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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巖陵山行 걱정 뚝 !!!
北漢山 一周記(족두리봉에서 의상봉까지 산행기)
1. 산행일자 : 2005년 11월 20일 (일요일)
2. 산 행 지 : 북한산 비봉(560m), 문수봉(715.7m) - 서울, 경기 고양
3. 참 가 자 : 강동규, 노승애, 박기양,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 윤희원, 이용준 등 9명
4. 일정 및 시간(산악대장 제공 자료)
[1] 산행 계획 : 약 8시간 30분 정도 소요
♣ 수원(06:00) ∼ 동수원TG ∼ 영동고속도로 ∼ 서서울TG ∼ 금천 ∼ 성산대교 ∼ 녹번동(07:20)
♣ 용화1매표소(08:00) → 족두리봉직전 암벽(08:45) → 족두리봉(수리봉, 09:00) → 갈림길(09:25) → 향로봉(10:00) → 갈림길(10:20) → 비봉(10:30) → 승가봉(11:40) → 문수봉(13:00/점심/13:40) → 청수동암문(13:55) → 부왕동암문(14:40) → 용출봉(15:10) → 가사당암문(15:30) → 의상봉(15:40) → 백화사(16:30)
♣ 은하교(17:00) ∼ 구파발 ∼ 성산대교 ∼ 서서울TG ∼ 영동고속도로 ∼ 수원(18:30)
[2] 산행 실제 : 7시간 05분 소요
♣ 수원(06:50) ∼ 북수원TG ∼ 영동고속도로 ∼ 서서울TG ∼ 성산대교 ∼ 불광동 ∼ 독박골(07:25)
♣ 07 : 35 : 독박골 대교정식당 앞 → 07: 38 용화Ⅰ매표소 → 갈림길→ 07: 59 족두리봉 오름 슬랩바위지대 → 08: 18 / 08: 25 족두리봉 → 08 : 33 족두리 암봉 통과 (암릉 하강시 매우 위험함) → 08 : 47 사거리안부 → 09:05 향로봉 전 암벽 위험구간 앞 → 09:25 향로봉 통과 → 09:35 갈림길 → 09:45 비봉 → 10:03 사모바위 → 10:16 승가봉 → 10:20 석문 → 10:27 문수봉 직전 암릉 우회 갈림길 → 10:50 / 11:10 문수봉 직전 암릉 위, 휴식 → 11: 17 문수봉 → 11: 20 대남문 → 11: 27 청수동암문 → 11: 30 716봉 → 11: 45 / 12: 13 점심식사 → 12:20 중성문 갈림길 → 12:40 나월봉 → 12:50 부왕동암문 → 12:58 증취봉 → 13: 09 용혈봉 → 13: 20 용출봉 → 13: 31 가사당암문[대남문 2.5km(↓), 백화사 2.8km(←), 산성매표소 2.4km(↑)] → 13 : 42 / 13 : 57 의상봉 → 14:18 갈림길 [백화사입구 1.5km(↖), 의상봉 0.8km(↓), 산성매표소 1.4km(↗)] → 14: 32 삼거리 → 14: 35 백화사매표소 → 14: 40 백화사 입구
♣ 백화사(15:00) ∼ 산성입구, 막걸리 한잔 ∼ 내부순환 ∼ 성산대교 ∼ 서서울IC ∼ 수원(17:30)
5. 산행기
[1] 출발직전
이른 아침 수원 송죽파출소 앞에서 박사장 차에 승차(06 : 10분경), 급하게 질주하여 서서울TG를 통과하고 성산대교를 건너 산행 출발지 불광동에 도착, 0 0 0 설렁탕 집에서 설렁탕, 뼈 해장국으로 아참 식사.
[2] 족두리봉이 어디쯤인가?
07 : 40분경 용화매표소를 통과하여 북한산 산행의 첫발을 내 디뎠다 아침인데도 산행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도 서울 인근 산이고 산세가 좋아 찾는 이가 많은가보다. 시작부터 가파른 암반 산행이다. 모두 숨소리가 거칠다.
용화 Ⅰ 매표소를 출발하여 20여분, 오늘 산행의 첫 관문 『족두리봉』아래 도착했다. 족두리봉은 암반 정상의 생김이 족두리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경사각(60도 정도)이 더 심해지고 산 전체가 암반으로 마땅히 버티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바위틈도 없다. 서 있으면 그대로 미끄러져 산 아래로 때굴때굴 굴러 내릴 것 같다. 족두리 봉에서의 하산은 더 난감하다고 한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上策. 넓고 편한 길을 택해 가노라니 길을 잘못 가고 있단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손과 발을 암반에 밀착시켜 오른다. 스파이더맨이 된 기분이다. 초겨울의 찬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발과 손끝에 힘을 집중시킨 땀이다. 암반의 틈새를 잡고 버티며 간신히 족두리봉 정상 바로 밑에 도착하여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쾌청한 날씨라 서울 도심이 멀리까지 보이는데도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족두리봉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며 잠시 휴식.
휴식을 끝내고 다시 향로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는 巖盤 直壁으로 내려가고 나머지는 巖峰 右回 길을 택했다. 길가에는 2002년부터 2004년에 걸쳐 직벽을 타고 내리다 사망한 사람과 부상자의 수를 기록한 위험 표지판을 세워져 있는데 매년 사망 8∼9명, 부상 열 두서너 명이나 되었다.
[3] 향로보은 더 위험한데 ---.
족두리봉을 돌아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족두리 형상이 더 뚜렷해 보인다. 다시 기념 촬영을 하고 안부를 지나 향로봉 아래에 도착했다. 이곳은 족두리봉보다 더 위험한지 출입 금지 표지판과 木柵을 설치해 놓고 출입 금지를 시키고 있다. 향로봉 자체가 큰 바위 덩어리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정상 지점이 보인다. 위험 표시를 하고 출입 금지를 시키는데도 암벽을 타고 오르는 산꾼들이 많은지 족두리봉에서와 같이 사망과 부상자의 수를 연도별로 기록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어지간하면 좋은 길로 돌아갈 만도 한데 굳이 암벽을 타고 오르는 것은 그만큼 스릴이 있기 때문이리라. 안교감, 노부장과 함께 우회 길을 택하고 나머지는 직벽을 타고 향로봉 정상으로 오른다.
[4] 아슬아슬한 곡예, 오이봉
향로봉 정상을 비켜 안전한 우회 길로 가다 옆으로 빠져 향로봉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능선에서 대원들과 만나 또 한 번의 위험 구간을 통과한 곳이 『오이바위』다. 오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두 팔로 끌어안고 아슬아슬한 曲藝를 하며 타고 올라야 했다.
[5] 碑峰에 올라
간신히 오이바위를 안고 올라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뒤를 곳 따라 올 것으로 생각했던 노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을 하며 작은 능선을 넘고 碑峰을 올려다보니 노부장, 우리보다 먼저 올라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어, 비봉(碑峰, 560m)이라고 한다. 비봉 역시 오르는데 그리 간단치가 않다. 키를 넘는 직벽을 타고 올라야 했다. 안교감은 아예 비봉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안전한 길로 돌아 나가고 나머지는 키 높이가 넘는 암벽을 타고 오르는 수고를 했다. 시야가 툭 터지며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 도심의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암반의 중앙쯤에 네모진 화강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新羅眞興王巡狩碑遺趾)'로, 순수비가 세워졌던 터에(遺趾) 대신 세워 놓은 모조품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진흥왕은 551년에 백제의 성왕과 함께 고구려 점령지이던 한강 유역을 탈환하여 상류지역을 차지하고 2년 뒤에는 백제로부터 하류지역까지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영토를 삼았는데, 비석은 한강 유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이 신하들과 함께 이 지역을 순행(巡行)하여 구역을 확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북한산에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新羅眞興王巡狩碑)는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북한산의 비봉(碑峰) 정상에 세워져 있던 것을 지금은 경복궁으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흔히 북한산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은 부근에 승가사(僧伽寺)가 가깝고 조선 태조 때의 고승인 무학(無學) 대사의 탑비가 있어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1816년 7월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비봉에 올라 이 비석을 조사하고 이듬해 6월에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다시 조사한 결과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글자의 마멸로 건립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561년에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 사이의 어느 해일 것으로 추측되며, 비면의 각자(刻字)는 모두 12행으로 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楷書體)로 음각되어 있다. 이찬(伊찬) 등급의 고위 관등(高位官等)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보이며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 때의 인물과 관직제도 연구에 좋은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 http://yoon2y.com.ne.kr/mount/beebong.htm>
[6] 望婦石 『사모바위』
진흥왕순수비(북한산비)와 주변을 조망하고 다시 걸음을 옮겨 『사모바위』로 향했다. 사모바위 직전에 넓은 헬기장이 있고 단을 쌓은 공터가 있다. 아마 산꾼들이 雲集하는 곳인가 보다.
대형 둥근 암반 위에 사각의 바위가 얹혀 있는데 이것이 『사모바위』다. 이름으로 보면 누군가를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형상이야 하는데 생김생김이 사모하는 느낌이 얼른 와 닫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승가봉』으로 향했다.
산행 후 인터넷에서 찾은 『사모바위』의 유래
○ 사모바위는 '김신조 바위'라고도 불리는 데, 지난 68년 북한의 청와대 폭파 기도 때 생포된 김신조 등의 1차 목표지점이 사모바위였다고 한다.
○ 사모바위는 사각의 바위가 얹혀져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이야기다.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자는 전쟁터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반가운 얼굴 대신 그녀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의 소식은 없고, 그는 당시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인들이 모여 살던 북한산 자락(지금의 모래내, 홍은동)을 떠돌며 그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구기동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과연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 다른 이름으로 장군바위라고도 하는데 양쪽 어깨에 견장을 올린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출처 : NAVER 지식 검색창에서>
[7] 佛心이 자리 매김 한 僧伽峰 · 문수봉
사모바위를 뒤로하고 다시 암반을 타고 오른 곳이 『승가봉』이다. 승가봉은 산아래 '승가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인가보다. '굽이굽이 바위 사잇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산허리의 선각(禪閣)이 단풍 속에 자리 잡았네’라고 다산 정약용이 가을의 '승가사'를 보며 읊은 시다. 이미 단풍은 멀리 가고 산행 인파가 몰리는 중에도 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승가사'의 모습이 한결 고즈넉해 보인다.
○ 승가사(僧伽寺 :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1)는 '僧伽大師'를 봉안한 독특한 사찰이다. 승가대사는 西域人으로서 서기 640년에 출생하여 당나라로 건너와 53년간 불교 전교에 헌신한 분으로 갖가지 변화를 자유자재로 하여 기적을 나타내어 동방의 불교 弘法에 큰 획을 이루어 관음보살로 화신 되어 중국의 각지에 승가당이 설치되어 있다. 위쪽 암벽에 조각된 마애석불님상은 기실 32현상에 의한 관음보살상으로 승가대사와 인연을 깊게 하고 있다.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1,400년간 왕상공경 (王相公卿)이 국난 때마다 참배 기도 드려 가피를 입었으며 백성의 소원도 한가지만은 꼭 들어주는 영험이 따랐다고 한다. 승가사의 명칭도 승가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창건의 취지가 담겨져 있다.
승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에 속하며 보물 제215호 마애석가여래좌상과 보물 제1000호 석조승가대사상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25m 높이의 ‘호국대보탑’이 인상적이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상세보기 - 승가사>
* 승가봉을 지나고 『石門』을 통과하여 문수봉 오르기 직전의 암봉에서 배낭 무게도 줄이고 허기진 배도 채울 겸 간식 시간(11: 00시경)을 가졌다.
* 쉬는 것도 잠시 다시 문수봉(715.7m)을 오른다. 오늘 산행의 중 가장 높은 峰이고 중간 기점이 된다. 깎아 절벽이고 산 높이도 만만치 않아 오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앞사람의 뒤로 바짝 붙어 바위틈에 손가락을 끼우기도 하고 돌출 부위를 잡고 발로 버티며 直壁을 올라 잠시 숨을 고르다 암반에 손바닥을 바짝 붙이고 엉금엉금 기어오르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서야 문수봉 정상에 간신히 도착했다. 어렵사리 문수봉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사방이 巖峰이고 巖山이다.
[8] 北漢山城
숨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다시 진행하니 산 능선을 따라 산성이 이어지고 사람들이 붐비는 『대남문』도 눈에 띈다. 『북한산성』에 도착했다.
북한산성(경기도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소재의 토축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다. 이때 백제의 주군력(主軍力)이 이 城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그 뒤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벌군의 중심요새가 되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완전히 보존되었다.
<출처 : NAVER 테마 백과사전 중에서>
[9] 의상봉 가는 길
* 먼저 온 안교감과 『대남문』에서 만나 『청수동암문』을 지나 성곽의 넓은 공터(716봉)에 자리를 잡고 점심 도시락을 꺼낸다. 당초 계획은 문수봉(13 : 00시)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걸음을 빨리 한 탓에 거리,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1 시간 빨리 도착)하여 점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산행 중 가장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 여러 가지 찬으로 식사를 하는데 강동규사장 복분자 술을 꺼내 놓는다. 巖壁, 巖陵 산행 때문인지 오늘은 요강을 깰 생각이 없나보다. 飯酒 한 잔으로 모두 사양이다.
*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 나월봉, 부왕동암문,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향로봉 근처에 헬기 한 대가 선회를 하고 있다. 사고가 났나보다고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암반을 타고 내려 『가사당암문』에 도착. 이정표를 보니 대남문 2.5km, 백화사 2.8km, 산성매표소 2.4km로 표시 되 있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가 『백화사』인데 이곳에서 하산을 해야하는가? 이미 선두가 앞서 가버려 갈등이 생긴다. 계획으로는 『의상봉』이 남았는데 --- 後尾로 오는 노부장을 기다리며 산악대장에게 전화, 계속 진행하여 의상봉까지 가야 한단다. 『가사당암문』에서 다시 가파른 山峰을 올라 치니 앞쪽에 철계단이 설치된 의상봉이 가까이 와 닫는다.
* 13 : 40분을 좀 넘겨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의상봉』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 경로가 한 눈에 들어오고 맞은편 계곡 건너에는 백운대(836m), 인수봉, 노적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암반 산행이 지루하다 하면서도 지척에 백운봉, 인수봉, 노적봉을 두고 오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하면서도 見物生心이 발동하는 것이 속인의 속성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백운대, 인수봉, 노적봉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는 것으로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 하산을 서둘렀다.
[10] 마무리
의상봉을 출발하여 가파른 암반 경사 길을 와이어 줄에 의지하고 발로 버티며 한 시간 여를 걸음 하여 백화사에 도착, 대로변으로 이동하여 포장집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아침 출발지로 이동했는데 119 구급차가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골목길로 접어든다. 사고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아찔했던 오늘 산행이었던가. 탈없이 산행을 끝낸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2005.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