맥이 우리의 실생활과 관련 없는 이름들이었기에 쉽게 잊은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장백정간과 13정맥이란 체계로 우리 산악을 이해했다.
산맥은 지질구조선에 입각해 분류한 것이고 정맥은 강을 중심으로 분류한 것인데, 강이 중심이 되다보니까 자연히 인간생활권이
분류의 기준이 된 것이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강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을 산이 단절시키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산맥개념에 의하면 멸악산맥은 예성강을 거침없이 건너지르고,
광주산맥과 차령산맥은 각각 한강과 남한강을 건너지른다. 산이
강을 건너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로 인해 생활권이 파괴된다는
점에 있다.
지금쓰는 산맥이름은 日 학자가 편의상 붙인 학문적 作名에 불과
전통적 산악개념은 생활권 이뤄지는 江 중심으로 구성
우리 선조들이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인식한 것은 강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형성되는 것이지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생활권을 기준으로 산을 바라보는 인문학적 사고를 한 것이다. 1대간·1정간·13정맥중 산이름이 명칭이 된 것이 허리격인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둘 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일본학자들이 명명한 수많은 산맥 이름 중에서 강을 기준이
된 이름은 압록강 남쪽의 강남산맥이 유일하다.
우리말에 `물줄기'뿐만 아니라 `산줄기'라는 말도 있는 것은 우리의 산악개념이 흐름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물줄기가 흘러흘러 바다로 가듯 산줄기도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 것이다.
산을 물줄기처럼 끊이지 않고 흐르는 맥으로 보아 비록 높은 두
산이 이웃해 있어도 그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갔으며
평탄한 지역의 독립된 산이나 낮은 평야의 구릉에도 지맥이 연면히 흘러 바다까지 이어졌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거쳐 남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지만 산맥개념을 사용하면 낭림산맥-태백산맥-소백산맥
등 다섯으로 토막날 수밖에 없다. 즉 우리의 전통 산악 인식에 따르면 `태백산맥은 없다.'
우리가 학창시절 수없이 산맥이름을 외웠어도 금방 잊어버린 반면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13정맥은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1800년 경 신경준이 '동국문헌비고’여지고를
저본으로 '산경표’를 만들면서 체계화되었는데, 그 유례는 훨씬
오래되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때 사천소감(司天少監)이던 우필흥(于必興)이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의 '옥룡기(玉龍記)’를 인용해
"우리나라 지세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가 물의 근원, 나무의 줄기와 같은 땅이다”라고 말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에서 끝나는'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이다. 우필흥이 도선의 옥룡기를 인용했다는 말은 최소한 신라말에도 백두대간의 지리인식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간'이란 용어는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1751)에서
처음 사용하고, `백두대간'이란 말은 실학자 이익이 '성호사설’(1760년 경)에서 처음 사용하는데 이 무렵이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와 국토를 바라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백두대간을 줄기로 두만강을 향해 장백정간이 뻗고 13개 정맥이
갈라지면서 한반도가 삼천리 강산이 되는 지리인식이 그 이름까지 이 시기에 체계화 된 것이다.
대간에서 뻗은 강줄기
유역따라 13정맥 형성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도, 그리고 취락구조와 언어권까지 정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인간의 생활권을 중심으로 산악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같은 충북이라도 금강 수역에 속하는 청주와 한강 수역에 속하는
충주가 문화면에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동학 농민혁명 때의 봉기권역도 이 생활권이 기준이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의
광주·나주권이나 경상도의 상주·예천권, 충청도의 예산·홍성·서산·당진·태안권 등의 봉기권역은 모두 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산맥개념은 1903∼1904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少藤文次郞)가 체계화 한 것이다. 당시 한반도 광물탐사사업의 학술책임자였던 그는 탐사보고서를 제출하며 '조선의 지리개관(The Orographic Sketch of Korea)’과
'조선지질도’를 첨부했다.
지질학교수였던 그는 당연히 지질구조선에 입각해 산줄기를 잘라
분류했는데 이를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矢津昌永)가 '조선지리’같은 지리서에 실은 것을 별다른 수정이나 고민 없이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백두대간은 한 맥주회사의 TV광고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막상 지리교과서에서는 한 교과서만이 도움글 형식으로
소개하는데 그칠 정도로 외면 받고 있다. 하루빨리 우리 지리교과서들도 민족의 생활과 동떨어진 산맥개념 대신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전통적인 산악인식체계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식민의 시대였던 20세기를 극복하는 21세기의 국토인식이
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