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은 진주삼대첩의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의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어주었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십구사략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노력을 하며
책읽기에 힘썼다. 김득신이 살던 옛집을 취묵당(醉墨堂)이라 한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김득신이 시문을 짓고 읊던 곳으로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 되었다. 취묵당은 술에 취하여도 입을 다무는 집이라는 뜻이다.
취묵당에 걸려 있는 ‘독수기’에 보면 김득신이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적혀 있다.
"<백이전>은 1억1만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분왕><벽력금><주책>
<능허대기><의금장><보망장><용설> 등은 2만 번, <제약어문>은
1만 4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특히 〈백이전〉을 억만 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라 이름 하였다.
김득신이 혼례를 치르던 날이다. 사위 될 사람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첫날밤을 책 읽느라 시간을 보낼까봐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다. 경대 밑에서 발견한 것은 책력이었다. 그것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뒤에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고 한다.
김득신은 딸을 먼저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한다.
김득신은 40여 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 이르기를,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시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원체 천품이 노둔하였다.
어느 날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 읽는 소리를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하인이 올려보며, "아니 저 글은 나으리가 평생 맨 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1억1만3천 번 읽었던 <백이전>인 것을 알았다.
그가 한식날 하인과 길을 가다가 5언시 한 구절,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을 읊었다. 그가 한참 동안이나 대꾸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하인 녀석이 대뜸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라 대꾸하였다.
깜짝 놀란 김득신이 말에서 내리더니, "네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하였다. 하인이 씩 웃으며 "나으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가 아닙니까?" 하였다. 김득신 왈, "아 참 그렇지!"
김득신은 환갑이 넘은 나이인 현종 3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안풍군에 봉해졌다. 실제 그는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당시 한문 사대가의 일인인 택당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 제일”
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니 효종이
그의 '용호한강시'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백곡집 외에
시화집인 '종남총지'가 있으며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과 〈청풍선생전〉을 남겼다.
문집인 〈백곡집〉에 시 416수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