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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個人的聖經』과 高行健
1. 서론
1) 머리말
우선 그의 작품 중 靈山이 아닌 一個人的聖經을 주제로 잡은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물론 지금의 高行健을 있게 해주고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그의 대표작은 분명 靈山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문혁서사와 관련해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一個人的聖經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글을 쓰며 노벨 문학수상자라는 신분으로 아직까지도 자국에서 이중적 신분으로 지내고 있는 그의 신상에 대해 알 수 있으려면 그의 자전적 작품인 一個人的聖經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2. 본론
1) 高行健의 성장배경
까오싱젠은 1940년 1월 4일 강소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내 상황은 항일전쟁과 함께 국공간의 내전이 치열했던 시기였으므로 정치 상회환경이 매우 어지러웠다. 전국이 항일전쟁과 내란을 함께 겪어야 했으니 당연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시시각각 변하는 전쟁상황에 따라 국민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피난을 다녀야 했다. 까오싱젠은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린시절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래 글은 까오싱젠 스스로가 회고하는 그의 어린시설 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서양문학을 좋아했다. 이 점은 물론 우리 집 환경과도 관계가 있다. 우리 집 부모는 상당히 자유화돼 있었다. 부친은 국민당 시대에 국가은행의 고위 직원 이었다. 가정환경이 좋았다. 나는 항일전쟁시기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도처로 피난을 다녔던 때였는데 국가은행이고 은행에는 차가 있었고, 어딜 가나 먼저 가족들을 안전 하게 보호했기 때문에 별 다른 고생은 없었다. 은행의 고위 직원은 대부분 대학을 나 오고 영어를 공부했고, 부인이나 여직원들은 음악을 배운 배경이 있었다. 그래서 피 난 시에도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 당시 가정에서 가부장적 분위기는 굉장했다. 아 무도 함부로 부모에게 대들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부모와 대등하게 대화 했 고, 비판도 했다. 그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다. 우리 엄마는 교회학교 출신이었 다. 엄마와 이모는 기독교 청년회 아마추어 연기자였고 4-5세이던 나도 가입을 해서 현기를 했다. 엄마는 항상 아이들에게 서유럽의 동화나 소설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나 는 비교적 연극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톨스토이나 토스트 에프스키의 번역 소설을 찾아다 읽었고, 대학 1-2학년 동안 대부분 중요한 서유럽 소 설의 번역판을 읽었다.1)
1950년 이후 까오싱젠의 가족은 남경으로 갔다. 까오싱젠의 가족들은 남경에서도 큰외삼촌의 보호아래서 큰 문제가 없었다. 까오싱젠의 부친은 어느 정당에도 가입한 적이 없었고 줄곧 은행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가정은 안정되어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문화대혁명이 벌어지면서 그의 인생은 전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까오싱젠의 어머니는 이런 사회적 격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나서 자신을 개조하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는 결국 농촌으로 쫓겨 가서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농장의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까오싱젠에게 문화대혁명은 그에게 절대 잊고 싶은 추억인 동시에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전개해 나가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사상개조 명령에 따라 안위성의 농촌으로 下放되어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까오싱젠은 5년간 농촌의 육체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창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운다.2) 고된 생활 중에서도 그는 노동이 끝나면 생각을 정리해 글을 썼다. 그는 글쓰기를 숨기기 위해 종이를 몇 조각으로 쪼개어서 작은 종이 위에 잔글씨로 쓴 다음,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넣어 보관하다가 이것을 다시 깡통에 넣고 습기를 막기 위해 석회석으로 싸서 집 앞마당에 묻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아내의 고발로 틈틈이 적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야 하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2) 高行健의 ‘노벨문학상’수상에 따른 중국 내․ 외의 상이한 반응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까오싱젠이 선정되었을 때 세계 언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까오싱젠은 서구사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까오싱젠은 ‘중국인으로 중국어로 작품을 쓴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다. 까오싱젠은 파리에 거주하는 망명 작가로서 ‘프랑스 시민’이다. 하지만 그의 파리생활은 단조로웠고, 그 자신이 원래가 자신을 잘 들어내지 않는 성격이며, 왕래하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서유럽 언론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의 작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까오싱젠의 작품들이 말크비스트교수를 만나고 나서부터 이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말크비스트교수는 유일하게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漢學者였으며, 동시에 ‘노벨문학상 평선위원’이기도 했다. 말크비스트교수가 이후 靈山을 번역하고 서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스웨덴어로 출간되었다.
까오싱젠이 중국인으로서 ‘중국어로 쓴 작품’을 가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1901년부터 1999년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 96명 가운데 3/4에 달하는 71명이 유럽이나 미국의 작가들이었고, 아시아 작가라고는 인도에서 한 사람, 일본에서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런 점에서 ‘노벨 문학상’을 백 년 만에 작가가 수상했다는 것은 중국사회에서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하지만 막상 까오싱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로 했을 때, 중국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세계 언론이 까오싱젠의 수상에 대해 호기심과 찬사를 보내는 상황에서도 중국 정부는 불만과 비판적인 입장을 들어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대륙에는 저명한 작가들이 많이 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그들을 선정하지 않고 오히려 까오싱젠을 선정한 것에 대해 우리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고,3) 중국 작가협회 책임자도 “중국의 작가협회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노벨상위원회의 결정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문학성보다 정치성을 배려한 것이라고 까오싱젠의 수상을 비난 했다.4) 중국 내 언론매체들은 그의 수상과 관련해 일체의 보도금지조치를 취하면서도 당분간 까오싱젠 개인을 비판하는 행동은 유보했다.5)
그러나 까오싱젠의 수상에 대한 홍콩언론들의 태도는 열광적이었다. ‘20세기말 중국인에게 주는 최대의 영광’이란 주장과 함께 까오싱젠의 작품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경쟁적으로 수상 사실을 보도했다.
대만은 모든 면에서 중국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까오싱젠의 수상에 대한 대만의 태도는 중국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대만은 까오싱젠이 노벨상을 받기전부터 그의 대부분의 작품을 출간해 온 만큼, 그의 수상이 모든 중국인을 뿌듯하게 하는 영광이라고 평가했다.
노벨상문학상 수상전후 까오싱젠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엇갈렸다. 비판의 초점은 주로 정치적 입장을 강조하는 중국에서 나왔다. 물론 중국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비판적 입장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까오싱젠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고 또 그의 작품을 애독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해외는 물론 중국 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아닌 개개인이나 집단의 입장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3) 고행건의 작품 세계
한편의 소설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처절한 인생의 역경 속에서 얻어진 진귀한 체험을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모든 작가나 독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까오싱젠의 경우도 이것에서 예외일수는 없다. 까오싱젠의 작품도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 배경과 주변 환경 혹은 이념적으로 겪은 체험들이 그대로 그의 작품 속에 용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점은 까오싱젠의 작품의 분명한 특징이기도 하다. 까오싱젠의 작품들은 소설이나 희곡, 어느 것도 까오싱젠의 체험에서 얻어진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력과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풍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자신이 창조한 독특한 세계라는 점을 강조하듯이 은연중 자신만의 체취와 취향을 편린처럼 번득이고 있다. 까오싱젠의 작품 속에는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강렬한 개인적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6)
까오싱젠의 작품을 읽기란 그리 수월하지 않다. 난해하기도 하고 지루한 점도 있다. 또 어느 면에서 중압과 긴장을 느낄 수도 있다. 까오싱젠의 작품들은 가볍게 읽고 유쾌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 대해 호감을 갖는 이유는 까오싱젠이 살아온 치열한 인생의 고통들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그의 작품 속에 재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까오싱젠의 문학작품 속에는 자신의 경험과 주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매우 정직한 작가이다. 사회주의 체제라는 중국적 현실 속에서 까오싱젠의 연극은 성공한 작품도 있고, 물론 실패하거나 금지된 작품도 있다. 그러나 성공한 것이든 금지된 작품이든 그의 작품들은 매번 사회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까오싱젠은 의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전제로 작품을 쓰거나 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쓰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의도적이든지 의도적이지 않든지 결국 까오싱젠의 작품에서는 자신만의 주장을 분명 읽어낼 수 있다. 까오싱젠의 작품들은 매번 민감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나선다. 바로 이런 문제들이 중국사회주의라는 벽에 부딪히면서 마찰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까오싱젠이 스스로 밝힌 그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9년이다. 1980년 그는 廣州의 월간지 「隨筆」에 ‘現代小說技巧初探’이란 문예 비평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까오싱젠이 불어를 통해서 얻은 ‘현대소설작법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장은 중국의 비평가들에게 ‘현대주의(modernism)이냐, 현실주의(realism)이냐’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은 작가들 사이에 굉장한 열기를 불러왔고, 이 論戰은 1982년까지도 계속되었다.7)
까오싱젠은 소설과 희곡사이 장르의 벽을 동시에 넘나들었다. 까오싱젠은 소설과 희곡이 각기 다른 영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두 장르의 벽을 일종의 ‘표현형식’의 차이정도로 생각했다. 1982년 이후 까오싱젠이 발표한 희곡과 소설을 비교해 보면, 희곡에서 볼 수 있는 연극적 기교가 소설의 형식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극에서도 소설에서의 ‘對話’기법을 효과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점은 까오싱젠의 작가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편집「우리 외할아버지에게 낚시대를 사드렸다」에 실린 17편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이 모두 대화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또 여섯 편이 대부분 獨白으로 되어 있다.
까오싱젠은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일정한 소설이라는 형식을 써야 했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8)
오래 동안 답습해 왔던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문학형식에도 관념적이거나 혹은 기교적인 혁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까오싱젠은 소설의 형식으로 사회문제를 제기한다든지, 정치현실을 비판한다든지 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현실 속의 정치-윤리-사회-철학과 같은 문제들은 정치가 윤리-도덕가 사회학자 철학자들에게 맡겨서 그들의 저술을 통해 알리는 것이 문제를 보다 철저하게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까오싱젠의 작품들은 두 시기로 구별된다. 물론 두 시기의 작품들이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우선 첫 단계, ‘중국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대부분이 희곡작품인데, 일부는 상영 시부터 대단한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일부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82년 ‘절대신호’(희곡)
1983년 ‘차참'(희곡)
1985년 '야인'(희곡) '붉른 주둥이라고 불리는 비둘기'(중편소설집)
1986년 '피안'(희곡)
그리고 다음은 두 번째 단계, 까오싱젠이 파리에 정착하고 난 이후 쓴 작품들이다.
1988년 '명성'(무용극) 홍콩에서 공연
1989년 '성성만변조'(무용극) 미국에서 공연
1990년 '영산'(장편소설) 1986년 집필착수, 1990년 출간(중문본)
1990년 '도망'(희곡)
1991년 '생사계'(희곡)
1993년 '산해경전'(희곡)
1995년 '沒有主義'(평론집)
1996년 '周末4重奏(희곡)
1999년 '한 사람의 성경'(장편소설)
2000년 '八月雪'(희곡)
2001년 '또 다른 미학'(화집+미술평론)
까오싱젠이 소설가로 본격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은 파리에 나와서 「靈山」과 「한 사람의 성경」을 발표하고 나서이다. 특히 까오싱젠이 희곡작가로서가 아닌 소설가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까오싱젠의 제2기 시절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다.
4) 까오싱젠의「逃亡」
까오싱젠이 중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고 나서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당시 그는 친구를 통해 미국의 한 극 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주제로 한 희곡을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까오싱젠은 「逃亡」을 쓰게 된다. 까오싱젠이 정치적 문제를 희곡의 소재로 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까오싱젠이 작품을 미국으로 보냈을 때, 미국 극장 측은 사건의 특성을 감안해 영웅중심의 스토리로 개작해 줄 것을 요청해왔고, 까오싱젠은 받은 돈을 돌려주고 즉각 원고를 다시 돌려받았다.
까오싱젠이 쓴 「逃亡」은 일반들이 예상하는 천안문사건의 영웅들의 활동상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逃亡」은 '현대의 비극'이란 부제가 달려있고, 결코 복잡하지 않은 2막 짜리 연극이었다.
천안문사건 전야, 20세 청년학생이 젊은 여성을 구조해서 길가의 아무도 없는 빈 창고로 숨어든다. 여기서 이미 이곳에 숨어있는, 본격적으로 시위에는 참가하지도 않고, '항의성명'에 싸인 만 한, 유약한 중년 작가를 만나게 되고, 세 사람은 지하실에 숨어 하루를 보내게 된다. 세 사람은 성격이 각양각색으로 청년학생은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이다. 적극적인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고, 민첩하고 빠르지만 충동적인 약점이 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도 "모든 도시는 투쟁하라, 노동자들은 파업하라"고 주장한다. 젊은 여성은 청년에 비해 한 살이 많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없이 현실에 끌려가는 듯한 태도이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중년 작가는 정치에 개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정치란 원래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평소에도 혐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는 단지 '당을 비판하는 선언문'에 싸인을 했을 뿐이다.
세 사람은 인생관이 다르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 더 이상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극한 상황에 숨어있으면서 도망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결국에 중년 작가는 도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일 뿐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현실은 끊임없이 작가를 속박하고 구속한다. 젊은 여성은 더욱 비관적인 사념에 사로잡혀 있고, 마침내 그녀는 "정말 너무 황당하다!"는 절규를 한다.
물론 이 연극에서 주인공은 중년 작가이다. 그만이 「逃亡」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며, 어느 의미에서는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까오싱젠은 이 연극에서 1년 전 중국을 뛰쳐나온 자신의 입장을 겹쳐보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逃亡」은 까오싱젠 자신을 위한 변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까오싱젠은 중국의 지식인으로서 중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중국을 떠났으나, 천안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정신적으로 받는 중국으로부터의 압력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이 발표되고 나서 중국 공산당은 까오싱젠을 완전히 파문하고 까오싱젠을 재차 '指名批判'(소위 중국식으로 '點名批判'이란 심각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했고, 공식으로부터 정식 퇴출시켰으며, 까오싱젠의 베이징 집을 완전히 봉쇄하고, 그가 발표한 작품을 모두 금지 시켰다.9)
5) 까오싱젠의 「一個人的聖經」
「一個人的聖經」을 직역하면 「한 사람의 성경」이다. 그러나 작품을 통독하고 나서 다시 제목을 생각한다면 「나 혼자만의 성경」이라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래는 이 것과 관련해 까오싱젠이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해 스스로 밝힌 부분이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펼쳐지고 있던 야회 회식은 거리마다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대를 곤혹스럽게 했다.……이러한 고독감이 그대를 항상 구원해주었는데 하지만 그대는 여 하튼 기독교인이 아니었기에 자신을 희생해 가며 세상 사람들을 깨우칠 필요는 없었고 또한 부활할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 다."(제16장)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멀리 떠나야만 한다. 심경을 평화롭게 하여 어둡게 변해버린 기 억을 굽어보며 지나온 길을 세심히 검토하기 우해 언뜻언뜻 빛나는 발광점을 찾아내야 만 한다.……그대는 구세주가 아닌지라 그저 그대 자신만을 구원하리라."(제17장)
성경의 말씀은 신도들에겐 지상의 명령인데, 성경은 원수도 사랑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주인공 '그대'에게는 기독교 신도들이 추종하는 그 성경과는 다른 그 개인만의 성경이 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싶지도 않고 남을 구원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만을 구원하고자 하는 지상 명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나 혼자만의 성경」의 성경이 되는 것이다. 일반 신도들에게 하나님이 따로 있지만 주인공 '그대'에게는 하나님과 신도가 동일체이다. '그대'가 하나님이자 '그대'가 또한 신도이다. 그러므로 그 한 사람만의 성경이다.
그렇다면 왜 「나의 성경」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잔인한 현실에서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현실에서 2인칭 '그대'와 과거에서의 3인칭 '그'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어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스스로를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객관화시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어떤 선입견이나 좋고 싫은 감정에 얽매어 진실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10)
「一個人的聖經」에는 남녀의 성행위 장면이 상당수 등장한다. 이처럼 주인공인 2인칭 '그대'와 3인칭 '그'는 무슨 이유로 여성과의 성행위에 이처럼 집착하고 탐닉하는 것일까?
작품 속에서 주인공 '그'와 '그대'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모두 9명으로 그중 4명과는 매우 진한 성행위를 즐겼고 2명은 자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잔혹하리만치 거리감을 유지하며 냉정하게 서술하는 작가의 객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마가리트가 13세에 강간을 당해 육신의 자유를 빼앗겼듯이, 2인칭 '그대'와 3인칭 '그'도 정치권력에 강간당해 정신적 자유를 뺏겼다. 정신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이어서 숙청되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면서 육체적인 속박까지 당하게 된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은밀한 공간에서 여성과 성행위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주인공에게 육체적 자유를 회복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육체적 교류는 곧 이어 정신적 교감으로 이어지며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고 잠재의식 속에서 불시에 나타나 남녀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몽 같은 과거를 냉정한 마음과 초연한 시각으로 하나 둘씩 직면하게 되는 그 자체가 바로 정신적 자유를 회복하는 하나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탐닉하는 성행위는 언뜻 봐서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살이 맞닿는 그 느낌 하나로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육체적 자아를 확인하고 이어서 정신적인 자유로 달려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11)
「一個人的聖經」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假面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一個人的聖經」은 현재 시점의 '그대'가 과거 시점의 '그'를 회고하면서 교대로 진행된다. 잔혹했던 과거를 냉혹하다 싶을 만큼 객관적으로 기술하면서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필조는 假面리아는 용어를 거론하면서 여러 차례 그 강도를 높이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작품의 제6장, 제7장, 제17장, 제26장, 제53장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假面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 도가 철학자 장자가 설파한 "하늘의 소인은 지상의 군자요, 지상의 군자는 하늘의 소인이다."12)라는 대목을 현대적으로 풀이한 듯 무릇 세상사에 부대껴 본 독자라면 그 울림이 매우 크다. 현실의 실패자든 인생의 성공자든 이와 같은 '가면현상'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13)
3. 결론
까오싱젠은 1979년 처녀작인 중편소설 「추운 밤의 별」을 출판했고, 이어서 모더니즘적 요소가 두드러진 희극 작품 「절대 신호」와 「정거장」「야인」등의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한다. 그러나 1986년 「피안」을 발표하면서 중국정부의 미움을 사고 작품은 공연 금지를 당하고 만다. 이후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접하며 중국의 현실에 철저하게 환멸을 느끼고 공산당을 탈당해버리자 중국 정부는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렸으며 그의 모든 작품을 중국 내 발행 금지 시켜 버렸다.
이처럼 그는 중국의 격동기를 몸소 겪으며 자신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더욱 그의 작품이 자신들의 치부를 들추는 것으로 보고 국내에서 철저히 금지시키고 국외적으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리라.
일찍이 솔제니친의 경우를 통해서 경험한 것처럼 한 작가가 망명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이 고국 소련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바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함으로써 명명생활의 의미화에 성공했다면, 까오싱젠은 자신을 민중화 투사로 규정하는 일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회색인적 고독을 택한다. 그는 중국적인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세우고자 하는 문화적 중국인이며 동시에 정치적 중국인이기를 거부하는 한 개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표류하는 삶은 불안감과 함께 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며 앞으로의 작품들 역시 독자인 한 사람으로서 충분한 기대감을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