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카, 섭지코지’가 이번 제주 여행의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 남겨둔 나만의 보석이다. 렌트카 여행이 일반화된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만의 여행 로망이었다.
아뿔싸! 운전면허증을 챙겨가지 않았다. *숙 씨 명의로 빌린 다음 내가 운전을 했다.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다. 약간 긴장이 된다. 흰색 쏘나타다. 중형차라 그런지 처음엔 약간 무거웠으나 달릴수록 기분이 좋다.
가는 길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개인 소유 유채꽃밭을 만났다. 1인당 1,000원이란다. 기꺼이 지불하리라. 노란 유채꽃밭에서 온갖 유치한 포즈를 취하며 찍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나도 저리 해보리라, 하였다. 돈을 내고 꽃밭에 들어갈 수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숙 씨와 나는 속없이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뒤로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드라마 ‘올인’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섭지코지, ‘올인’을 안 봐서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풍광이 그만이라는 말을 익히 들었다. 과연 그랬다. 푸른 바닷바람이 지나는 언덕 위 초록들판에서 맺어진 인연이라면 어느 인연인들 눈부시지 않을까. 인연의 끈을 놓쳤다 해도 잡았던 손 오랫동안 따뜻하고, 따뜻했던 만큼 오랫동안 마음의 골방에 서늘한 슬픔이 고여 있겠지.
제주 특유의 붉은색이 감도는 흙과 구멍 숭숭 뚫린 검은색 현무암과 초록 풀밭의 색감은 착한 사람의 심성을 닮은 것 같다.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튀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끌고, 서로 다르면서도 조화롭다. 천천히 이리저리 시선 두며 등대까지 걸었다. 다시 내려와 풀밭 둔덕을 지나 안도 타다오 작품인 고품격 명상센터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를 찾았다. 모두들 올인 촬영장소에서만 복작거리고 이곳은 한산하다. 아마 우리처럼 미리 알고 온 사람들과 새로 조성된 최고급 휴양단지 휘닉스 아일랜드에서 묵은 사람들 중 건축에 관심 있는 일부분만 이곳을 찾아 왔으리라.
입장료 2,000원을 내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돌의 정원엔 제주 돌들이 가득 찼다. 검은돌들 사이에 분홍색 아프리카채송화 꽃밭이 있다. 돌과 꽃의 조화는 생경한 것들의 조합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바람의 정원엔 제주산 억새들이 군무를 춘다. 바람결이 느껴진다. 마침내 물의 정원이다. 벽면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눈으로 듣는다.
완벽하게 바깥 세상과 차단된 듯 고요하다. 외부에서 보면 단순한 돌담이었는데 그 안에는 제주 자연을 이루는 세 개의 요소인 돌, 바람, 물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랜 세월 깎이고 다듬어지는 인내를 생각하게 하는 돌, 걸림 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순도와 입맞춤하는 바람,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에 닿아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상을 인정하게 되는 물의 정원을 거치면 사각 프레임 속에 성산일출붕이 담긴다. 각진 돌담길은 깊고 융숭하다. 중세 시대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이렇겠지, 싶다.
명상 센터에서 잠시 명상 자세를 취하고 싶었는데 아직 새 건물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냄새에 예민한 나로서는 좀 고통스러워 포기했다. 그러나 문경원 작가의 미디어 아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지니어 로사이는 다시 올 수도 있지만 작품은 그렇지가 않다. 세 개의 작품 중 ‘다이어리’는 나무의 사계를 담았다. 잠깐 사이에 계절 따라 나도 분홍색 꽃으로 피었다가 초록색 잎사귀로 바람에 나부끼다가 낙엽으로 떨어져 대지를 덮고 하얀 눈을 맞으며 겨울을 견뎠다. 그 시간이 참 아득하고 길었다. 저물녘 감청색 하늘을 닮았다. '어제의 하늘'은 어제 섭지코지의 하늘을 바닥에 펼쳐놓고 보여준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은 무생물이 아니었다.
명상 센터 맞은 편 건축물은 식당과 갤러리다. 식당 ‘민트’는 이층에 자리 잡았다. 한눈에 바다가 들어온다. 아직 새 건축물 냄새가 덜 빠졌다. 우리는 냄새를 핑계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늦은 점심은 섭지코지 초입 옥색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서 보리빵으로 대신했다. 등 뒤로 휘닉스 휴양단지가 근사하게 서 있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운전했건만 좁은 제주 동네 올레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아 겨우 섭지코지 입구 동네를 빠져나와 김영갑 갤러리로 가는 길을 찾았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이르렀을 땐 한낮 햇빛이 뜨겁게 내리쬔다. 간간이 올레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늘 없는 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싶다.
제주의 풍경에 반해 카메라에 제주를 담는 일에 한 생애를 다 바치고 마침내 작은 폐교 하나 얻어 작품을 전시하는 일을 시작하고 루게릭병에 걸려서 생을 마감한 한 사내의 몸과 마음이 오롯이 담긴 갤러리다. 숙연해진다. 이런 생애 앞에 서면 너덜너덜한 일상이 더 작아지지만 그래도 내가 보듬고 다듬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갈무리해야할 의무가 생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욕망을 완성하는 것에 불과했다 해도 한눈 팔지 않고 집중하여 전력투구한 삶은 귀하다. 그런 삶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는 모니터 화면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심지에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전시 공간을 찾는 것은 아니더라. 결국 볼 사람이 온다. 그래서 나는 이 작은 시골까지 찾아온 사람들의 진정을 만난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 전시공간에 거미줄 늘어지지 않도록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김영갑은 특히 제주 중산간 지역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사진 속 중산간 지역은 평화로운 고요와 폭풍우 몰아치는 혼돈이 나란하다. 억년의 세월을 거치며 고요와 혼돈의 반복 속에서 제주도다운 미감은 만들어졌겠지. 제주도가 점점 더 좋아진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차를 몰고 다니는 일, 여행자가 누릴 마지막 즐거움이다. 가을에 오면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귤밭 올레와 하얗게 팬 억새풀들이 바람에 날리는 중산간 올레를 걸을 수 있겠지. 몇 번의 가을이 지나야 나는 그 길에 설 수 있을까. 제주, 가깝고도 먼 곳이다.
제주 오일장을 둘러보고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잤는지 모자가 벗져진 것도 몰랐다. 여행 중 분실물이 발생했고 화요일부터 시작된 여행 후유증은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비루먹은 병아리처럼 비실거렸다. 아, 그런데 어쩜 좋은가. 그 피곤마저 달콤한 추억이니!
첫댓글 명상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 제주는 우리나라땅 인데도 막상 도착하고 보면 느낌이 참 묘하죠.. 복잡한 도시를 떠나 휴식하기 참 좋은 곳이예요. 아~ 이젠 휴식의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지곤합니다... 저두 제주에 가서 렌트해서 다니며, 쉬며...그런 발길닫는대로하는 그런 여행해 봐야겠어요...
제주, 어쩐지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답니다. 가보니 정말 좋은 곳이었어요. 그 땅의 에너지가 나와 맞는 느낌이랄까. 저절로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의 마음으로 놀며 쉬며 그리 다니는 여행이 좋아요. 해보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주도, 나도 이제야 가본 걸요. 아, 지붕에 뚜껑있는 차로 다니면 정말 더 좋겠어요. 제주위 바람을 제대로 맞을 수 있겠어요. 자못 기대됩니다.
아.. 초이님~ 아직 제주도를 못 가봤다니...빨리 함 가 보시길... ^^
글 잘 읽고 갑니다..2부까지 읽을때는 좋다~ 좋으셨겠다~란 생각이었는데,,3부 읽으니 나두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란 생각이(약도 오르고,ㅋㅋ),,마침 화욜날 우미갈분들이랑 가평쪽 미술관을 돌아보려 합니다. 다녀와서 후기 올릴께요.(이번엔 제 차롑니다,ㅎㅎ)
지금쯤 가평 부근 갤러리 순례 마치고 초여름 햇빛을 그림자로 길게 이끌며 북한강변을 달리고 있겠군요. 남이섬에도 가셨겠지요. 남이섬에서 호명산길을 선택하면 드라이브의 즐거움이 배개되었을 텐데......
제주도를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곳 두모악, 김영갑갤러리에서 작가의 생전사진과 유물들 보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혼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웠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행의 피로감 요즘 근질근질합니다
여행의 피로감, 피로감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나도 벌써 그리워요.
잘봤습니다^^글 잘 쓰시네요. 사진도 좋고요 .매년 너댓번씩 가는데도 주마간산 합니다
사진은 친구가 직어준 것이랍니다. 일년에 너댓 번 가실 일 있다면 업무 출장이거나 골프여행일 테지요. 그러면 저리 찬찬히 느릿느릿 둘러볼 시간이 없을 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