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사(史)에서 가장 참담한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가 태여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 서쪽 왼쪽)과
그의 아들 정조가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영춘헌(迎春軒)이 그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 나란히 있다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사도세자가 탄생한 집복헌이다. 그 집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은 싹 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 앞에 별도의 건물 영춘헌을 마련하였다.
만천하에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고 명예을 회복시키고저 하는 그의 의지가 드러난 곳이 바로 영춘헌이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였다. 기구한 운명인지 그 정조도 바로 영춘헌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하직한다.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의 내부이다.
그 집에서는 조선왕조 사상 가장 처참한 비극의 싹은 트고 있었다.
그 비극은 경종으로부터 시작한다. 경종은 그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이다.
경종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다.
경종독살설로 근거 2가지가 유력하게 등장한다.
① 게장과 생감!
게장과 생감은 상극인 음식이라 한의학에서는 함께 먹는 것을 꺼린다.
왕세제 연잉군(영조)은 병석의 경종에게 이 두 음식을 함께 올린다.
② 인삼과 부자!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병세가 급격히 나빠진 경종에게 연잉군이
이번에는 인삼과 부자를 올린다.
독성이 강한 약재인 부자. 이를 두고 당시 어의는 크게 반발했다.
경종은 후사가 없이 그렇게 죽었다.
경종의 뒤를 이은 이가 바로 그 이복 동생인 연잉군 즉, 영조다.
"영조가 노론세력과 야합하여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이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생모는 영빈 이씨이다.그는 영조대왕의 두번째 빈이다.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많다.
침방내인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녀는 세자를 낳은지 두 해도 되지 않아 저승전의 한상궁과 최상궁에게 세자의 양육을 맡겼다.
두 상궁은 경종비 소속으로 소론이다.
사학자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그들은 비록 궁녀의 신분이지만 노론이 자신들의 원수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여인들이 다시 저승전에 들어와 세자를 모시게 된 것이다"며 여기서 문제가 비롯되었음을 시사하였다.
이덕일은 "두 상궁은 혜경궁 홍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은연중에 세자에게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주었을 수도 있다"며 "어쩌면 경종의 죽음에 관한 여항(閭巷:길거리)의 소문들을 전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경종의 의심쩍은 죽음에 대해서 사도세자는 그들을 통해 많이 들었다.
그는 경종을 음해한 노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공공연히 사도세자는 "백부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노론은 그가 임금에 올라간 이후의 정세에 두려움을 느끼며 그를 모살하고자 했다.
영조도 친소론적인 경향을 보이는 사도세자에게 정치적인 위협을 느끼며 혹시 경종의 복수 운운하며
자신마저 해치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생각까지 품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평양에 왔다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가 거병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영조는 그를 친국했고,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는 조선왕조사의 가장 끔직한 비극이 일어났다.
정조는 1800년(정조 24년)6월 28일 유시(오후 5~7시) 영춘헌에서 눈을 감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조의 승하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북한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상복을 입은 벼)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의 <김준혁의 화성이야기> 정조의 승하편은 정조의 임종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때 정조의 치료기간 중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대비 정순왕후가 찾아왔다. 정조의 병이 과거 영조가 1766년 겪었던 증세와 비슷해 그때 복용했던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춘헌에 있던 모든 신하들을 내보내고
혼자 약을 들고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왕실 법도상 어떠한 경우에도 사관은 반드시 국왕 곁에 있어야 하는데도 정순왕후는 사관마저 전각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순왕후는 “전하가 승하하셨다”고 통곡하며 영춘헌 밖으로 뛰쳐나왔다.
승지 이만수가 급하게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가니 정조는 무엇인가 급하게 소리를 지르는듯 했다.
정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토한 말은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마디였다.
수정전은 바로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정조는 혼미한 상태로 누워있는 동안 정순왕후가 자신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조는 정순왕후가 들어온 뒤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왕의 죽음에 여인 한사람만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이다.
과연 정순왕후가 정조를 죽이기 위해 독약을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대로 영조를 위해 처방했던 성향정기산을 준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과는 조선의 국왕이었던 정조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정은 정조의 죽음을 종기로 인한 결과였다고 인정하고 6일 뒤 11살의 어린 세자로 하여금 대를 잇도록 했다.
그리고 4년동안 정순왕후는 여군주(女君主)로 수렴청정했다. 그리고 정조의 모든 개혁적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됐다.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은 즉위하는 자리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경악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늘 노론과의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노론에게 발목을 잡혀 정약용 김정희 등 유능한 인재를
제때 기용하지 못하는 등 제대로 뜻을 펴지도 못하였다. 끝내 그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것도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 앞 영춘헌에서 할머니 정순왕후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삶을 마감한다.
정순왕후는 1745년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태어나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1759년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정조가 1752년생이니 정조와는 불과 7년차의 나이밖에 없지만 할머니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소생은 없었다.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다.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에서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세자의 치죄를 당연시하던 벽파로 대립하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에 벽파(僻派)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정조와 두 후궁 사이에 태어난 은언군 은신전 은전군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되거나 자진케 하였다.
장희빈 경종 영조 정순왕후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정조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가장 참혹한 비극의 눈물이
얼룩진 창경궁 그 영춘헌 일대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