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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강의 11차 (1998. 4. 7) 제목 : 내 마음 속의 삼한, 9가지 기운, 중심을 잡아야… |
1. 첫머리
오늘 드릴 첫 번째 얘기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가 모든 사물을 대하고 그 사물과 만나서 나누고 또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오고 있는 또 지켜가고 있는 원칙 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들어보신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 사는 방법에 선후가 늘 있다면, 늘 사는 것에서 우리는 먼저 가까운 데로부터를 먼저로 잡고 다음에 먼 것을 뒤로 잡습니다. 그리고 늘 우리는 새 것을 먼저로 하고 늘 낡은 것을 뒤로합니다. 선신후구 하고 선근후원 하는 원칙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또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염두에 두고 우리 역사 속에 있던 옛 이야기로부터 하나하나 얘기를 풀어보도록 하죠.
우리가 흔히 역사서에서 만나는 것인데, 삼한시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한시대라고도 하고 삼한이라고도 하는데, 삼한이라는 것이 무얼까 하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오늘 얘기를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삼한이라고 흔히 말할 때, 진한 마한 변한. 이 ‘진’자를 쓸 때는 어떨 때는 별 진(辰)자를 쓰고, 어떤 때는 참 진(眞)자를 쓰고, 어떤 때는 진나라 진(秦)을 쓰기도 하고 삼국사기의 극히 작은 얘기입니다. 그리고 마한의 경우도 말 마(馬), 어미 모(母)자를 쓸 때도 있고, 변한도 마찬가지로 발(發) 향(香)자를 쓰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진한이든, 마한이든, 변한이든, 진, 마, 변이 한자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소리를 어떻게든 음차로 풀어내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겠고, 그 뜻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오늘 얘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2. 출발점
전에 ‘아바치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진’이라는 것은 지도자를 말합니다. 진이라는 발음 자체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진한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도자의 나라겠지요. 한(韓)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라고 하면 보통 공동체, 공동체 그룹을 말합니다.
그에 비해서 마한이라고 하는 것은, ‘마’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전통 선가에서 꺼내먹고 있는 ‘다마검’이라는 것에서의 ‘다’는 ‘크다’의 뜻이고, ‘마’는 ‘참되다’의 뜻이고, ‘검’이라는 것은 ‘검다’ 이런 뜻이니까, ‘굵고 참된 검댕이’라는 얘기가 되죠. 요즘 쌀은 검지만 크진 않지요. ‘다검’인진 몰라도 ‘다마검’은 아니죠. ‘마’라는 것은 그런 ‘진정한’의 의미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이마나 일본’이라고 할 때의 ‘마’도 ‘참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라는 것이 ‘신의’ 또는 어의가 전성되어‘천황의’, ‘마’라는 것은 ‘참된, 뿌리의’, ‘나’가 ‘장소‘ 이런 의미입니다. ’마‘라는 것이 그렇게 발음에서 왔고…
‘변’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는 변이라고 읽지만, 원래 이 발음은 ‘반’, ‘번’입니다. 그래서 이 변한, 반한 또는 번한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 ‘반’이라는 것은, 우리가 반고라는 사람이 중국사에 등장할 때, 그 반고라는 사람이름의 원래 발음이 한자가 아니고 발음이었고, ‘반’이라는 것이 땅에 임하신 한님이라는 뜻이었고, ‘고’라는 것은 제사장의 의미, 그래서 땅에 임하신 한님을 제사하는 이가 바로 반고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 때의 ‘반’처럼, 반이라는 것은 ‘땅에 임하신 천신 또는 그런 천신의 대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삼한은 그 삼한시대에는 없었고 그 이전 시대인 고조선 시대 이전에 삼한이 있었는데, 그 삼한을 놓고 우리가 위서 시비가 붙어있는 “한단고기”라는 책에서 무엇이라고 되어있냐 하면, 진한에 관해서는 본기(本紀)라는 표현을 씁니다. 마한과 변한에 대해선 세가(世家)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한단고기 자체가 이러한 말에서 어떤 말뜻이 붙여진지도 모르고 썼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위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체계이기도 합니다.
본기라는 것은 중국역사에서 원래중심이 되고 있는 한 나라의 왕족 관계를 쓸 때 본기라고 합니다. 그 왕계에서 뻗어나간 방계를 쓸 때는 세가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진한이 본기가 되고, 즉 공동체의 지도자, 가장 큰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구성하는 작은 나라 가운데 지도자의 나라, 마한은 모계의 뿌리가 되는 나라,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모계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반한이라는 것은 그 이전, 하나의 새로운 지도자 공동체가 생기기 전의 공동체로부터 물려받았거나 변혁을 했거나 했겠죠. 근데 이 앞섰던 이 공동체가 남아있을 적에 그것을 반한이라고 합니다. 또는 번한.
예를 들어보자면, 고조선시대 때에 왕검이 단군이 되어서 하나의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큰 나라의 본기에 해당되는 공동체는, 바로 진한은 왕검의 공동체가 되겠지요. 그리고 마한은 왕검의 모계 공동체, 즉 웅씨의 공동체가 되겠지요. 그리고 반한, 번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오고 있는, 전설적인 시대에 따른다면 배달시대의 공동체가 되겠지요. 그리고 왕검 이후에 한참의 세월이 흘러서 이 왕검의 계보를 무너뜨리고 단군 시대에 한 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서 지도자의 공동체가 바뀌었습니다. 색블루가 등장하여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이 왕검의 공동체는 번한으로 되겠지요. 그리고 새로운 모계 공동체가 등장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거의 공동체가 하나도 빠짐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선근후원 선신후구에 대해 무엇을 연결시키느냐 하면, 이러한 나라들에도 먼저 앞서는 원 뿌리가 있고, 뿌리를 받침 해주는 실질적인 힘이 있고, 그것을 이어주는 과거와의 연관성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한 나라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갖고 우리가 이제 끌어와 보는 겁니다. 굳이 정치이념으로써 비유한다면, 진한이 ‘나(人)’라고 본다면, 어머니 공동체인 마한은 꼭 더 가까운 ‘지(地)’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개념들이 정치 속에 녹아있는 것이죠.
근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늘 자신의 나라가 있어야 됩니다. 자기 나라 속에 천년 왕국을 세우지 못한다면 밖에 천년 왕국이나 만년 왕국이 있어도 그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천년 왕국의 주인이 되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속에 천년 왕국을 세우지 않으면 그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연 내 속에는 이러한 세 개의 나라들; 진정한 나의 것, 나를 감싸주고 있는 어머니의 공동체가 되는 나라,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통을 담고 있는 나라. 이 세 나라가 함께 세워져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개념이라는 것이, 지난번에 수련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목표가 결국은 스스로 바나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바나리의 주인 되는 방법은 바로 자기 속에 그러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고, 그러한 나라를 세우되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운다는 것,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우되 그러면 내 속에는 과연 진한, 마한, 변한 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도 진한을 이룰만한 것이 있기에 진한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내 속에도 마한을 이룰만한 것이 있기에 마한을 이루는 것이고, 또한 변한을 이룰만한 것이 있기에 변한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러한 것을 여러 가지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지난번에 말씀드린 9개의 氣라고 말씀을 드렸고, 원래 우리가 마음의 한 기관으로서의 氣라고 말했을 적에, 그 기 자체는 실제로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원래부터 있었고 원래 소멸되지 않는 것이라 하지만, 형체를 지은 기관으로 전환했을 때에는 이미 드나듦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것이 있고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오는 기운(入)이 있을 거구요, 나가는 기운(出)이 있고, 그리고 단순히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무와 만나서 나무라는 것을 하나의 자신을 위한 변환기관이라고 생각하듯이, 내가 수많은 사물과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의 변환을 위한 기관으로 삼듯이, 이산화탄소가 나무를 통해 산소로 되듯이, 우리 동물에게선 그 반대의 과정이 이루어지듯이,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스스로를 움직이는 운(運)의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장 간단하죠. 들고나는 사이에 모든 것은 바뀝니다. 이 바뀌는 제 요소들이 모든 종(種)으로서 이 사회, 이 우주에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드나들고, 드나드는 가운데서 자기답게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시키는 모든 총체가 하나로 모일 적에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참으로 완전한 것이고… 그런 것이 되겠죠.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의 기관들은 각각 스스로 자기 존재로서 각각 종자로서, 서양사람들은 수지도를 그려서 생물의 계통도를 그린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나무 모양을 한 계통도가 아니라, 모든 것은 일렬로 평등하게 이 기관의 성격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보아왔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수직 계통도는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이죠…
이렇게 해놓았는데, 그럼 이 움직이는 각각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특징들은 어떤 것일까. 이 특징들을 놓고 사람의 경우에만 국한시켜 보겠습니다.
원기(元氣)라고 하는 것은, 먼저 이것을 운행시킬 수 있도록 태초부터 주어져 있는 기운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들어와서 그 존재를 존재답게 할 수 있는 특수한 성격을 갖는 심기(心氣)가 있고, 마음이라고 했을 적에 사람의 마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 다음에 이것이 각각 결합하는 과정 속에서 독특한 외형적인 형체의 특징과 관련된 것을 말기(末氣)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기는 모든 존재에 있어서 하나이면서 또한 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하는 것은 바로 이 원기에 해당되는 것을 말합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이고, 셋으로 실존하면서 구분되지 아니하는 그런 세 측면의 기운들이죠.
다음에 심기에 와서도 셋으로 쪼개지는데, 흔히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과 그리고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나뉩니다. 어우러져 있는 상태, 이것이 결국은 원기로부터 심기와 연결되는 하나의 길이 되겠지요. 떼어서는 이 천지인의 기운들이 각각의 이 안(安)이라는, 컴퓨터로 말하면 일종의 코드에 해당하는 기운일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 코드를 통과하면서 각각 어떤 것은 움직이고 어떤 것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또 모든 것이 움직이거나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아니하거나… 그러한 코드가 안기(安氣)입니다. 그에 따라서 각 코드는 나름대로 움직이게 되죠. 그것을 정기(靜氣), 또는 동기(動氣)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동양사상의 음양사상이 발전됩니다. 그러나 음양사상 이전에 그 어떤 객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여러분 몸에서 일정한 바로 진한 마한 변한을 세울 힘으로서, 자신의 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기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수축하는 기운(겁, 怯)이 있고, 또는 반대로 확대되는 기운(분, 憤)이 있고… 자꾸 한자로 표현하다보니 겁, 분 이런 말을 쓰는데, 원래 겁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겁먹었다’ 할 때의 겁이 아니고, ‘스스로가 수축되고 스스로의 기운이 상중하의 세 덩어리로 되어있는, 마리와 애와 밸로 되어있는 이 세 통로의 흐름들이 한 곳으로 집중해서 움츠리는 것’을 겁(怯)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憤)이라는 것은 이렇게 움츠렸던 것이 한껏 터져 나가는 것‘을 이릅니다. 근데 한자로서의 의미는 조금 달라져 있지요. ’겁먹었다, 분기 탱천하다‘ 등 모든 것이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확대 수축도 아닌 생(生). 이런 것이 확대 팽창만 해서 마침내 고갈되어서 사람과 모든 존재가 파괴되겠지요. 또 끊임없이 응축되기만 한다면 마침내 정지해서 파멸되겠지요. 그러지 않도록 조절해주는 힘을 생(生)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기가 넘친다‘하는 표현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가 팽창하고 축소하는 그 과정에서 팽창도 축소도 지나치지 않게 자기 나름의 고유한 틀 속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규정지어주는 그 힘을 ’生‘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9가지 가운데서 사람은 어쩌면 구체적으로는 이 말기를 갖고 스스로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말기(末氣)를 나로 여기고 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차적으로는 이 원기(元氣)를 주인으로 삼겠죠. 원기를 주인으로 삼아 살기 이전까지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것이(원기-천지인)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나’가 되고, 좁은 의미의 사람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좁은 의미의 나의 진한(말기-생분겁), 나의 지도자 공동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이 모든 것들, 이 생기로 말미암아 팽창하고 축소하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심기로부터 왔고, 이 심기(心氣)는 나에게서 원기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물질적, 또는 준물질적 조건이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심기야말로 어쩌면 어머니가 될지도 모르고, 마음속의 마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에 천지인이 합일되어 있는 그 기운이 우리들의 변한, 반한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를 여기로 놓고, 이것을 참 나로 여기고 살 때 한정된 얘기겠죠. 이 한정된 나가 아니라 더 나아가면 이것이 나가 될 것이고, 그 순간엔 이미 나는 변한이 곧 진한이 되고 진한이 곧 마한이 될 적에 시간 공간을 이미 넘어선 것이죠. 모든 조건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진정한 하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기, 심기, 원기 가운데서 말기를 나로 하는 나에서, 원기를 나로 하는 나로 가는 것이죠. 구체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소아에서 대아로 간다는 것이고.
그런데 바로 이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것이 나의 뿌리가 되고, 내가 진정 나아가야 할 목적지가 된다고 해서 바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구체적인 방법론과 결합되어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손발 없는 모습으로 공부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이러한 부작용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이런 지적이 있습니다. 불교 수련을 하면서 화두만 갖고 화두선을 하게 되면 수기가 내려가지 않고 화기가 치솟아 결국은 사람이 병드는 부작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단전주만 하게 되면, 사람이 단전에만 매달리게 되겠지요. 나름대로 폐기, 축기, 태식, 주천화후만 한다면, 결국 단전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이것은 결국 어미 아비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죠. 아무리 축기가 뛰어나고, 아무리 뛰어난 방법으로 폐기를 했고, 아무리 열심히 태식을 했다 할지라도, 주천화후의 양상이 하늘을 뚫고 땅을 찌를 손치더라도 이것은 작은 나입니다. 단전주의 위험성은 거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화두선의 위험성은 여기로만 무작정 달려가려고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손발을 잘라버리고… 달마께서 처음 중국에 왔을 적에 그 제자 혜가가 견디다 못해서 이 말기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팽창하고 끊임없이 수축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업들이 마음속에서 뛰어 놀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해 팔을 잘라버립니다. 팔을 끊어서 달마에게 바칩니다. 달마가 물론 혜가를 받아들이긴 했습니다. 그 뒤 이렇게 얘기합니다. ‘팔을 끊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좋은 일이 아닌 것은 팔을 끊어 바친 그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원칙만을 세우고 방법론을 결여하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혜가가 팔을 잘라 바쳐도 괜찮았던 것은 달마가 혜가의 팔다리가 되어서 그 방법론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방법이 없이 스스로 팔 끊고 다리 끊고 간다면 바로 그런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문제로만 살아가는 사람들.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어쩌면 많은 기여들을 해왔을 것입니다. 이들이 모두 내세웠던 것들은 ‘개벽’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는 모든 길들이 ‘개벽’의 상두소리가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개벽’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가는 이상 영원히 개벽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개벽을 얘기하면서 이것은 너무나 실사구시 적인 개벽에 매달려서 한쪽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공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벽에 매달려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수련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면서, 우주는 스스로 완성과정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고, 그 완성과정으로 나가는 것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완성과정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우주가 완성 된다’라는 얘기는 온 우주가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온 우주가 힘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도 모든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충분히 나눌 만큼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사회과학을 공부하신 분들도 있지만, 사회과학을 빗대어 볼까요.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에서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짓는다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한 시대 혹은 한 사회가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그 공식을 반대로 도입시켜도 이야기는 될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모든 사람들은 우주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사랑을 생산해 가는 생산자들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절대적 사랑을 생산하거나, 상호간의 만남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랑을 생산하거나 간에 모두가 사랑의 생산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생산력에 의해서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람의 만남 들이 결정되고 그 관계들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에 공동선을 추구한다고 하여서 생산관계 즉, 사랑을 생산하는 관계에 변화를 통해서 온 우주가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할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함으로써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함으로써 과연 사랑을 생산해내고 있는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모르면 그것은 사랑을 생산해내는 것인지 증오를 생산해내면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름하여 사랑이라고 했으나 실제 사랑이 아닌 것인지, 알 도리가 없죠. 스스로 나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어떤 구조를 가지고 우주의 완성으로 나가는 그 요소인 사랑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 그 점이 바로 구체적인 이런 모습들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나는, 수련을 시작할 때의 나는 분명히 말기에 가득 차있는, 어쩌면 말기에 가득 차있지도 못하는 병든 몸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팽창도 잘 안되고 수축도 잘 안 되는, 생기의 조절력이 미약하게 떨어져있는 나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하였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분기가 있고 겁기가 있고 그리고 생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생기와 분기와 겁기를 한 가닥 쥐어 잡고 가는 것이 현재의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수련은 어느 정도 마음에서 안정되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팽창과 수축을 먼저 어떤 방법으로 해볼 것인가. 어떤 이는 몸을 골라서, 어떤 이는 숨을 골라서, 또 어떤 이는 막연히 수축되고 팽창되는 그 느낌으로서 이루려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전구를 하나 갈아 끼우는데 사람이 몇 명 필요한가에 대한 농담이 실려 있었습니다. 학자는 한 명 필요하다는데, 일단 논문 세 편을 쓰고 나서 전구를 갈아 끼운다고 하더군요. 다음에 공무원은 12명 내지 13명이 필요하다고, 한 명이 갈아 끼우면 나머지는 서류절차를 밟아야 된다고 하구요. 클린턴 행정부는 4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한 명은 끼워지지 않았다고 그러고, 한 명은 깨진 것이 아니라 희미해졌다고 말하고, 한 명은 마치 꼭 반대인 것처럼 공작을 하고, 결국은 나머지 한 명이 갈아 끼운다고 그럽니다. 근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전구를 갈아 끼우는 방식이 다른지는 몰라도 결국은 갈아 끼우게 됩니다. 아마 시인이 있다면 세 명만 있으면 되겠네요. 한 사람은 어둠을 노래하고 또는 증오하고 한 사람은 촛불 켜고, 한 사람은 갈아 끼우겠죠.
모든 방식에서 그런 어리석은 방법들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방법들은 모두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분석해서 이것을 이론으로 만들려고 했고, 거기에서 사상과 문화가 나왔으며, 어떤 분들은 그것을 실제생활에 적용해서 점진적으로 활용하려고 해왔겠고. 의학, 보건학, 생물학 등이 거기에서 나왔죠. 어떤 이는 그것을 느낌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외쳐오기도 했습니다. 종교와 유사종교 등이 해당되겠죠.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가에 대한 확대, 팽창, 수축의 운동을 거듭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믿어와 마침내 무예나 운동 등을 고안해 내기도 한 것이죠. 그것들은 모두 옳은 길일 수도 있으면서, 아직까지는 그것들 나름대로 완전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였건, 이렇게 해서 갈 수밖에 없는 길들에 대해서, 우리가 오늘 잡고 가야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는 몸을 움직여 갈 것인가, 이론으로 갈 것인가, 느낌으로 갈 것인가. 느낌으로 갔던 분들은 과거에는 어떠하였으며, 이론으로 갔던 분들은 과거에 어떠했고 현재엔 어떠하며, 또한 운동과 무예로 가려했던 분들은 과거에 어땠고 현재엔 어떤가.
그 모든 것들을 한 용광로에 녹여서 내가 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런 행복감 이외에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얘기라도 같이 나누면서 팔다리 없이 가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생에서 얼마나 행복한 길을 이미 가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가게 되면 결국은 마음속에서 정(靜), 동(動), 안(安)으로 이어지겠죠. 몸에 있어서는 분(憤)과 겁(怯)으로 이어지겠지만 마음에서는 靜 動 安으로 이어지겠죠.
마음에는 여섯 가지 기관이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기관이 각각 천지인의 기운조화에 따라서 움직이고 고요하고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틀을 안(安)이 붙잡고 있겠죠. 한없이 고요하지 않도록, 또는 한없이 움직이지 않도록. 움직이는 가운데서 끊임없이 고요하게 하며, 정중동하며 동중정하는 그러한 기운이 안기(安氣)가 되는 것이죠. 이래서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것을 일러서 정중동하고 동중정하는 공부를 일러서 과거 어른들은 안공(安功)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총괄해서 신공(神功)이라고도 불러왔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높은 무예를 안공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마침내 여기에 이른다, 못 이른다 하는 것인데, 과연 방법론은 무엇인가 하는 것,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리고 그것으로써 결론을 삼은 바 있습니다만, 끊임없이 흐름을 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의 中으로 하여금, 우리가 숨으로 비유한다면 나의 한가운데 나의 중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 숨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숨을 절대 밀어 넣거나 끄집어내지 말고, 호(呼)와 흡(吸)을 하지 말고, 스스로 숨을 밀어 넣거나 끄집어내지 말고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숨을 쉬게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숨쉬는 것을 모든 것으로 넓힌다면 中으로 하여금 스스로 살게 하라는 얘기입니다. 근데 스스로 살게 하라고 하다 보니 여기서 수많은 주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냥 맡겨놓지 뭐’, 목적의식 없이. 어떤 경우에는 ‘아냐, 목적의식을 갖고 뭔가 방법을 밟아야지’ 등의 견해차는 우리 역사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깊게 갈래지어져 왔습니다.
이 흐름에 부딪쳐 생겼던 것이 앞에 말씀드린 단군 시대의 쿠데타입니다. 단군 시대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면, 하나는 철저한 제사장적 전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방식에서 본다면 철저히 中으로 하여금 스스로 한님과 만나게 하고, 한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중을 찾으시고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숨쉬게 하고,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살게 하라는 입장이 바로 과거의 수련으로서의 ‘샹’입니다. 우리가 살필 성(省)이니 받들 상(尙)이니 윗 상(上)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의 발음이 원래 이 ‘샹’에서 왔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한님을 제사지내는 행위, 뒤집어 말하면 이 행위는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살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 소리가 발음으로는 ‘샹’이었고, 그것이 분화되면서 나와 신의 만남, 신적 존재로서 나와 너의 만남, 신적 교류로서의 만남, 나와 진정한 내 마음속에 있는 한님과의 대화, 그것이 살피다(省)의 뜻입니다. 내가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런 행위를 할 때 도구로써의 ‘향(香)’, 화신이 오셔서 임하면서 흠향 하시고, 교향곡 할 때의 향도… 이 모든 발음은 여기서 온 것입니다.
애초에 글자들이 왜 상형되었는가 하기 이전에 이 소리들이 모두 여기서 왔는데요, 이러한 흐름들이 고조선 시대의 전기까지, 이른바 서기전 13세기까지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도 이러한 중이 있고, 너 속에도 중이 있어서 서로의 중과 중으로서 만난다는 사회적 발상은 이 시대에 오면 어느 정도 변화되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 속에 이러이러한 것이 있고 너 속에 저러저러한 것이 있으니, 그런 것이 바로 너와 나의 믿음이고 너와 나의 법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점차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이것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됩니다. 끄집어내서 약속으로서 구전에 돌리고 그래서 불문법이 되죠. 그것을 글로 만들면 성문법이 되는 것이죠. 성문화되면 될수록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흐름에 제동이 걸리고 지식인적인 전통이 생겨납니다. 뭔가 더 목적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해나가야 되겠다는 것. 그래서 두 번째로 제사장적인 흐름에 반대해서 지식인적인 흐름이 등장했고, 이들에 의해서 보다 빠르게 보다 무리해서 현실적 실력을 갖춘 세력들이 이 사회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사회의 진한이 되어버립니다. 이들은 번한이 되어서 그나마 이 흐름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죠. 삼국시대가 되면 이 흐름이 거의 공존하지 못하게 되고, 그냥 뭔가 지식인적인 전통에 의존하려고 하는 흐름만 남게 되죠. 이 흐름은 사라지고 묻혀서 밀려나게 되죠.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 사이에 ‘마’라는 원수가 들어있어요.
진정으로 원시반본 될 것이 있다면 이것이 하나로 원시반본 되어야 할 것이고, 진정으로 회원상생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것 둘이 회원상생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지식인적 전통과 내 속에 있는 스스로 숨쉬게 하는 전통이 먼저 회원상생 해야 합니다. 내 속에서 태초부터 이것이 하나였던 시절로 원시반본 해야만 됩니다. 이것이 하나였던 원래의 시절을 돌이켜본다면 그것을 회강반자(?)라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깨친다, 본다(觀)는 것은 이러한 회강반자의 상황을, 스스로 이러한 눈을 통해서 보았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눈으로만 보아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잘못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실질적으로, 내가 본 것이 본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인데,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이 여기에 오면 이 전통이 깨어져 있어요. 주체 없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그것과 만나고 법과 대화하고 그것으로부터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찾아와서 보았는데 과연 내가 만난 것인지 남이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것은 갈 수 있을지 없을 지에 대한 분석만을 요구합니다. 이 두 가지 흐름 속에서 사람은 여하튼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숨쉬게 하고 스스로 살게 해야만 하는데… 그 방법으로 나온 것이 흐름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현관타좌비결 16식이라는 옛 수련 요결이 있습니다. 16가지의 조목으로 되어있는데, 그 16식 가운데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떨림을 바로 잡으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몸을 한번 흔들어 본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상하좌우로. 여기에는 그러한 몸 운동에 대해서 나름대로 익숙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예로 어떤 경우는 직업상, 어떤 경우는 춤을 추시면서 이런 경우에 익숙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좌우로 움직일 적에 또는 아래위로 움직일 적에, 조금 전에 움직인 그 상황의 중십점과 지금의 중심점이 과연 같을까. 기계도 같을 수가 없어요. 용수철을 갖고도 이쪽으로 움직였다가 퉁 놓으면 드르륵 하면서 중심점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전혀 변하지 않는 한 중심점이 있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중심점이 변합니다.
흐름을 찾으라는 것은 그 중심점을 찾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호흡하시면서 이 개념들을 염두에 두면 수월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아래위로 움직였을 적에 앞에 눈감고 작은 것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게 맞추어 떨어뜨릴 수 있는 그런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래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중심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심점을 찾는 것, 아래위든 전후든 좌우든 중심점을 찾는 것, 그것이 흐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호흡을 하시다보면 어떤 경우에 떨림이 옵니다. 떨림이 온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생기가 발동했다는 얘기이고, 어떤 경우에는 안기(安氣)가 발동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움직임의 결과는 끊임없이 떨림으로 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조용할 때 떨림이 올 수도 있고, 가장 심하게 움직이고 났을 때 떨림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떨림은 왜 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떨림이 올 때, 그 떨림 가운데서 한 중심점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수전증 걸린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빙이 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이러한 전통에 있던 사람들, 스스로가 되어서 먼저 가까이 있는 또는 좀 멀리 있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가 목적의식적으로, 이 목적이 없는 가운데 목적의식적으로 스스로 부려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에 와서 모든 지신이 되고 모든 천신이 되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하나의 부림의 대상이 되었던 겁니다. 즉, 모든 통제는 그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통제한다는 의식도 없이 통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그 점을 찾았기 때문에, 그 점을 찾지 못하면 마침내 이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자연적으로 제대로 살면서 이룰 수 있는 바에서는 모든 것이 실천대상입니다.
불교 사찰에 가서 만날 수 있는 72신중이 모두 원시불교, 근본 불교시대 때는 실천의 72가지 실천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신이라는 말을 똑같이 쓰더라도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죠. 내가 끌려 다니면 우상이고, 내가 끌고 다니면 우상이 아니죠. 여러 보살이 많지만 모두들 실천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실천하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론이고 대상인 것이 자기의 중심점을 잃어버리자 마침내는 신적인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12가지 동작과 10가지 자세가, 10간 12지가, 마침내는 12신장과 10신장으로 바뀌어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신장이기 이전에 그것은 내가 중심을 잡고 살아갈 적에는 나의 수족이요, 나의 부모요, 때론 나의 형제, 나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 모든 흐름을 잡아라’ 하는 것을 제가 두 번이나 연거푸 말씀드리는 이유가 그러면서 중점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 중점을 놓치면 공부하다가 중점을 놓치면 결국은 언젠가는 내가 나인지, 내가 아닌지, 내가 과연 나의 주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도 어렵지요. 이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나 권력이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는데 또 다른 의미에서까지 내가 주인인지를 안다는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지도 모르죠.
현대인이 그런 면에서는 참 아름다워요. 낭창낭창한 것이 한 사흘 정도 굶은 사람들 같아요. 자기 중심이 없을 때 그러죠. 이러한 것이 생기에서 중심이 얻어지면, 여러 날을 잠자지 못하고 일어난 사람이 아침에 휘청휘청 하듯, 그렇게 휘청거릴 것이고. 생기의 부분에서 그것이 없다면 여러 끼를 굶은 사람이 허우적대며 한없이 한 방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렇게 될 것이지만. 분명히 안기의 부분에서 중심이 안 잡히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사물이 둘 셋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오히려 둘 셋으로라도 있는 것만 보이면 상관이 없지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눈에 보이더라도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안보이고, 없는 것도 보이는 그런 상황에 닿을 수가 있죠. 그래서 수련을 하면 할수록 또는 수련과 비슷한 삶을 살면 살수록 중점을 못 잡을 때의 위험성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숱한 괴상한 재주를 뽐내는 분들이 그런 중점을 잡지 않았으나 상당한 경지에 오른 분들일 수도 있습니다. 중점을 잡고 하루를 사는 것이 굳이 비유한다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중점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지금 용호비결을 핑계대서 얘기를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람의 몸 구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든 기운들은, 일차적으로 나의 모든 기운들은 중단전 덩어리, 즉 우리가 가부(가슴)라고 말하는 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이 일차로 모여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아래와 위로 통교되겠죠. 상하가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교통로가 되는 것이고, 이 교통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이 상하가 중요한 관련성을 가집니다.
떨린다고 했을 적에 중점을 찾는다고 하면, 그 중점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단전에서 중점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몸은 전체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거나 심한 운동을 하고 있으면 떨려옵니다. 특히 용을 쓰는 가운데 정적인 상태에 있으면 몸은 엄청나게 떨려옵니다. 여러분들 턱걸이나 매달리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 있으면 부들부들 떨려올 뿐만 아니라 한참 있으면 배까지 떨려옵니다. 단순히 신경에 의한 그것만은 아닙니다.
근데 그 중심을 찾는 것은 하단도 아니고 중단도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심은 여기서(구궁) 찾는 것입니다. 즉, 구궁으로 말씀드리면, 그 아홉 번째 궁(이궁)에서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여기에 달려 있어요. 이 중단전 통로가 원체 힘이 미약해서, 이 중단전 덩어리가 상과 하를 이어주는 통로이면서 상의 기운을 보관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시켜주는 전환 장치이기도 하죠. 즉 송전소이면서 변환소이기도 한 것이죠. 여기에 있던 힘을 상단전이 쓸 수 있도록 또는 팔다리가 쓸 수 있도록 전환시켜주는 기능을 하죠. 그래서 중요한 것이 이 중간에 5장6부가 있죠. 여기(하단부위)엔 외형적으로 대장, 소장, 췌장, 비장 등이 있지만 중요한 간장, 심장, 페, 신장, 심포 등은 중단전에 있죠. 그 기능들은 전부 이것을 어떤 전환 장치로 전환하는 가운데 상하를 연결시켜주는 통로로 잘 원활하게 돌아가게 해줄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것이 신통하게 변환작용을 못하게 되면 이것이 그만큼 안 될 것이고… 상호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움직이고자 하는 기운은 이만큼 인데 실어 나르는 통로가 요만큼 밖에 안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죠. 그러면 사람이 나름대로 병을 앓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밑에서부터 15°각도로 이상하게 찔러와요. 답답하게. 어떤 경우에 들여다보면 옷이 실제로 눌려있기도 하죠. ‘뭐가 날 누르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눌려 땅겨옵니다. 눌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땅겨오는 거예요. 땅긴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 눌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답답하게 느껴지죠. 답답함이 느껴지면 여기서 그만큼 올라가서 전환되지 못하고 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답답한 분들이 다 호소하는 것이 태양혈에서 이 정수리까지 연결되는 뿌듯한 답답한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늘 태양혈을 뭐가 지끈지끈 누르는 것 같다, 손으로 조금 문지르면 조금 나은 것 같다는 통증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쳐지지 않고 심화되면 실제로 외적 존재에 의해서 자기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 통로에 비해 드나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약간 적을까 말까해야 합니다. 64비트의 정보를 실어 나를 정도가 되려면 124비트를 처리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근데, 8비트나 16비트의 통로에 64비트를 실어 나르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 그것을 실어 나르려면 원래 있던 모양을 변형시키게 되죠. 이것이 생기는 과정에서 외적인 힘이 작용하게 되죠.
그래서 여기에서 중심을 꽉 틀어잡고 있으면, 이것이 통로이고 나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결정되게 되는데, 그 통로까지 결정되는데 그 통로의 끝머리, 연을 다섯 개 날린다고 하였을 때 각 연줄 끝은 한사람이 쥐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수레에 말을 여러 마리 달고 가더라도 말의 고삐는 한사람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군데로 잡혀있는 집합처가 바로 여기(아홉 번째 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스릴 줄 알면 영육 분리가 가능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굴릴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최대 불가사의인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불가사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모든 분들이 추구해온 하나의 이상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일정한 단계에서 일정한 수준까지는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밑에 있는 수많은 아홉 개의 틀들을 이 中을 매개로 하여 오궁을, 가장 깊은 원단전을 중심으로 해서 남은 여덟 개를 모두 틀어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단련도 안 시키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여기서 숱한 병이 다 들어 있잖아요, 이 전환을 제대로 못 시켰잖아요, 불완전연소 된 기름이 엔진에 들어가면 그 자동차는 수명이 짧겠지요. 불순한 기름이 많이 들어가면 갈수록 수명이 짧아지겠지요. 그처럼 이렇게 처리가 안 된 것이 자꾸 들어가면 망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들 중에서 쓰레기만 남고 나머지를 끌어올려서 쓰게 되면 나중에 여기엔 쓰레기만 가득 차게 됩니다. 나중엔 ‘내가 단전이라는 것이 있긴 한가’, 심지어는 정신적으로 변화가 생겨 ‘나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마음이란 게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게 됩니다. 마음의 기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식과 업과 기와 영, 신, 명의 6대 기관으로 마음이 구성되어 있다고 일러주고 하나하나 찔러주어도 느끼질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냥 순수한 사회적인 도구, 식생활과 주거생활과 의료시설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해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자연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렇게 해서 자기생명의 1/3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 망가뜨려 놓고서 한다는 소리가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합니다. 죽은 시체와 해골이 춤추면서 그런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있고 조응하고 있는 모든 관계들에서 불완전연소 시킬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연소시킬 수 있는 장치는 점차 죽어가고 있는데, 반비례해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궁수련에 대해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인간의 등과 잣대를, 앞가슴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뼈를 잣대라고 하고 뒤를 등이라고 합니다. 등뼈라고 하면 안 됩니다. 등뼈라고 하면 그야말로 뼈만 얘기하는 것이고, 등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이 되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모든 장기들과 모든 중요한 하단전의 궁들, 그것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잡고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 기능들은 어떠한가. 각 기능들에 대해서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느끼고 실험해봄으로써, ‘아! 이런 게 내 몸에도 내가 20년 이상 또는 50년 가까이 살면서 잊어버리고 사는 이런 기능들도 있구나!’ 하는 것을 조금씩 느껴보는 것으로 다음 시간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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