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여름인데다 회사규모나 실적면에서 휴가라는 말이 내겐 당치도 않지만 그래도 휴가 없이 8월을 넘기기가 섭섭하여 오래 전부터 별러온 '타만 네가라(Taman Negara)'를 다녀오기로 했다.
말레이어의 '타만 네가라'를 영어로 표기하면 '국립공원(National Park)'이라는 보통명사이지만 말레이 반도의 중부 산악 지역을 일컫는 고유명사의 구실도 함께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10여 개의 국립 공원 중 가장 대표적인 국립공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타만 네가라'에 대한 상세한 지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배낭여행자를 위한 책자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제란툿(Jerantut)'에서 '콸라 템블링(Kuala Tembling)'까지 가서 배를 타고 공원입구인 '콸라 타한(Kuala Tahan)'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정보의 고작이다. (참조 : 말레이시아 지명 중에 유난히 'Kuala'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 뜻은 강의 하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콸라 룸푸르'의 뜻은 '진흙의 하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여행 팜플렛의 지도와 기본적인 방향감각만을 믿고 집을 출발했다. 하긴 등산할 것도 아니고 야영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다행히 지난 8월부터 '콸라룸푸르'에서 '콴탄(Kuantan)'에 이르는 도로가 완전 개통되어 3년 전 동해안으로 가던 편도 1차선 국도가 이제는 2차선 고속도로로 시원히 뚫려있어 2시간도 채 안되어 '제란툿(Jerantut)'으로 가는 분기점인 '터말로(Temaloh)'를 통과했다.
'싱가폴'로 이어지는 남북고속도로 변이 완전히 '팜 트리(Palm Tree)' 일색인 반면 동해안 고속도로 특히 '제란툿'까지의 50여 킬로의 국도변은 '러버 트리(Rubber Tree:고무나무)' 일색이다.
'타만 네가라'로 가는 길목의 '제란툿(Jerantut)'은 인구 2-3만의 작은 마을로서 마치 진부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설악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원통'과 같은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제란툿'에서 '콸라 템블링'으로 가는 표지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몇 차례 시내를 돈 다음 결국 노점상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계 피가 섞인 노점상은 친구에게 가게를 맡기고는 직접 자기 오토바이로 '콸라 템블링'으로 가는 길목까지 5분이 넘는 거리를 안내해 주었다. 순간 대가를 바란 행위인지 순수한 호의인지를 몰라 주춤거리다 약간의 수고비를 건넸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제란툿'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콸라 템블링'은 65 킬로 떨어진 '타만 네가라'로 가는 선착장이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선착장 밑으로는 황톳빛 강물이 흘러가고 강을 따라 깊이도 넓이도 모를 열대의 정글이 펼쳐있다.
보트를 기다리는 사람의 상당수는 유럽계 백인들로 '타만 네가라'가 유난히 백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얘기가 실감난다.
배꼽바지에 배낭을 둘러멘 금발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잠시 지나번린 세월에 대한 아쉬운 한숨을 지어본다.
보트를 예약하기 위해 물어보니 의외의 정보가 나온다. '타만 네가라'의 입구인 '콸라 타한(Kuala Tahan)'까지는 강을 따라 보트를 이용하거나 4륜 구동의 '찝'차로만 갈 수 있다는 정보와는 달리 승용차로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선착장 입구에서도 자세한 지도는 구할 수 없고 관광안내 책자의 작은 지도에는 육로로 이어지는 도로표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친구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짚어 공원입구인 '콸라 타한'으로 가는 육로를 찾기로 했다. 30여분 지나자 의외로 '타만 네가라' 표지판이 쉽게 나타났고 도로는 아스팔트가 깨끗이 깔려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울퉁불퉁한 험한 산길이 나오려니 했지만 60킬로에 달하는 육로는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무너지긴 했지만 완전히 포장되어 있는 그야말로 비단길이었다.
'타만네가라' 여행의 압권이라고 하는 '콸라 템블링'에서 '콸라 타한'에 이르는 3시간에 가까운 보트여행은 못했지만 대신 보트비를 절감하고 시간도 1시간 반 정도는 단축했으니 그것으로 걸 위안을 삼는 수밖에는 없다.
집에서 출발하여 정확히 4시간만에 도착한 국립공원의 출발지 '콸라타한'은 아직도 호랑이가 300여 마리가 살아있다는 말레이 반도의 산악지대에서 흘러나오는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강이라고 해야 폭이 고작 30여 미터에 불과하고 수심 1 센치도 안 보이는 진한 황톳물이긴 하지만 강물의 흐름이 매우 빠르고 수량이 풍부하여 장마철의 우리나라 실개천을 보는 듯하다.
강변에 떠있는 수상레스토랑에서 때늦은 점심을 때우며, 주위를 돌아보니 관광객의 절반이 유럽계 백인들이고 한 낮의 강변은 강을 따라 분주히 오르내리는 모터보트의 소음 외에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육로로 택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보트를 빌려 타고 황톳물이 흐르는 강을 따라 물살을 역류하여 '라따 베르꼬(Lata Berkoh:Lata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좁고 긴 보트 양편으로 30-40미터는 넘을 듯한 나무들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가려주고 얕은 여울에서는 물결이 제법 높아 아들 녀석들은 보물을 찾아 나선 영화의 주인공처럼 신이 났다.
8킬로가 넘는 강의 상류를 올라가면서 강은 다시 황톳빛 강과 완전갈색의 두 개의 지류로 갈라지면서 강물의 흐름은 더욱 빨라지고 물길을 안내하는 앞자리 뱃 사공의 눈동자는 점점 분주해 진다.
'라따 베르꼬'로 가기 위해서는 '모터 보트'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서 내려 다시 육로로 걸어가야 한단다. 아무도 없는 정글을 따라 20여분 땀을 흘리고 나자 이윽고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들려왔다.
사진으로 익히 보아 오던 '라따 베르꼬'는 내 설악의 '백담 계곡'이나 지리산 '백무동 계곡'의 그 맑은 물 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탁한 갈색이지만 땀을 흘린 후에 피워 무는 담배 맛은 어디나 꼭 같다.
투명한 담배연기가 1억 3천만년 전에 생성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타만 네가라'의 정글 숲으로 흩어진다.
1억 3천만년 !
'타만 네가라'를 소개하는 문구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1억 3천만 년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글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조상인 직립원인이 활동했던 시기가 수 만년 전,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불과 5-6만년 전이고 공룡이 뛰놀던 시기도 몇 백 만년 전이라는데 1억 3천만년전 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세월인가 ?
돈이 1억 3천만 원이라면 금방 감이 오는데 1억 3천만 년이라는 세월은 도무지 가늠조차 힘들다.
"그럼 내가 앉아 있는 이 바위가 1억 3천년 전부터 있었단 말인가 " "설마....그렇지야 않겠지....." "아니야 혹시 모르지..정말 1억 3천년 된 바위인지도..."
깊이도 모르는 탁한 갈색의 빠른 계곡 물에 선뜻 들어가기가 두려웠지만 1억 3천년이라는 세월의 두께에 접근하기 위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계곡에 몸을 던지는 일 뿐이었다.
1억 3천년 된 정글의 계곡도 여느 계곡처럼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산에서 자는 맛은 역시 꿀맛이다. 잠을 잤다기보다는 잠시 혼절했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듯 싶다.
국립공원 초입에 있는 '콸라 타한'은 강을 중심으로 공원사무실과 '무티아라 타만 네가라 리조트(Mutiara Taman Negara Resort)'가 있는 지역과 실제 주민들이 살고있는 '깜풍 콸라타한 (Kampung Kuala Tahan : Kampung은 시골마을을 일컫는 말레이 말)의 두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나루터를 건너 국립공원 사무실에 입장료를 내고 숲 속을 걸어 올라간다. 아침의 숲은 어디서나 신비롭다. 게다가 구름 낀 날씨 탓인지 숲 속은 마치 나무와 풀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하긴 식물도 생명체는 분명하니 아침이면 뭔가 다른 기분을 느끼겠지.
인적 드문 아침 숲 속 길에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역시 서양관광객이다. 백발의 노 부부, 이제 갓 청소년 티를 벗어 난 금발의 젊은 여행객들까지 '굿 모닝', '헬로우'라고 빠짐없이 인사를 건네 온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의 인사는 여전히 내게는 자연스럽지 않다.
'타만 네가라'의 대표적 관광꺼리인 '캐노피 워크(Canopy Walk)'는 공원사무실에서 숲속으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30미터가 넘게 수직으로 뻗은 열대우림의 나무와 나무사이를 줄로 묶어 400미터 정도의 다리를 만들어 놓은 천연과 인공의 합작품으로 마치 군대 유격훈련때 타봤던 세 줄타기 코스를 연상시킨다.
정글 숲길을 따라가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물어보니 해발 2,187미터의 말레이 반도의 최고봉 '구눙타한(Gunung Tahan:Gunung 이라는 말은 Mountain이라는 말레이어)' 까지는 왕복 1주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신기할 정도로 '구눙 타한'은 말레이 반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2차대전후 중국의 공산화와 함께 동남아에 번지던 이른바 도미노 현상이 한참일 때 말레이 반도 역시 '마오이즘(Maoism)'을 추종하는 중국계 공산게릴라들의 활약이 대단하였다. 1960년 중반에 가서야 이들의 게릴라 활동을 진압했는데 그들의 주요 근거지가 바로 이 정글 지역이었다.
"정상까지는 몇 번 가봤냐 ?" "한 30번쯤 된다" "와 ! 정말 많이 가봤구나...혹시 호랑이 만나본 적 있냐 ?" "호랑이는 못 봤고 곰을 만나 산 위로 도망쳤다" "수입은 좋으냐 ?" "지난번에도 영국 군인들이 단체로 등정을 했는데 한번 안내하는데 500 링깃 이다"
숲 근처에만 거닐고 돌아가기가 싱거워 '부킷 트라섹(Bukit Terasek)'이라고 하는 작은 봉우리까지만 갔다오기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10여분도 안되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도 한때는 설악산이다 오대산이다 해서 한 겨울이고 한여름이고 1년에도 몇 차례씩 오르내리곤 했는데 이 까짓 산책코스에 다리가 후들거리다니....
중간에 잠시 숨을 돌리느라 쉬는 사이 아내는 '올라갔다가 이쪽으로 다시 내려 올 거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니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 것 당신 혼자 갔다 오라구'하며 금새 자세를 바꾸었다. 게다가 큰놈 역시 처음에는 앞장서서 까불거리다 이내 엄마와 한편이 되어 일어날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놈과 30여분 거리에 있는 봉우리를 향해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가 가까워 오는지 하늘이 훤해진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작은놈은 신통하게도 힘들다는 불평 없이 잘도 따라온다.
이제 등산 할 기회도 없어 더 이상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고민은 않게 되었지만 대신 요즘 들어 새로운 질문이 하나 대체 되어버렸다.
"왜 사십니까 ?"
산 중턱의 바위에 걸터앉아 싯누런 강줄기와 '구눙 타한'으로 연결되는 산줄기를 바라본다.
누군가 그랬다지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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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표현이 예술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