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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암(廣菴) 이벽(李檗)은 1754년 경기도 포천군(이벽의 생가는 현 포천시 화현면 543-1,화현3리 신기동 마을에 있었다)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 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 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검단산 아래 윗두미에서 살기도 했다.
본관은 경주 국당공파후 지퇴당 정형의 7세 손이고 ,자는 덕조(德操)이고,호는 광암(曠庵)이며,세례명은 세자(洗者) 요한이다.
그는 천주학 실천운동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성조(聖祖)로 존경을 받고 있는 광암 이벽이다.
이벽의 가문과 선조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매우 총명한 구국충신의 집안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가 원(元) 명(明) 청(淸) 등 강대국의 침략으로 존망의 기로에 처할 때 국제관계를 담당한 대표적인 학자 출신의
충신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고 불리며 다섯살 때 이미 철이 들어 사리판단이 어른다웠다.
일곱살 때는 경서를 읽고 이해하였다고 한다.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은 일찍이 10세 미만의 어린 이벽을 이렇게 극찬했다.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정학술의 <이벽전>에서-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만(溥萬), 어머니는 청주 한씨(韓氏)였으며, 6남매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8척장신으로 장군의 형상이였다.할아버지는 호남병마절도사 부총관이며 아버지는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 종2품이며
형 이격은 무과에급제하여 16년이나되어 별군직이였고 그의 아우 이석은 좌포도대장이였고 후에 남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다.
이벽은 천주교에 관한 책을 일찍이 접하게 된다.
그의 6대조인 묵암(默菴) 이경상(李慶相: 1608~1647)은 병자호란 때 중국에 끌려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생활한다.
그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서 8년간 체류하면서 아담 샬 신부에게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소현세자는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귀국했다. 그때 이경상이 그때 함께 가지고온 천주교에 관한 책이 집안에 전해지고 되었다.
스물다섯살 때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르려는 선비들 중 정약전 이승훈 권상문 등과 함께 학문연구와
토론에 힘썼다. 이때 이미 그는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으며 실행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벽 성조께서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고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다불뤼 주교의 술회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은 이벽을 추종했고 (從李檗) , 자기 형 정약전 (1758~1816) 은 아주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했으며 (嘗從李檗), 뿐 아니라 권일신 (1742~1792) 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했으며 (熱心從李檗) ,
이가환 (1742~1801) 역시 이벽을 추종했다 (從李檗)' 고 기록하고 있다.
강진에 유배돼 있을 때 정약용은 중용강의 (中庸講義) 를 보충하면서 4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이벽 선생을 사모해
"나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 (進德博學) 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 금할 수 없구나" 하고 그를 그리워했다.
정조 임금이 중용에 관한 질문 70조목을 선비들에게 숙제로 내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수표동에 살던 이벽에게 물어 답을 올린 결과 승지 홍인호 등이 보고 "정약용의 답안을 본 즉 필시 특출난 학식을 가진 선비 (識之士)가 있어 도운 것이 분명하다" 고 했었다.
강진에서의 18년 귀양살이를 끝내고 1818년 고향 마재에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우선 젊었을 때 이벽 선생과 함께 자주 찾았던 천진암 (天眞菴)에 와 "30여년만에 다시 찾아오니, 천진암은 이미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전혀 없구나 (寺破無舊)" 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귀양가기 전 일찍이 단오날 둘째 형 정약전과 천진암을 찾았던 정약용은 이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서
'천진암에 오니, 전에 이벽이 늘 앉아서 글을 읽던 자리가 아직도 저기 있네 (李檗讀書猶有處) .
그때 짓던 시와 문장의 탁월한 그 풍류 문채는 정말 신비스러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風流文采須靈境) ,
그리하여 지금 또다시 한나절내 술을 마시며 한나절 내내 읊어본다 (半日行杯半日吟)' 고 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부만은 이벽이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는 부친의 미움을 받아 고집스럽다는 뜻의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일찍이 광암 이벽은 당시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를 탐독했다. 그의 현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책들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한문으로 된 서학서들은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종교 등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광암은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산생시킬 수 있었던 기반으로서
서구 정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7년에 이미 광암 이벽은 소장학자들과 강학에 참여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등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는 이 토론회에서 옛 성현들의 윤리서를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선교사들이 지은 책들도 언급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서학의 교리연구에 전념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779년 권철신 정약전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이 때 그가 종교적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했다.
그는 훗날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신앙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783년 겨울 광암은 친구인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서학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1784년 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천주실의,기하원본 등 많은 서학서들과 십자고상(十字苦像)과 성화(聖畵) 등
관련 물품을 가지고 오자 광암은 외딴 집을 세내어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서학의 종교성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로 연구하였다.
광암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서울 수표교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전파에 나섰다.
그는 교분이 두터운 양반층 학자들과 인척은 물론 중인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서학을 전교했다.
이 때 그에게 세례받은 사람들은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 등 남인학자들과, 중인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등으로 전한다. 이후 광암은 이가환 이기양 등 당시 서학의 유포에 반대하던 유림의 저명인사들과 토론하였으며
그의 정치한 논리와 웅변이 이들을 압도했다고 전한다.
광암 이벽은 서학의 의식과 전교활동을 위해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필요함을 느끼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교단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천주교의
특성을 나타낸다.
이벽은 이 교단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의 집에서 포교 강학(講學) 독서 사법(師法)등의 천주교 전례의식을 주도하였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자처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를 하는 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성균관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해 일단 해산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벽의 천주학운동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 이부만은 펄펄 뛰며 아들 이벽을 설득과 회유 등으로 천주교를 배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버지 이부만은 온갖 수단 방법에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은 아들 이벽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마침내 대들보에 밧줄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였다. 당황한 이벽인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럼 밖에 나가 다니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집안과 문중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그런 다짐을 한 것이다. 아버지 이부만은 자살기도를 중단하고 아들이 천주학을 하러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음을 문중 밖의 선비들에게 알렸다.
이벽은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갈아입지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광암 이벽은 자신의 서학신앙에 대해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하면서까지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의 굳은 뜻을 돌이킬 수 없어
이 길을 택한 것이다. 결국 1786년(정조 10년) 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 저항하여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다는 주장도 있고,집안에서 독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할 정도다.
달레(Dallet, C.H.)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를 배교자로 단정하고 있으나,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삼던 당시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단순히 규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선구자로 평가되는 광암은 당시 남인학자들이 서학의 과학기술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이지만 종교만은 이단시하는 분위기에서,서학을 학문적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인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그가 많은 조선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 설립의
주춧돌로 믿어진다. 그의 저작으로 전하는 '성교요지'(聖敎要旨)의 전반부는 신약과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漢詩)로서
기독교 성서에 대한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을 표현하였고,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의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하였다. 이는 그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서학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광암 이벽이 지었다고 전하는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는 4.4조의 총 34구의 한글가사이다.
내용은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천주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영혼에의 눈 뜸이 노래되는데 삼강오륜도 중하지만 천주공경이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둘째 단락은 영혼불멸과 불사금지(佛祀禁止)와 천당지옥설의 시비를 노래했고,셋째 단락은 천주를 믿으면 무한한 영광이라고 했다.
광암 이벽의 인물평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에는 많은 철인들이 자발적으로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천주가 계시다는 것을 스스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벽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많은 연구를 하며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 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고, 마침내 이승훈은 이벽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간다고 말을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게 하였다."
-1845년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의 서간에서-
"제 일생에 대성현(이벽을 지칭)을 한 분 만났습니다.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여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을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신덕과 열성은
교리 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영혼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 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1789년 이승훈이 구베아 주교에 보낸 서간에서-
"그는 재질과 총명이 뛰어났는데 성질이 완강하여 아버지가 그를 일찍 무과 출세시키려고 무반의 인물이 될 것을 희망했으나
끝내 듣지 않아 부친의 애정이 줄어지고 또한 고집이 대단했으므로 별명을 '벽(檗)'이라 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신장이
8척이나 되고....내외면의 체모가 엄숙하였다. 지혜와 구변이 민첩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니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혼자 읽어서 문리를 공부하여 학문이 뛰어나 타인과 대화할 때 정연한 이론으로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여 세상에서 유명하였다." 샤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