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대한 글의 연재를 시작한다.
나는 연출가이다. 연출가는 희곡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연기자와 가장 많이 시간을 많이 보낸다. 대본을 처음 나누어 받는 날부터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연기자와 함께 지낸 시간은 고통과 영광의 시간이다. 작품을 분석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의 목적을 규정하고 블로킹을 긋고 총연습에 들어가고 막이 오르기까지, 연출가와 연기자는 때로는 혁명의 동지처럼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류에 회의를 느낄 만큼 미워하기도 한다. 서로가 배울 때도 있지만 서로에게 짐이 될 때도 있다. 공연이 끝나고 연출노트를 정리하다가 프로그램에 나온 연기자들의 사진을 보면 연습도중에 겪었던 잊지 못할 사건들이 떠오른다. 연기자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왜 그렇게 넘어 갔을까. 그때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해 주지 못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을까.
연출가는 때로는 연기자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연출가라는 입장에서 연기자가 납득하지도 못하는 주문을 한 적도 있다. 연출을 한답시고 연기자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연기자들을 격려해주지도 못하고, 또 시간이 없다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연기의 쟁점에 관하여 토론이 벌어졌을 때, 논리를 앞세우고, 이론을 들먹이고, 자신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 뱉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으로야 연극을 함께 만드는 동료들을 무시하려 한 적이 없지만 미묘한 연기체험의 순간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결과적으로는 연기자를 무시한 꼴이 된 적이 왜 없겠는가. 어떻게 하면 연출의 설득력을 높이고 연기자가 연기에 편하게 접근을 할 수 있게 안내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관심에서 연기에 관한 글을 써 보기로 한다.
앞으로 쓰는 글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자의 연기 접근 과정을 이해하여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연출가의 입장에서 연기자의 작품 분석과 연기 접근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연기이론에 대하여 강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연기에 대한 이론을 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연기에 대하여 이러 저런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고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분석의 한 방법을 함께 이해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매월 연재되는 글은 독립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서로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를 보면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연기는 공부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울 수는 있다고 믿는다. 연기자 자신의 체험이 바로 좋은 스승이다. 연극과 같은 찰나의 예술에서는 순간의 진실밖에 자랑할 게 없다. 연기의 세계를 더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은 건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연기자들과 연습장에서 겪은 체험을 정리하는 글을 오래 전부터 써 보고 싶었다. 비록 확신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경험을 토대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건 내가 잘 안다"고 말을 한다. 연출가는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줄 알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불확실한 것이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오히려 확실한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 이 글은 연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룬다. 따라서 불확실하고 완전하지 못하다. 연기에 대하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원탁의 기사>나 <라프타> 등지에서 수없이 나눈 이야기들도 그 중에 들어 있다. 또 그러한 이야기가 더 활발하게 토론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연재하는 글에서 희곡 몇 편이 교재처럼 사용될 것이다. 함세덕의 <동승>, 셰익스피어의 <햄릿>, 입센의 <유령>, <민중의 적>, 체홉의 <벚꽃동산>, <세 자매>가 지금 희곡 후보들이다. 연기자는 물론, 연출가, 극작가,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도 기대한다. 관심 있는 분들이 글에 대한 비평과 제안을 해준다면 필자로서 더 이상 고마움이 없을 것이다. 금년 말까지 다룰 주제는 다음과 같다.
극적 행동의 이해
표현의 동기와 목적
연기의 주어진 환경
연기자의 작품 분석
햄릿의 독백 분석과 내면의 독백
등장인물의 전사(前史)
등장인물의 이해
감정과 생각
연출가의 설득력
2. 연기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
연기와 연기자들에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순서 없이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질문에 누구든지 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하는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는 구별 가능한가?
무엇이 좋은 연기이고 무엇이 나쁜 연기인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연기자의 카리스마는 무엇일까?
연기를 잘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연기자의 연기는 누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연기자는 무대에서 어떻게 등장인물이 되는가?
과연 자신을 버리고 등장인물이 된다는 표현은 맞는 말인가?
무대 위에 선 연기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연을 하지 만
관객은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 연기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는가?
모두 만만한 질문들이 아니다. 연기자나 연출가들은 연기와 관련된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자신이 없어한다. 말로는 느낌의 세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기의 본질이 설명하기에 어려워서 그럴까. 연기교재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선뜻 어떤 책을 추천하기도 망설여진다. 또 읽어서 이해하기 쉬운 책을 찾기도 어렵고, 어렵게 서술된 책이나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책들은 알고자하는 의욕마저 꺾어 놓는 수도 있다.
연기자들에게 "연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답을 들을 수 있다.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사람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사람
관객의 감정을 주관하는 사제
칭찬과 갈채를 먹고사는 사람
어두운 밤하늘을 밝혀주는 별과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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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나에게 지금, 그 질문을 한다면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답하겠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 은 '상처를 쉽게 받는 마음'과는 다르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은 연기의 세계에서 미묘하게 느끼는 감정의 상태를 말한다. 이는 느낌의 세계에서 어떠한 자극이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함을 의미한다. 상처받을 수 있는 지경까지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고서 어찌 등장인물을 창조할 수 있을까.
연기는 때로는 쉬워 보인다.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솟는다. 그렇다. 사실 누구나 다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연기를 할 수 있다' 는 사실과 '연기를 잘 한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더구나 연기를 '제대로' 접근하기는 말처럼 쉽지는 않다.
3, 연기의 어려움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나온 꼬마 주인공은 인터뷰에서 '연기하기는 아주 쉬워요. 뭐, 뭐 하는 체 하면 되는 걸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듯이 고민하지 않고 연기에 임했다고 보인다. 어른들도 그런 상태에서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이의 천진난만성을 잃어버린 어른들은 긴장상태에서 각오를 다짐하며 영감을 떠올리려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예술가들은 영감이 날 때 작업을 한다.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창조적 휴지기간을 적절하게 사용을 한다. 영감을 가지고 창조행위를 하는 건 연기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 필요할 때에 언제나 바로 영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다른 예술가처럼 영감을 찾거나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영감의 주인이 되어 이를 마음대로 부려야 한다. 이것이 연기예술의 신비스러운 비밀이고 어려움이 아닐까 한다.
연기의 중요한 어려움은 하나 더 있다. 연기자 자신이 연기의 도구이자 사용자라는 사실이다. 연기자는 자신을 도구로 하여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고 그 등장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용자이다. 여기에 연기자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연기술의 이해와 실행에 어려움이 따른다.
'연기자는 등장인물이 되어야 한다. 등장인물고서 먹고, 마시고, 걷고, 꿈을 꾸어야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치 연기자는 등장인물과 일치하여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자는 어디까지나 연기자일 뿐이다. 결코 등장인물이 될 수가 없다. 아니 되어서도 곤란하다. 김 아무개라는 연기자가 이순신 역을 맡았다고 해 보자.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이 "너 진짜 이순신이다"라고 칭찬을 해댈 때 그 친구들이 실제로 이순신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통용되고 연기자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만일 연기자가 정말로 등장인물이 되었다고 믿고 등장인물처럼 행동한다면 아마 두 가지 경우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연기자에게 무당처럼 신이 내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상실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일 것이다. 연기자의 임무는 그가 맡은 등장인물을 올바르게 창조하는 일이다. 연기자가 등장인물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등장인물을 창조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연기자는 등장인물의 극적 행동을 창조함으로서 등장인물처럼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서 관객은 연기자를 등장인물로 보아주고 믿게된다. 연기자가 창조하는 것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이다. 등장인물이 해야 할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하느냐 수행하지 못하느냐에 연기의 성패가 달려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제대로 수행되었을 때 관객은 감동을 받는다. <나 홀로 집에> 나왔던 꼬마 연기자처럼, 아마추어 연기자들도 종종 아마추어 연극에서 때묻지 않은 연기표현으로 감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때 아마추어 연기자들은 연기를 잘 해서가 아니라 연기를 '제대로' 해서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연기를 '제대로' 한다는 말은 바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뜻이다. 전문 연기자가 공연에서 프로의 기량으로 무대와 객석을 압도했다 하더라도 그가 맡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제대로 창조하지 못했다면 감동은커녕 외면을 받는다.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를 가르는 기준을 대라고 하면 감히 연기자가 등장인물의 행동을 올바르게 수행했는지 아니면 행동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하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겉모습만 닮으려고 애만 썼는지를 판단해 보면 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공연을 보면 연기와 극작의 관계가 선연히 눈에 들어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