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중에서도 그래도 예부터 꽤나 알려진 명승지라 할 수 있는 곳이 지금의 효창동 일대였다.
'효창동(孝昌洞)'이란 이름은 이 곳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째 아들로, 정조 6년 창덕궁에서 태어났다. 정조 8년 8월에 세자로 책봉됐는데,
정조 10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곳 효창동은 '밤나뭇골'이라는 토박이 땅이름으로 불리던 곳으로, 조선시대엔 고양군 율목동(栗木洞)에 속했었다.
문효세자의 묘소는 처음에는 '효창묘'라 했다가 고종 7년에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또 효창원에는 문효세자의 묘소 뿐만 아니라 의빈 성씨의 묘도 있었다.
의빈 성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문효세자의 생모가 되는 분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던 그 해 9월에 아들의 뒤를 따라 이승을 떴다.정조는 온순하고 정숙한 의빈 성씨를 총애하였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잃고 난 후에도 정조는 자주 효창원에 거둥하였다.
효창원에는 또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도 있었고,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소도 있었다.
지금의 효창동 금양초교가 있는 그 앞길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비석거리'라 했던 곳이고,
지금의 백범로가 지나는 길목은 전부터 '하마비(下馬碑)'라 했었다.
효창원에 왕실의 묘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 말을 타고 지날 때는 예의를 갖추어
하마(下馬)하여 지나라는 뜻의 비석을 세웠던 곳이다.
문효세자의 묘는 통상 '애기능'이라고 불러 왔다.
효창공원 안을 흐르는 계곡물은 '능개천'이라 했었다.
예전에는 무척 맑은 물이었던 이 개천은 지금은 이 일대 아파트와 주택의 하수(下水)가 된 채
콘크리트 길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묘를 비롯하여 의빈 성씨의 묘소며,
숙의 박씨, 영온옹주의 묘는 해방을 전후해서 모두 서오릉 경내로 이전했다.
이 효창원은 일제의 침략으로 많은 수모와 상처를 안아야 했다.
1884년 6월, 일제는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오시마(大島)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이 곳 효창원, 만리창에 사령부를 설치한다.
서울에 와 있던 일본인 거류민들은 오시마 소장의 여단이 입성했을 때 일장기를 흔들면서 환영을 했다.
그 후부터 일대의 동명(지금의 용문동)을 그들 마음대로 여단장인 오시마의 이름을 따서 '대도정(大島町)'이라고까지 했다.
효창원 일대에 대도여단이 주둔하면서 일본인 거류민의 수효도 늘어나고, 그들의 집단 부락도 생기게 됐다.
한일합방 후에는 이 곳에 터전을 잡은 일본인들이 효창원 동북쪽 일부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무상으로 임대받아 효창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또 일본인들은 그들의 군대인 대도여단이 주둔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 서북쪽에 기념비를 세우고,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두어서 서울 장안에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아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남대문 안에 있는 소방서의 사이렌으로 대치하여 이 곳의 오포는 폐지가 되고 만다.
일제가 물러간 다음에 이 효창원에는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세 의사의 묘소를 쓰게 된다.
해방 이듬해 세 의사의 묘를 조성하는 공사를 할 때,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자리 앞을 파다가 곡괭이 끝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파보니 큰 석함이 출토되었다.
이 돌로 된 함 속에는 문효세가가 가지고 놀던 것으로 추측되는 장난감과 쓰던 물건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효창공원의 안으로 들어서서 동쪽으로 30미터쯤 가면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가 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해방되던 날까지 만주로 중국 땅으로 전전하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소앙, 차리석 선생의 묘소가 있다.
또, 효창공원 정문에서 북쪽으로 30미터쯤 올라가면, 세 의사의 묘소가 있다.
세 의사의 묘는 오른쪽으로부터 백정기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순으로 되어 있다.
백정기 의사는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실패하고,
1933년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주중(駐中) 일본대사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사하셨다.
윤봉길 의사는 1926년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와 상해사변 전승 기념식장인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거류민단장과 일본군 사령관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하고, 1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체포해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이봉창 의사 역시 일본 천황의 암살을 모색하다 실패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당시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나가사키 형무소에,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동경 근교에 매장돼 있는 것이 확인됐지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찾을 길이 없어 애타게 찾던 중,
윤의사 의거 때 상해에서 피살된 백목대장의 저택 문 앞에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을 알고 간신히 발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7월 초에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할 수가 있었다.
세 의사의 묘나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나 모두가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귀국한 직후에 자리를 잡아 두었던 것인데,
그는 자신의 운명도 예견했던지, 자기 묘자리도 지정해 나무로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유언대로 삼의사 묘역 북서쪽 언덕에 안치되었다.
김구 선생은 우리 나라에 건국 초기에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큰 공로자이고,
상해 임시 정부에서 주도적 구실을 해 온 사람이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얼마 안 되는 1949년 안두희라는 한 군인의 총탄을 맞아
숨을 거두고 이 묘역에 묻히게 되었다.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세 분의 묘역,
그리고, 조선시대 문효세자의 묘소가 있는 효창원은 이처럼 역사가 깊은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일대에 숙명여자대학교가 들어섰고, 축구 경기장도 들어서서
그 옛날의 왕실 묘역은 가늠할 길이 없다.
-배우리선생의 홈페이지 WWW.TRAVELEVENT.NET의 '서울 땅이름'에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