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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은 1624년경에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을 위한 목적으로 지은 쉼터, 사냥궁으로부터 출발했다.
루이 13세는 앙리 4세의 느닷없는 죽음 이후로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분쟁에서 살아남고자 끝까지 가톨릭을 고수했던 인물이다. 개신교도였던 아버지 앙리 4세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장 신임하던 측근에게 마차를 타고 가다 살해당한 인물이다. 성 바르톨레미오 대학살을 유도했던 앙리 2세의 꺄뜨린느 드 메디치나 앙리 4세의 부인이었던 마리 드 메디치 왕비는 모두가 다 당시 최대 권력의 집안이었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여자들이었다. 종교는 당시 루터의 사상이 들불처럼 번지던 유럽대륙에 구교의 상징이었던 보수적 가톨릭이었다.
문제는 이탈리아 여자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대의 문화는 거의 모두가 다 이탈리아 풍이다. 아마도 궁정에서조차 이탈리아어가 난무했을 것이다. 이때 한 가지 메디치 가문의 공헌이 있었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요리법으로 손꼽히는 프랑스 요리에 이탈리아 음식이 개입했다는 점일 것이다.
루이 13세는 아버지 앙리 4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성직자 의식 개혁을 위해 소르본느(오늘날 빠리 4대학으로 불리는 빠리 소르본느 대학)를 개편하고 자주 베르사이유 숲(당시는 9천 헥타에 달했으니 평수로 환산하면 2천 7백만 평에 해당한다)으로 출타를 한다. 혼자 출타를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점지해 준 아들 루이 14세와 함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위해 명이 다해가던 루이 13세는 얼마나 노트르담 성당에 무릎 끓고 기도했던가. 루이 14세가 후일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노트르담 성당에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성가대를 봉헌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폴로를 꿈꾸었던 태양왕 루이 14세
하늘이 점지해 준 아들 루이 14세의 손을 이끌고 찾아다니던 베르사이유 사냥궁은 1632년 살로몬 드 브로스와 삘리베르 르 롸에 의해 이미 손질되어 있었다.
이 사냥궁은 황실궁정(la Cour Royal) 저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명예의 궁정(la Cour d'Honneur)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사냥궁의 건축재료는 구운 흙벽돌과 석재가 사용되었고 중앙에 자리잡은 정방형의 건축물을 좌우로 양날개처럼 회랑들이 들어서고 그 앞쪽 약간 낮은 위치엔 주랑(柱廊)이 자리잡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분명한 경계가 주어진 이 주랑은 루이 14세때 베르사이유 궁전의 기본축이 되는 대리석 궁정(la Cour de Marbre)이다.
대리석 궁정은 1661년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첫 번째 공사가 시작됨에 따라 실제 앞으로 완성될 궁전의 중심 건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아버지 루이 13세의 궁전을 확장하고 또한 ‘자연에 대한 최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한(쌩 시몽) 목적으로 궁전 증축 공사를 벌인 것이다.
루이 14세를 두고 세인들은 이른바 태양왕이라 일컫는데, 이는 절대왕정을 펼친 루이 14세의 확고한 군주정치만을 염두에 둔 것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는 문화적으로 로마에 빚진 것이 많았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경도된 정도만이 아니었다. 로마는 그래도 그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를 자신들의 ‘단군’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리스에서 제우스만큼 강력하면서도 그리스인들이 자주 찾지 않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그들의 ‘단군’으로 모셔왔을 뿐이다.
이후에 이를 창피하게 생각한 로마인들은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냈다. 주로 황제와 황후들이 죽으면 이를 신격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로마의 변방이었던 갈리아 지방(오늘날의 프랑스)은 그렇지를 못했다. 프랑코 왕국이 들어섰어도 기독교가 공인되었어도 그들의 주신은 늘 로마의 주신 아폴로였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자주적이었던 루이 14세는 자주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표징임은 물론 군주정치를 위해서 자신이 아폴로가 되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짐은 태양이고 국가이니……”란 루이 14세의 말은 이를 여실히 예증해 주고 있다.
살아있는 태양의 신, 아폴로가 된 루이 14세는 자신의 군주정치에 합당한 자주적인 프랑스 궁전을 위해 아버지 루이 13세가 지은 베르사이유 사냥궁을 확대 개편하기에 이른다. 이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궁전은 마치 하늘에서 보면 독수리가 나는 듯한 좌우 대칭의 건축물들과 중앙에 위치한 건물로부터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정원과 숲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을 상징함은 물론 그의 진취적 기상을 건축으로써 재현해 낸 것과 다름 아니다. 이렇듯 베르사이유 궁전은 프랑스 고유한 건축물을 비롯하여 내부 장식, 현대적인 감각의 가구와 미술품들(르 브룅의 지휘감독에 따른), 또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원들(르 노트르에 의한)과 트리아농(Trianons)의 부속건물들이 차례차례 완성됨으로써 프랑스 고전 예술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루이 14세의 야심에 찬 기획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는 루이 13세때 르 보(Le Vau)가 고안해 낸 여러 장식적 요소들을 가미한 베르사이유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변형은 정원에서 시작되었다. 르 노트르(Le Notre)는 완전히 새로운 청사진을 펼쳐놓았다. 베르사이유 정원에 들어 선 수많은 조각품들을 비롯하여, 진기한 동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사육하기 시작한 동물원, 그리고 정원에 심어진 오렌지나무들이 그러했다. 이 시대는 나무를 자르는 정원기사가 귀족이 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만큼 루이 14세는 문화와 예술을 정치에 이용할 줄 알았던 현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1668년 베르사이유는 새로운 개조들이 이루어 졌다. 유일하게도 대리석 궁정의 정면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부분들은 1668년에서 1671년에 이르는 시기동안 이루어진 공사에 의해 르 보가 제안했던 요소들이 말끔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대리석 궁정은 양쪽으로 길게 자리잡은 우아하면서도 깔끔하게 완결된 두 개의 날개를 갖추게 되었고, 회랑들이 늘어서게 되었으며, 지붕과 테라스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내부 개조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르 브룅(Le Brun)의 지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루이 14세의 명에 의한 세 번째 궁전 개조 공사는 F. 망싸르의 조카인 J. 아르두엥 망싸르(J. Hardouin-Mansart)에 의해 1678년경에 착공되었다. 망싸르는 대리석 궁정의 지상층(1층)에 있던 커다란 테라스를 없앴다. 그리고 오른쪽 라인을 따라 회랑을 짓고 테라스가 있던 자리에 회랑을 지었다. 모든 공사는 논리(la logique)와 합리(la raison)에 의해 이루어졌다.
궁정 외부에 대한 이와 같은 개조는 궁정 내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망싸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르 브룅은 이른바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을 완성했던 것이다. 거울의 방은 전체 길이가 75미터에 달하고 폭은 10미터에 달했다. 거울의 방은 두 개의 살롱 가운데 자리잡았으며, 17개의 커다란 유리창과 유리창 맞은 편으로 역시 17개의 커다란 거울판이 벽면을 수놓아 방 전체를 환하게 비췄다. 400개의 거울을 붙인 판은 알려진 대로 당시 최대의 크기였다. 이 17개의 유리창과 마주한 역시 열 일곱 개의 유리판의 숫자는 당시까지 루이 14세의 친정 기간을 상징한 것이다.
베르사이유의 성 루이 성당은 1689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전쟁으로 잠시 중단된 후 망사르에 의해 1699년 재개되고 망사르가 죽은 후 망사르의 제부인 호베르 드 코트가 1710년 완성시킨다. 코린트식 기둥에 고전적인 해석을 가미한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입구는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장식되었다. 빛이 가득 들어오는 성당 내부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붉은색 난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왕의 아파트에 쓰여진 호사스런 대리석은 사용되어 있지 않고 나석으로 주로 구성이 되어있다. 1층은 거대한 아치를 사각형의 기둥이 받치고 있어 루브르를 연상시킨다. 바닥은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마치 기하학적 모양의 양탄자로 장식된 느낌을 준다. 앙투안 쿠아펠과 라 포스, 그리고 주브네가 그린 구약과 신약을 대비시킨 성화로 천장 장식이 되어있다.
샤를르 르 브룅의 제자인 장 쥬브네가 그린 그림으로 사도위로 내려오는 성령 Descente du saint Esprit sur les apotres은 성 루이 성당의 천장을 장식하는 삼위일체를 재현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왕과 함께 있는 사도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은 왕권 신수설을 의미한다. 이는 1685년 낭트 칙령을 취소시킨 후 프랑스의 국교로 카톨릭이 지정되었음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 성당에서는 루이 15세, 16,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으로 매일 13시에 미사가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방은 왕의 아파트 중에서 가장 나중에 지어진 방으로 태양이 왕의 상징이므로 태양 주위를 도는 일곱 개의 행성을 왕의 아파트의 주제로 삼았다 (펠리비엔, 1674) 모두 풍요의 방 다음, 비너스의 방, 다이아나의 방, 마르스 즉 군신의 방, 메르큐르의 방 아폴론의 방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왕의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 행성의 아파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여섯 개의 방에 1710년 새로운 방인 헤라클레스의 방이 덧붙여진다. 이 방에는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난로가 있고 대리석 장식이 화려하여 거울의 방과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또한 훗날 1664년 베니스 공화국이 루이 14세에게 헌정한 베로네즈의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가 걸린다. 베로네세는 1570년 베니스의 한 수도원 벽을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완성한다. 요한복음의 내용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시몬이 예수를 맞고 있는 그림이다. 반원형의 테이블 한 개에 사도들이 앉아있고 다른 한 개에는 화가의 동시대 인물들이 등장한다. 중앙에는 마리 마들레느가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부으며 속죄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화가 프랑수아 르무안느가 1733년에서 3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 신의 대열에 오르는 헤라클레스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480 m²의 크기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천장화 중 하나이다. 화가 프랑소아 르무안느는 이 그림을 3년간에 걸쳐 남의 도움 없이 거의 혼자 완성하였다. 이 그림을 그린 후 궁정화가로 임명되었지만 기나긴 작업에 지친 화가는 곧 자살하고 만다. 이 그림은 석회에 그려진 프레스코 천장화가 아닌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이다. 신의 대열에 오르는 헤라클레스를 축하하는 올림푸스 산의 142명의 인물을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의 헤라클레스는 루이 14세를 상징한다. 매주 월, 수, 목요일에 있었던 연회장소로 쓰였다.
왕의 아파트 중 첫번째 방이다. 왕실경비군의 방으로 장식의 주제 또한 그 기능에 맞추어져 있다. 루이 14세 치하에서 이 방에는 아우스부르크 전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1689년에 녹인 화려한 은제가구가 놓여있었다. 천장의 중앙에는 오드랑이 그린 전쟁과 역사의 신을 동반하고 늑대들이 끄는 전차에 탄 군신 마르스를 재현한 천장화가 있다. 좌측 천장에는 주브네가 그린 헤라클레스와 풍요의 여신, 펠리시테와 함께한 승리의 여신 천장화, 우측 천장은 르네 앙투안 우아스가 그린 공포, 겁, 창백함의 여신이 있다.
벽난로에는 거대한 두 개의 그림이 있는데 르 브룅이 그린 알렉산드르 황제와 다리우스 가족이, 현재 루브르에 있는 베로네세의 엠마우스의 순례자의 사본이 있다.
1684년 왕이 이 아파트에 거주하지 않게 되자 음악가들을 위한 대리석 무대가 방 양쪽에 설치되어 콘서트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1750년 무대가 사라지고 현재의 모습을 갖게된다. 이 방에는 두 개의 가짜 문이 있어 진짜 문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천장에는 새벽 별과 함께 수레에 오른 머큐리를 볼 수 있으며, 이방은 왕실 가족의 놀이방으로 쓰여지기도 하였던 곳이다. 또한 루이 14세의 관이 1주일간 안치되어 있었던 곳이된다. 본래 대기실이었던 이 방에는 이후 금실로 장식된 커다란 장식용 침대가 놓인다. 이 방에서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이 1700년 스페인왕위에 오르기 전 3주동안 머물기도 하였다.
현재에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티치아노의 두 개의 작품 엠마우스의 순례자와 예수의 입관이 금과 은으로 장식된 벽에 걸려 있었다. 현재는 왕태자의 주거지인 뫼동 성에서 온 미셀 코르네이유의 목동 아시스와 요정 갈라테, 앙투안 쿠아펠이 그린 아폴로신과 다프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천장중앙에는 필립 샹파뉴의 전차를 탄 머큐리(헤르메스)신이 있고 그 주위를 인도 대사를 알현하는 알렉산더 황제, 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프톨레메우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들을 기술하도록 전세계의 동물을 모으는 알렉산더 황제가 그려져 있다.
방 안쪽의 1664년 퐁텐블로 성에서 루이 14세의 교황의 특사 알현장면을 재현한 양탄자는 루이 14세가 진흥시킨 고블랭 양탄자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앙투안 모랑이 루이 16세에게 기증한 괘종시계와 트리아농궁의 왕의 방에서 가져 온 샤를르 불이 1709년에 만든 코모드장이 놓여있다.
추운 날씨에는 왕의 침실로 이용되었던 이방은 루이 14세가 외국대사들을 알현하던 곳으로 벽위의 3개의 닫집고리가 왕좌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오른쪽 벽으로는 대관식복장의 루이 14세를 왼편으로 루이 16세를 볼 수 있으며 천장에는 태양 수레 위에 올라 있는 아폴로 즉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인물들, 계절 장식,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4개 대륙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벽은 금 은으로 수를 놓은 벨벳으로 장식되어 있고 루벤스의 토미리스와 헤라클레스의 업적을 담은 그림이 걸려있다.
은으로 된 왕좌는 약 3 미터이며 예전에는 단 위에 놓여있었고 단이 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벽난로에는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현재에는 루브르에 있다. 문은 루이 16세인 왕태자의 탄생을 상징한다.
거울의 방은 1678년에서 1684년 사이 건축가 쥴 아르두앵 망사르가 설계하고 샤를르 르 브룅이 장식하여 완성되었다. 위치는 루이 르 보의 이태리식 테라스가 있던 자리로 동서를 잇는 구도를 가진다. 바로크 양식의 너비 10.50 미터에 세로 73미터의 이 방에는 17개의 창과 같은 수의 대형 거울이 있다. 거울이 귀하던 17세기 당시에 이만한 크기와 품질의 거울로 장식된 거울의 방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는 1665년 생고뱅의 전신이 되는 포부르 생-앙투안느의 이름으로 불렸고 콜베르가 창설한 거울 산업의 기술적 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계기로 베니스의 거울산업을 프랑스가 따라잡게 된다. 이 때부터 콜베르는 베니스로부터 거울 수입을 금지시킨다.
천장은 샤를르 르 브랭이 루이 14세의 치적을 그려놓았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여덟 개의 로마 황제의 상반신상이 있고 여덟개의 조각, 즉 바쿠스, 비너스, 헤르메스, 퓨디시우스, 트로이의 비너스, 우라노스, 네메시스, 마지막으로 마를리 정원을 위해 프레맹이 조각한 다이아나 상이 루브르에 있는 베르사이유의 다이아나를 대신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파리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왕가가 뛸르리 궁으로 옮겨 갈 때까지 이방을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마리 앙뚜와네뜨의 방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천장은 왕비의 덕목인 자비, 풍요, 정숙, 신중함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장식되어있고 거울 위로는 루이 16세 , 마리앙뜨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와 오빠인 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의 양탄자 초상화가 걸려있다. 침대 위의 보석상자는 1786년 파리시가 마리 앙뜨와네트에게 선물한 것이다. 또한 이방에서 공개적으로 19명의 왕자와 공주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로코코 양식의 목재장식과 프랑수아 부세의 천장 그림은 루이 15세가 부인이 마리아 레첸스카를 위해 만들게 한 것이었는데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를 유행이 지난 것이라 여겨 방을 새로 장식한다. 특히 라일락과 공작깃털이 수놓인 비단침대보가 대표적이다.
왕비의 친구이자 초상화가인 엘리자벳 루이즈 비제 르브룅이 1787년 그린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와 공주 왕자들은 전해에 터진 ≪ 목걸이 사건 ≫으로 국민의 미움을 산 왕비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초상화를 통해 인기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였다. 장녀인 마담 루아얄과 당시 7세이던 왕자 루이 조셉이 그녀의 곁에 자리 잡고 있고 장차 루이 17세는 그녀의 무릎에 앉아있다. 비어있는 요람은 당시 요절한 아이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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